메인화면으로
백설공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백설공주

[한윤수의 '오랑캐꽃']

한국에 시집온 이주여성들은 대개 F-2 비자를 갖고 있다. 소위 <국민의 배우자>라고 불리는 비자이다. 이 비자를 가진 이주여성이 E-9(비전문 취업) 비자를 가진 일반 노동자에 비해 유리한 점은 직장 이동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리한 점도 있다. 일반 노동자는 고향집 한 군데만 신경을 쓰면 되지만, 이주여성은 시집과 고향집 양쪽에 모두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골치 아프지!

피부가 눈처럼 하얗고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베트남 각시가 울산에서 밤 열차를 타고 올라왔다. 이름이 란(가명)이다. 이렇게 피부가 하얀 베트남 여인은 프랑스 피가 섞인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그런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그녀는 호치민 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100 키로쯤 떨어진 타이닌 성 출신이다. 타이닌은 3면이 캄보디아에 맞닿아 있는 국경지대로 프랑스가 지배하던 당시에 프랑스 군과 *베트민 간에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던 고장이다. 프랑스 군이 오래 주둔해서 프랑스 피가 섞였냐? 하지만 그건 확인할 길 없는 옛날 얘기이고 어쨌든 그녀는 꿈 많은 소녀시절을 어머니가 꾸려가는 구멍가게 일을 도우며 지냈다. 그러다가 4년 전 갑자기 한국으로 시집오게 된 것이다.

신부는 19살, 신랑은 그녀보다 17살이나 많은 36살 노총각이었다.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 아들이 커서 지금은 3살이다.

하지만 신랑은 다리가 아파서 일을 못했다. 신랑은 시어머니와 함께 집에 있고 그녀가 주로 일을 다녔다. 회사가 멀어서 그녀는 기숙사에서 기거하고 일주일에 하루 일요일에만 아들을 보러 집에 간다. 그녀는 아들의 유아원 교육비 명목으로 시집에 매달 30만원을 내놓고 있다.

짐작할 테지만 이주여성들은 대부분 시집에도 생활비를 보태고 친정에도 생활비를 보내는 이중고(二重苦)에 시달린다. 보나마나 그녀도 같은 형편이라는 것쯤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어느 이주여성이 시어머니에게 시집살이를 호되게 당했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여자가 살림은 안하고 공장에 다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니 월급을 타서 친정에 보낸 게 괘씸죄에 걸린 것이었다.

고부갈등이 심해지자 그 동네 목사님이 중재를 섰다. 월급에서 개인 용돈 빼고 남은 가용액을 100이라고 치면 친정에 50을 보내고 시집에도 50을 내놓기로! 돈 문제가 해결되자 시집살이도 사라졌다. 역시 전 세계 어디 가나 바아흐로 자본주의 시대이다.

란은 작년에 화성시 봉담읍 왕림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고 거기서 월급을 못 받은 게 101 만원쯤 되었다. 그녀는 그 돈은 떼인 셈치고 울산으로 내려가 일했다. 하지만 친구 소개로 우리 센터를 알게 되자 한국인 동료를 통해 <어떻게 하면 돈을 받을 수 있는지?> 여러 번 문의전화를 해왔고 필요한 서류를 보내왔었다. 나는 그 서류를 토대로 노동부에 진정서를 보냈고 출석기일이 잡히자 그녀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제 오후 5시 회사 일을 마치자마자 울산역에 가서 5시 50분 기차를 탔다. 수원역에 도착한 것이 밤 10시 30분. 역 앞의 친구 집에서 자고 아침에 발안까지 와서 나를 만났다.

수원 노동부에 출석한 사장님은 체불사실을 순순히 시인했다.
"이달 말까지 지불할 게요. 그 전이라도 돈 생기면 빨리 드리구요."

쉽게 문제를 해결하고 발안으로 돌아오는 길, 그녀가 해병대 사거리에서 내렸다.
"여기 친구 집에서 점심 먹고 저녁 기차로 울산 내려갈 게요."
"그래요. 돈 받으면 전화나 해줘요. 알았죠?"
"예, 고마워요. 선생님."
돌아서는 그녀를 보면서 어디 가나 여성들이 참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민(越盟) : 베트남 독립동맹. 2차 대전 중 일본군 및 프랑스 식민주의자에 저항하기 위하여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 무장조직을 갖추어 8년간의 전투 끝에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을 포위하고 항복시킴으로써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