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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의 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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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의 고안

[한윤수의 '오랑캐꽃'] <41>

비행기표 살 돈이 없어 고국으로 떠나지 못하는 캄보디아 여성이 있었다. 이름은 첸.
그녀는 퇴직금과 임금을 주지 않는 회사와 소송 중이었다. 나는 소송에서 이기면 받기로 하고 비행기표 값 50만원을 빌려주었다. 그녀는 돈 한 푼 없이 그렇게 떠났다. 쓸쓸하게!
그후 7개월 동안 제일 괴로웠던 일은 한 달에 몇 번씩,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첸의 전화를 받는 일이었다.

"나, 첸. 돈 못 받아?"
"지금 재판해. 기다려! 기다려!"

점심을 먹다가도 첸의 전화가 걸려오면 목이 메었고, 운전 중에 받으면 핸들이 떨렸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어서, 마침내 7개월 후 회사가 손을 들었고 260만원을 첸의 국내 통장으로 송금했다는 입금표를 보내왔다.

나는 직원에게 첸의 통장과 현금카드를 주고 우리은행 <발안지점>으로 가서 돈을 찾아가지고 캄보디아로 송금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직원은 얼굴이 하얘져서 돌아왔다.
"돈을 찾을 수 없어요. 회사에서 첸의 옛날 통장으로 돈을 넣었더라구요. 그건 분실된 통장인데. <부천 내동지점> 통장이라나?"

나는 즉시 우리은행 발안지점장을 만나 선처를 부탁했다. 그러나 지점장은 고개를 저었다.
"부천으로 가보세요."
하지만 섣불리 부천으로 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다른 은행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물어봐도 답이 안 나왔으니까.

"첸이 목사님에게 모든 것을 위임한다는 서류를 꾸며가지고 프놈펜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제출하고 그걸 한국 대사관 직원이 공증해서 보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부천 내동지점에 전화를 했더니 담당인 K과장 역시 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다.
"위임장을 써가지고 프놈펜 한국 대사관으로 가보라고 하세요."

나는 답답해서 말했다.
"첸은 간단한 한국말도 못 알아듣는 사람인데, 설명이 불가능해요. 이건 돈을 찾지 말라는 거나 마찬가지라니까."
K과장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을 것인지, K과장과 나 사이에는 2 주 동안 수많은 전화가 오고 갔다.

K과장과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첫째 첸이 남기고 간 흔적은 모조리 은행에 제출할 것. 둘째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와 한윤수 목사가 신뢰할 만하다는 증거를 최대한 내놓을 것. 셋째 한 목사가 지점장을 직접 만나 간절히 호소할 것.

2주 동안 첸의 발안지점 통장, 현금카드, 위임장, 인감도장, 인감증명서, 첸의 캄보디아 계좌, 노동부에 낸 진정서, 체불금품확인원. 체불금품내역서, 법원에 제출한 솟장, 재판기록, 회사가 보낸 입금표, 화성센터의 사업자등록증, 비영리단체등록증, 모든 출판물 그리고 센터에 관한 신문기사 등을 차곡차곡 준비했다. 2주 후 나는 아주 두툼한 서류 봉투를 들고 부천 내동지점을 방문했다.

점심시간인데도 C지점장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한국대사관에서 공증한 서류가 아니면 안됩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 사람은 한국말이 안 통하니까. 제발 저를 믿고 지급해주세요. 각서를 쓰겠습니다."
"글쎄요. 정부에서 지원하는 비영리단체이고. 목사님을 믿긴 믿지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260만원 제가 물겠습니다."

둘 다 점심도 거른 채, 땀 흘리며 호소하기를 한 시간 여. 마침내 지점장의 마음이 움직였다.
"좋습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목사님은 돈에서 손을 떼세요. 우리가 직접 첸의 캄보디아 계좌로 송금해드리지요. 대신에 우리 지점을 위해서 기도나 많이 해주세요."
"좋습니다."
이제 사무적인 절차만 남아 있었다.
나는 비로소 안도하고 은행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서의 얘기다. 내가 가져온 서류들을 하나하나 검토해나가던 K과장이 갑자기 탄성을 질렀다.
"아니, 이 현금카드 살아있는데요!"
"에? 뭐라구요?"
마침 점심식사를 마치고 은행으로 돌아온 지점장도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첸은 이미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예상하고 <부천 내동지점의 통장>과 <발안지점의 통장> 어느 통장에서나 똑같이 사용할 수 있는 만능 현금카드를 만들어놓고 떠난 것이었다.
첸은 비록 간단한 한국말도 못했지만 그의 고안은 기막혔다.

아! 현금지급기에 카드만 한 번 넣어봤어도, 이런 생쇼는 안했을 텐데.
분실된 통장이라 돈을 못 찾는다는 은행원 말만 믿은 내가 잘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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