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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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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상륙작전

[한윤수의 '오랑캐꽃']<44>

D-5

레이는 의심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의 재입국이 취소된 것도 바로 의심 때문이었다.
그는 필리핀에 갔다가 한 달 후 재입국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장님이 회사 형편이 어려우니, *퇴직금은 필리핀 갔다 오면 주겠다고 하자 의심이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더구나 사장님이
"*삼성화재 퇴직보험금은 신청해줄게. 아마 공항에서 비행기 탈 때쯤이면 통장에 돈이 들어와 있을 걸."
하자 피어오르던 연기에 불이 붙었다.
"만일 사장님이 보험금 신청한다고 해놓고, 실제론 신청 안 해주면 어떡하지? 비행기 떠나면 그만 아냐? 그리고 만일 필리핀 갔다가 못 오는 날에는!"
그래서 다른 사람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기발하면서도 야박한 제안을 한 것이다.
"사장님, 나 삼성화재 퇴직보험금 안 받을 테니까요, 대신에 퇴직금 다 줘요. 현금으로!"
사장님은 기가 막혔다. 아니, 이건 나를 의심하다 못해 숫제 도둑놈 취급하는 거잖아.
사장님은 화가 나서 "그래, 너도 한 번 당해봐라!"하는 심정으로 레이의 재입국 수속을 취소해 버리고 현금으로 달라고 하던 퇴직금의 일부를 지급했다.

*퇴직금은 갔다 오면 주겠다 : 사장님이 이런 제안을 하면 정상적인 노동자라면 별 이의 없이 받아들인다. 재입국하고 나서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으니까. 더구나 퇴직금의 70프로 이상은 이미 삼성화재 보험금으로 확보되어 있으므로 사장님이 따로 부담할 퇴직금은 얼마 되지 않는다.

*삼성화재 퇴직보험금 : 퇴직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사장님이 매달 불입해놓은 보험금. 출국하기 전에 노동자의 통장으로 입금된다. 출국할 때 받는다고 해서 일명 출국만기보험금이라고도 한다.


D-4

물론 레이는 자신의 재입국이 취소된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의심은 잘하는 사람이라 새벽 내내 몸을 뒤척이며 의심하다가 아침에 센터로 찾아왔다.
우리는 회사에 확인 전화를 걸었다.
"레이가 재입국하나요?"
사장님이 대답했다.
"아뇨. 재입국 취소했습니다."
"왜요?"
"사장도 못 믿는 애를 뭐 하러 재입국시켜요!"
하긴 사장님의 말이 맞긴 맞다. 그러나 우리 직원은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서 사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숙련공인데 한 번 봐주시죠."
숙련공이라는 말에 사장님의 생각이 자못 달라진 것 같았다. 아쉬움을 적지 않게 드러냈으니까.
"그래요. 한 번 고려해 보죠. 숙련공이니까."

D-3

출국 예정일. 재입국하려면 최소한 고용지원센터에서 발행하는 재입국확인서를 갖고 출국해야 하는데, 그날 아침이 되어도 사장님은 확인서를 주지 않았다.
"필리핀 가면 부쳐줄 게."
의심이 더럭 난 레이는 인천 공항으로 가지 않고 센터로 찾아왔다. 이번의 의심은 레이가 한 수많은 의심 중 모처럼 잘한 의심이었다. 고용지원센터에 확인한 결과, 재입국 수속을 밟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으니까.
회사에 다시 전화했다.
"재입국 수속을 안 해주셨네요."
사장님이 외출 중이라 사모님이 대신 답변했다.
"걔가 뭐 이뻐서 재입국시켜줘요? 걸핏하면 아무나 의심해서 필리핀 애들한테도 왕따 당하는 애를! 걔네들도 같이 밥을 안 먹는다니까요."
"그럼 퇴직금 나머지 70만원 주셔야죠."
"그 센터 참 끈질기네요. 거기도 외국인 땜에 먹고 사는 데잖아요!"
그녀는 우리 센터를 외국인에게 수수료를 받고 일하는 영리단체로 알거나,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자신의 잇속을 채우려고 외국인을 내세워 선량한 기업을 괴롭히는 브로커 정도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우리 직원도 발끈했다.
"저희는 비영리단체입니다. 외국인 무료로 도와주는 곳입니다."
"그럼 거기는 뭐 먹고 장사해요?"
"목사님 친구분들이 일부 도와주시구요, 나머지 부족분은 목사님 사재 털어서 씁니다. 됐습니까?"
"....... "
그녀는 무색한 듯 잠시 침묵했다가, 빠르게 내뱉듯이 말했다. "어쨌든 우리 회사는 줄 거 다 줬으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D-2

오전 이른 시간인데. 사장님한테서 사과전화가 왔다.
"어제 집사람이 막말한 거 대신 사과드립니다. 잊어버리세요. 그 사람은 이런 데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미숙해서 그런 거니까요."
"좋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럼 고맙구요. 솔직히 저희도 제안 하나 할게요. 이젠 우리도 레이를 믿을 수가 없어서 하는 얘긴데요. *재입국시켜주면 퇴직금 나머지 70만원 포기하든지, 70만원 받으려면 재입국을 포기하든지, 거기서 양자택일 해주세요."
"사장님. 돈 안 주시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요. 돈도 주시고 재입국도 시켜주시면 안될까요?"
"안됩니다."
"숙련공을 다시 쓰면 좋잖아요?"
그는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걔는 갔다 와도 우리 회사에 남는다는 보장이 없어요. 틀림없이 딴 데 갈 겁니다."
사장님은 레이를 극도로 불신하고 있었다
"그럼 돈 남은 거 70만원 주시겠습니까?"
"주지요. 이틀만 기다리세요."
레이는 더 이상 기숙사에 머물 염치가 없어서 그날 저녁 짐을 빼가지고 회사를 나왔다. 그러나 회사를 나오면서도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건가 하는 회의가 새삼 들었다. 70만원 받고 필리핀 가면 이제 끝이 아닌가. 다시 오면 3년을 더 벌 수 있는데!

*재입국시켜 주는데 왜 퇴직금의 일부를 포기하라고 할까? : 무조건 억지 주장만은 아니다. 재입국 수속을 해주는데도 약간의 돈이 드니까(대행기관에 맡길 경우 10만 4천원). 더구나 앞으로 근무할 가능성이 없는 노동자에게는 회사 돈을 들여가며 수속을 밟아줄 리 없지 않은가.

D-1

그의 마음이 새벽녘에 급속도로 바뀌었다. 70만원 안 받고 한국에 다시 오는 쪽으로! 하지만 사장님이 자신의 바뀐 생각을 받아줄는지 걱정이 되어 새벽잠을 설쳤다.
아침이 되자 레이는 센터로 또 찾아왔다. 이번에는 70만원 포기하고 재입국하고 싶다고. 기가 막혔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그의 얼굴을 모두가 외면했다. 하지만 어쩌랴?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데 도와주어야지!
레이 덕분에 센터의 공신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졌지만 그를 위해서 다시 회사에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사장님은 픽 웃었다.
"기숙사 나간 게 엊저녁인데 그새 또 바뀌었어요?"
사장님은 즉시 재입국수속을 해주었다.

D-day

오전 08시. 레이는 마닐라 행 비행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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