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장안의 요지를 차지한 명동 성당처럼, 발안 성당은 발안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요지를 차지하고 있으며 면적이 5천 평이나 된다. 필리핀 사람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자이므로 이 발안 성당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미사도 드리고 모임도 갖고 농구 게임도 하고.
발안 성당이라는 든든한 후광을 입어서 그런지 화성지역의 필리핀인들은 타 민족에 비해 자신감에 차 있고 얼굴에 광채가 난다.
필리핀 사람들의 자부심을 더 부채질하는 것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영어다. 영어가 한국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 말인가? 한국은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고 거기에 몰입하는 나라가 아닌가! 서양 귤을 오렌지라고 하느냐 아륀지라고 하느냐를 가지고 난리를 피운 나라인데! 한국인들이 영어에 주눅 들수록, 영어 잘하는 필리피노의 자존심은 하늘을 찌른다.
필리핀 사람들의 또 하나의 강점은 캐나다로 취업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노동력이 부족한 캐나다에서는 영어 사용이 가능한 필리핀 사람을 선호한다. 그들은 필리핀으로 돌아갔다가 캐나다로 다시 출국하기도 하지만 3 ,4천불의 수수료만 내면 한국에서 캐나다로 직행할 수도 있다. 그만큼 선택의 여지가 많기에 필리핀 노동자들의 콧대가 높다.
일요일날 상담을 받으러 올 때도 태국인이나 베트남인들은 오전에 많이 오고 오후에 오더라도 3시 반 이전에 일찍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오후 4시 이후에 온다. 그래서 오후 4시부터 퇴근하기 직전인 5시 반 사이를 우리 센터에서는 <필리핀 타임>이라고 부른다.
필리핀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늦게 오냐고 물으면 그들은 태연히 대답한다.
"3시 미사 끝나고 오면 이 시간 맞아요."
미사 끝나고 오면 그 시간이 맞다. 그러나 꼭 미사 끝나고 와야 속이 시원한가? 더구나 미사 끝나고서도 한 시간 넘게 제 볼 일 다 보고 나서, 오후 5시 반 퇴근하기 직전에 어슬렁거리고 들어와 상담해달라고 부탁하면 우리는 미친다. 그들 때문에 저녁 늦게 퇴근해야 하니까.
영어를 잘해서 필리핀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상담실장이 늦게 해찰부리며 오는 그들을 붙잡고 몇 번 야단쳤다.
"꼭 미사 끝나고 와야 돼? 미사 전에 오면 어디 덧나?"
다른 직원들도 한마디씩 했다.
"머리 맑을 때 와야 상담이 잘 되지. 일찍 와요!"
그러자 필리핀인들이 조금 일찍 오기 시작했다. 오후 1시부터 3시 반 사이에. 그러나 어쩌랴? 이때가 가장 바쁜 때인 걸. 태국, 베트남, 스리랑카, 캄보디아 등이 뒤엉켜 앉을 자리도 없이 북적이는 시간대에 필리핀까지 가세했으니 센터는 전쟁터와 다름없어졌다.
그래서 나는 지금 깊이 후회하고 있다. 오히려 옛날이 나은 것 같다.
이제 다시 필리핀 타임의 부활을 고려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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