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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

[한윤수의 '오랑캐꽃']<98>

자기 형편을 설명할 때 자기한테 유리한 말만 하고 불리한 말은 일절 하지 않는 아주 독특한 노동자가 있다. 마치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 같다고나 할까? 소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자기한테 불리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자유이지만, 이런 사람을 상대하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 왜냐하면 그가 처한 사정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알아야 면장도 하는 법이고, 알아야 도와줄 것 아닌가!

어느 일요일 필리핀 노동자 말론(가명)이 찾아와서 말했다.
"돈 못 받았어요."
"무슨 돈 못 받았어요?"
"퇴직금하고 월급 두 달 치요."
대략 계산해 보니 350만원 정도 된다.
"못 받은 돈 350만원 정도 되요?"
"예. 맞아요."
"알았어요. 회사와 얘기해 볼 테니 다음 주 일요일 다시 오세요."

주중에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거기서 퇴직한 필리핀 근로자 말론 아시죠?"
"예, 압니다."
"퇴직금하고 월급 두 달치가 밀렸다면서요?"
"예. 맞아요."
"350만원 정도 되죠?"
"아닌데요."
"그럼 얼마입니까?"
경리 담당자가 새촘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불 61만원은 빼야죠."
"가불한 게 있어요?"
"예, 필리핀 갔다 올 때 비행기 티켓값 61만원 빌려주었거든요."
"말론도 참! 왜 그런 얘기를 안 하지? 그럼 받을 게 289만원쯤 되겠네요."
"289만원 맞는데요. 100만원 빼주기로 한 거 얘기 안하던가요?"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100만원 빼주다니! 금시초문인데요. 말론이 빼주겠다고 했나요?"
"예."
"언제요?"
"어제요"
"어디서?"
"수원 노동부에서요."
"어? 노동부에도 출석했나요?"
"예. 사장님도 출석하고 말론도 출석했죠"
"왜 출석했나요?"
"말론이 노동부에 진정했으니까 출석하지, 괜히 출석하나요?"
"엥? 말론이 노동부에 진정했다 말인가요?"
"예. 모르셨어요?"
나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어제 출석했다면 최소한 14일 전에는 진정했다는 얘기니까.

노동부에 전화했다.
K감독관이 웃었다.
"목사님, 다 끝난 사건이에요. 100만원 깎아주기로 합의했고 취하서에도 지장 찍었거든요."
나는 더 멍청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다음 주 일요일 말론이 다시 왔다. 내가 물었다.
"노동부에 진정했다면서요?"
"예."
"왜 얘기 안 했어요?"
"........ "
"100만원 빼주기로 했다면서요?"
"몰라요."
"취하서에 싸인했다면서?"
"싸인했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요."
한심하기는! 필리핀에도 이런 무책임한 놈이 있나?

나는 뒷북 친 게 억울했지만 그냥
"가!"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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