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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한윤수의 '오랑캐꽃']<59>

태국 여성 아핀야는 한국말을 이상하게 배워서 무지하게 신경을 써야 알아들을까 말까다. 예를 들어서 한국 사람 같으면
"아버지가 저녁에 퇴근해서 방에 들어가신다."
라고 말할 것을, 그녀는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 저녁 퇴근 괜찮아?"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왜 <괜찮아?>를 넣느냐 하면 자기가 한 말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단어 배열이 엉망인데다 말하는 속도까지 빨라서, 아핀야가 급하게 말하면 나같이 숙달된 조교가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말이 엉망인 사람이 굉장히 소극적인데 더 문제가 있다. 좋게 말하면 소극적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겁쟁이라 결정적인 순간에 꽁무니를 뺀다.

아핀야가 다니던 회사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퇴직금을 주지 않는 문제 회사였다. 그 당시는 노동자의 월급에서 매달 얼마씩 공제하여 퇴직금을 적립하는 방식을 썼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은 제 돈 내고 제 돈 찾아가는 꼴이었다.

재작년 가을 아핀야를 포함, 퇴직 노동자 3명이 찾아와서 진정서를 써주었다. 그러나 막상 노동부에 출두하는 날에 아핀야는 빠지고 오지 않았다. 나는 바쁘니까 그럴 수 있지, 나머지 두 사람이 있으니까 하나쯤 빠져도 괜찮겠지 하고 문제 삼지 않았다.

어쨌든 회사에서 돈을 안 주고 시간을 질질 끌어 사건은 노동부에서 법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사장의 재산을 가압류해야 할 단계에도 아핀야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오지 않으면 가압류를 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나는 몸이 달아서 전화했다.

"아핀야, 내일 안 오면 <안 괜찮아!> 돈 못 받아! 꼭 와야 돼. 알았지?"
"네."

그녀는 떡 먹듯이 대답했지만 다음날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에 울먹이는 목소리로 괴상한 전화를 해왔다.
"나 일 못하면 목사님 당장 겁나 괜찮아? 내일 한국 일하고 싶어. 태국 싫어 가기 괜찮아?"

해석해 보니 이런 뜻이었다.
"목사님, 나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요. 지금 당장 태국 가기 싫어요. 나 내일부터 일 못하면 어떡해요?"
아마도 누군가 겁을 주었으리라. "너 한국에서 일 다 하고 싶냐? 까불면 당장 태국으로 보내버린다!"고.

기가 막혔지만 내 말주변으론 그녀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결국 가압류를 포기했다. 덕분에 난 유효한 수단 하나를 잃었고, 그저 세월아 네월아 하며 재판이 진행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11개월이 흘렀을 때 회사에서 백기를 들었고 노동자의 통장으로 체불금을 입금시켰다. 태국에 간 노동자들은 고맙다는 전화를 해왔다. 그러나 아핀야는 달다 쓰다 말이 없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흐른 지난 일요일. 상담을 하다가 얼핏 아핀야의 모습이 비친 것 같아 고개를 들어보니 온풍기 옆 오목한 곳에 아핀야가 수줍은 듯 앉아 있었다. 얄밉다기보다는 반가운 마음이 더해서,
"아핀야, 이리 와요."
무려 1년 4개월 만에 보는 그녀. 어색한 미소를 띄고 내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더니 또 괴상한 소리를 했다.

"태국 부아크아 돈 많이 받아 한국 나 쪼금 왜 같이 퇴직 괜찮아?"
해석해보니, 지금 태국에 가있는 부아크아나 나나 비슷한 날짜에 퇴직했는데 왜 태국에 있는 부아크아는 많이 받고 한국에 있는 나는 쪼금 받았느냐는 뜻이었다. 그 말이 그럴듯하여 회사에서 보낸 체불금품 지급내역서를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

기가 막혔다.
부아크아는 *2007년 8월 30일 이후에 퇴직하여서 산업연수생 시절도 포함한 퇴직금을 받은 것이고,
아핀야는 2007년 8월 29일에 퇴직하여서 산업연수생 시절의 퇴직금이 없을 뿐 아니라 정식 노동자 시절도 1년이 되지 않아 퇴직금을 전혀 받지 못하고, 그저 월급에서 공제한 퇴직보험료만 돌려 받은 것이었다.

단 하루 차이로 희비가 갈린 셈이다.
쓸쓸히 돌아서는 그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게. 하루만 더 싸우다 나오지!"

*2007년 8월 30일 : 산업연수생에게도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날. 따라서 이날 이후에 퇴직한 노동자는 산업연수생 시절을 포함한 퇴직금 전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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