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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살된 국민의 기본권과 인권

[창비주간논평]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민주화와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아시아의 선두주자 중 하나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서 있었는지 우리는 거의 매일같이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때로는 자근자근, 때로는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있다.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죽어가는 생명이 속출하고 있지만 인권을 보호해야 할 국가기관들은 손을 놓고 있거나 심지어 인권유린에 앞장서고 있다.

촛불정국을 거치며 이명박정권은 특유의 아집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러한 아집은 인권유린에 맞선 처절한 죽음 앞에서도 한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까지 내던진 이들이라면 그 절박한 사정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용산참사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장자연씨 사건, 화물연대 박종태씨 자살 이후 현 정권은 망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모르는 냉소적 집단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인권현실 거리낌 없는 아집과 냉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수백만 애도의 인파와 각계의 시국선언을 통해 표출된 자성과 변화의 요구를 현 정권은 "아무도 원망하지 말라"는 유언의 한 구절에 매달려 어물쩍 비켜가고 있다. 죽음으로써 연예계의 비리를 고발하려 한 장자연씨 사건 이후 국민들은 '성상납'을 즐기는 파렴치한 대한민국 엘리뜨들의 면면이 밝혀지길 기다렸으나 이러한 기대가 순진한 것이었음을 곧이어 깨닫게 되었다.

용산참사에 대한 정권의 행태는 국민의 인내를 시험하는 듯하다. 사건의 진상 은폐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가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최근 서울 경찰특공대는 "북한의 도발위협" 운운하면서 '대테러 종합전술 훈련'이라는 걸 실시했는데 실제 그 내용은 용산참사 진압 모습과 똑같았다고 한다. 용산에서의 만행에 대해 단 한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고 농성에 참가한 철거민만 구속시킨 현 정권은 용산범국민대책위의 말처럼 "이제는 보란 듯이 살인진압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 이 정권은 철거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잠재적 테러분자로 간주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박종태씨가 죽음으로써 고발하고자 한 이 땅의 노동현실은 지금 어떠한가. 최근 뜨거운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른 비정규직 문제와 최저임금제를 대하는 이명박정부와 여당의 모습은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웅변하고 있다. 경제성장률 7%, 국민소득 4만불, 7대 강국 진입이라는 소위 747공약을 내세우고 당선된 대통령의 정부와 여당이 주 40시간 노동을 기준으로 고작 월 70만원 정도밖에 안되는 최저임금마저 삭감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현재 비정규직의 평균임금은 정규직의 50%밖에 안되는 123만원 수준인데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비정규직 문제의 근원적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은 노동유연성 확대, 즉 정규직을 더욱더 비정규직화하자는 것이다. 도대체 747공약은 어느 나라 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란 말인가?

민주화 시계 돌려놓는 '선진화' 주문

입만 열면 '선진화'를 외치는 정부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시계바늘을 20~30년 전으로 후진시키고 있다. 헌팅턴의 이론에 따르면 2007년 정권교체는 "민주주의가 되돌리기 불가능할 정도로 공고해진 지표"여야 했다. 그러나 이 정권교체는 우리 사회가 그간 어렵게 이뤄놓은 민주주의를 순식간에 후퇴시켜놓았다. 정권이 끝나는 시점에 민주주의와 인권의 재고가 과연 얼마나 남아 있을지 심히 염려스러운 상황이다.

최근 정부는 전교조 교사들의 시국선언에 대해 전원 징계조치라는 초유의 강경책으로 맞섰다. MBC <PD수첩>에 대한 수사과정에서는 작가의 개인 이메일을 공개함으로써 사생활 침해 논란까지 불러일으켰다. 모두 표현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고 위축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의심된다. '미네르바' 구속사건에서 이미 현 정권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이들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들은 정권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데 있어 걸림돌로서 침묵시키고 격리시켜야 할 대상인 것이다.

맑스는 일찍이 국가기구를 '부르주아계급의 공동업무를 관리하는 위원회'로 파악한 바 있다. 여기서 국가는 보통 스스로를 중립적인 것으로 표방하며, 이러한 '위원회'의 역할은 무대 뒤에서 수행된다. 그러나 현 정권 하에서 국가기구는 노골적으로 '자본의 완장'을 차고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면서 이에 걸림돌이 되는 기본권과 민주적 제도를 손보려 하고 있다. 소위 미디어법 통과는 그 야심찬 첫 '거사'가 될지 모른다.

'자본의 완장' 차고 언론자유 옥죄는 미디어법

언론의 자유는 관점에 따라 두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우선 그것은 언론산업의 자유를 의미할 수 있다. 다른 한편 그것은 언론을 통한 의사표현의 자유를 의미할 수 있다. 현 정권은 미디어법 통과를 통해 자본의 언론산업에 대한 자유를 대폭 확대하려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진정한 언론의 자유, 즉 언론을 통한 의사표현의 자유는 그만큼 말살될 것이다. 언론자유가 아무리 법적으로 보장된다 해도, 펜대는 언론자본의 사주 입맛에 따라 춤을 춘다는 게 이제까지 동서를 아우르는 경험법칙이다.

세계인권선언 이후 오늘날에 이르는 인권이념 발전과 그 실현의 도정에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도 늦게나마 활발히 동참해왔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수많은 인권NGO의 활동을 통해 한국은 경제발전뿐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 측면에서도 "많은 나라의 시샘과 부러움"을 사고 있다고 자평해왔다. 안경환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의 이임사에는 정권교체 이후 어느덧 "국제사회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된 우리사회의 인권현실에 대한 자괴감과 현 정권 및 그에 굴종하는 공직자들에 대한 분노감이 진하게 배어 있다.

국민과의 소통 외면한 댓가 치르려는가

그런데 민주주의와 인권의 긴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우리가 처한 상황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와 인권보장체제는 18세기 후반 미국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부르주아혁명의 산물이다. 그렇지만 19세기 이후의 역사는 부르주아계급이 노동자계급 등 민중이 정치무대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우뚝 서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민주공화국보다는 봉건적 절대주의로부터 파시즘에 이르는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선호해왔음을 보여준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이러한 성향을 지닌 지배계급 및 그 국가의 끊임없는 '반민주'의 시도에 맞서 민중이 완강하게 저항함으로써 수호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집회와 시위의 권리, 표현과 양심의 자유, 사생활이 보호받을 권리 등 가장 기본적인 기본권을 수호하기 위해 현 정권과 힘겨운 싸움을 치러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현 정권은 소통의 거부를 통해 사회적 쟁점이 "이성의 법정"(칸트)에서 다루어지는 것을 거부하고 우리사회에 폭력의 잠재력을 키워가고 있다. 일방적 주장과 독단은 소통의 단절, 이성적 논의의 거부로서 사회적 '전쟁'의 불씨를 내재한다. 소통의 요구가 공허한 메아리로만 돌아올 때 발생할 불행한 사태의 책임을 현 정권은 어떻게 지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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