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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추억'을 '추억의 냉전'으로 만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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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추억'을 '추억의 냉전'으로 만들기 위해

[화제의 책]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냉전의 추억>

모순(矛盾). 김연철의 <냉전의 추억: 선을 넘어 길을 만들다>(김연철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를 읽으며 떠올린, 1980년대의 단어다. 선을 넘어 길을 만들었음에도, 이제 그 길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금강산 관광은 중단되었고, 개성공업지구는 폐쇄위기에 직면해 있다. "대한민국은 1950년대의 시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

평화의 길에 일시적 후퇴는 있을 수 있지만 다시금 냉전시대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은 무너졌다.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군사적 긴장의 상태다. 말의 공방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교류협력의 역사는 부정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과거의 단어, 모순을 다시금 불러온 이유다.

▲ 사진으로 담은 '냉전의 추억'들. ⓒ후마니타스
<냉전의 추억>은 이명박 정부의 "달빛정책"이 추진되고 있는 시점에서 냉전의 기억을 불러낸다. 달이 기우는 내일을 준비하는 성찰이다. <냉전의 추억>은 냉전세력과 평화세력의 모순의 역사를 발과 가슴으로 기록하고 있다.

모순의 오래된 철학적 정의인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처럼, 한반도에서는 분단체제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이익, 서로 다른 생각, 제도 속에서 서로 다른 위치를 가진 정치·사회세력이 경쟁하며 공존해 왔다. <냉전의 추억>은 이를 실증한다. 그리고 그 모순을 전환시키려는 열정을 담고 있다. 실증과 열정은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모순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 함께 갈 수 있다.

<냉전의 추억>의 출발점은 이산가족의 "눈물의 추억"과 "깊은 슬픔의 기억"이다. 1985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그 상처의 치유가 시작된다. 그 이전까지는 남북의 만남 자체가 사건이었다. 1971년 8월 20일 남북의 첫 번째 만남은 미국과 중국의 데탕트의 산물이었다. 외적 충격이 남북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후 국제환경의 변화와 남북대화의 재개는 하나의 법칙이 되어 버렸다. 만나면서도 남북은 처절하게 서로 경쟁했고, 1991년 기본합의서를 체결하면서 서로의 이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인정하게 된다.

거기에 이르는 동안 "술김에, 홧김에, 농담 혹은 별 뜻 없이 내뱉은 말들이, 북한을 고무·찬양·동조"했다며 남쪽의 사람들이 막걸리 반공법, 막걸리 보안법으로 처벌되었다. 희극과 같은 간첩사건들, 남북의 욕의 공방 등은 슬픈 우리의 자화상이(었)다. <냉전의 추억>은 웃음과 눈물로 그 모순을 기술하고 있다. 웃음과 눈물이 하나로 되는 경지를 우리는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물꼬가 트인 남북대화의 역사는 비밀대화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냉전의 추억>은 밀사였던 황태성·정홍진·이후락·박철언·박지원·임동원·김만복 등을 불러오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대화의 기록들을 쓰고 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냉전세력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남쪽의 권위주의 정부가 왜 비밀대화를 추진했을까. 정당성의 결여를 보완하기 위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남북대화였다. 대북정책과 남북관계는 국내정치의 연장(延長)이었다.

▲ <냉전의 추억>(김연철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프레시안
지금도 이 법칙은 작동하고 있다. 북한정보에 대한 왜곡의 역사는 이 주장을 입증하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즉, 국내정치의 모순을 읽어내지 못하는 한 대북정책과 남북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비슷한 법칙이 작동할 수밖에 없는 북의 국내정치를 <냉전의 추억>에서 보기란 어렵다. 아쉬운 부분이다.

국가적 차원의 비밀대화만큼이나 <냉전의 추억>에서 공을 들이고 있는 부분은 한국 시민사회 인사들의 불법 방북사다. <냉전의 추억>은 김낙중·황석영·문익환·임수경 등을 불러오면서, 그들의 사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엄혹한 시절에 선을 넘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길을 만들었다."

이들의 불법대화와 밀사들이 진행한 비밀대화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분단모순이 야기한 이 기이한 공존이 설명될 필요가 있다. <냉전의 추억>의 이론편을 기대하는 이유다.

<냉전의 추억>의 또 다른 구성요소로 3차 핵위기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여기서 주목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남-북-미관계다. 남북미관계의 구성은 지구적 수준의 탈냉전이라는 외적 충격과 분리되어 설명될 수 없다. <냉전의 추억>은 탈냉전시대 남북미관계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법칙을 찾아내고 있다.

"북한과 미국이 대화를 시작한 1980년대 후반 이후 미국에서 대북 협상의 필요성은 미국 자체의 '정책 결정 과정'보다는 북한의 정책 전환이나, 남북대화와 한미대화가 긍정적인 상호 관계를 이룰 때 가능하다. 남북관계가 한미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한미관계가 북미관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 북미대화가 경색국면에 접어들면, 남북관계는 더 이상 진전하기 어렵다. 한반도 평화는 남북미 삼각관계가 선순환을 이룰 때 가능하다."

이 법칙은 지금의 남북관계의 경색이 가지는 효과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제 다시 모순으로 돌아가 보자. "냉전을 추억하며 평화의 미래를 그려"보려는, "마음속의 38선을 넘어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실현하려는, 정치·사회세력의 집합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북대화는 중단되었고, 남북관계는 경색된 상태다. 김연철이 질타하는 것처럼 "정권이 바뀌었다고 말이 달라진 사람들이 많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정책은 불회귀선을 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해가 한반도의 미래"가 되기 위해서는, 남북이 군사적 신뢰구축을 진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른바 북핵문제의 지속은 남북이 군사적 신뢰구축을 만들어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정권의 교체와 정권교체 이후 냉전시대로의 회귀는 평화세력이 시민사회 내에서 튼튼한 진지를 가지고 있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대북정책의 한계와 더불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관통했던 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의 문제도 언급되어야 한다.

대북정책만으로 정치권력을 구성할 수는 없다. 대북정책은 한국 정치에서 부차적 구성물일 수 있다. 탈냉전·민주화 이후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 가운데 한국의 국내정치의 역할은 점점 커지고 있다. 평화의 미래를 구상하는 이들은 대북정책이라는 단면을 넘어 사회적 모순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냉전의 추억>에서 편린처럼 드러나는,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철학적 기초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책의 모두에는 남북접촉의 5단계 설이 제시되어 있다. 호기심에서 시작해서, 실망하고, 설득과 충돌을 반복하다 체념하고, 마침내는 차이를 인정하는 공존에 이르는 단계다. 책 말미에서는 북한의 비극적 경제현실을 언급하면서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좋은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프레시안
김연철이 한 권의 책으로 냉전의 추억을 추억의 냉전으로 만드는 방법을 제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모순의 정치에 대한 직시가 약하다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냉전의 추억>의 앞뒤에는 그 단초들이 있다. 차이의 철학, 양보의 철학, 공존의 철학이 그것들이다.

이 철학들이 윤리적 정언명령을 넘어서는 한반도의 정치철학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항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윤리와 이익이 서로 충돌하지 않을 수 있는 담론의 개발이다. 다른 하나는, 차이의 철학이 가질 수 있는 차이의 절대화에 대한 유의다. 차이를 인정하지만, 차이가 생산되는 기제를 탐구하고 차이를 절대화하지 않는, 탈차이의 철학의 모색이다. 즐거운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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