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껏 한번도 퇴직금을 준 적이 없는 회사는 앞으로도 영원히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고 머리를 썼다.
"자, 여기다 싸인해."
회사에서 내민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상기 본인은 산업연수생으로 있을 동안은 숙박 및 식사를 제공받았으나 이제 정식 노동자가 되었으므로 외부에서 식사 및 숙박을 하여야 하나 여러 가지 개인사정으로 회사 내에서 숙식을 제공해줄 것을 제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2년 동안의 숙식비를 퇴직금으로 갈음해도 무방합니다."
한 마디로 노동자의 월급에서 얼마씩 떼어서 그것으로 퇴직금을 주겠다는 파렴치한 발상이다.
어쨌든 외국인 노동자들은 싸인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주눅이 들어 있기 때문에 높은 사람이 싸인하라면 싸인한다!
그러나 싸인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가 랭유린이다. 그는 한국말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는 캄보디아 여성으로 내가 본 외국인 가운데 가장 똑똑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녀는 싸인하지 않고 버텼기 때문에 미운 털이 박혀서 회사측으로부터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했다. 예를 들면 모든 노동자에게 잔업을 주는데 랭유린에게만은 주지 않는 식으로. 그래서 그의 수입은 다른 노동자에 비해 적었다.
16개월 전까지 소급해 올라간 그 엉터리 계약서 때문에 랭유린과 또 한 사람은 식대 160만원씩을 공제당했다. 한 달에 40만원씩 넉달 동안 연속으로! 90만원 월급이 50만원으로 줄자 그들은 넉 달 동안 고향에 돈을 부칠 수 없었다.
외국인 노동자 한 명 당 고향에 딸린 식구를 보통 20명으로 잡는데 결과적으로 그 20명이 4개월 동안 굶다시피 하는 비참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집집마다에서!
나는 회사를 이미 퇴직한 5명의 노동자로부터 의뢰를 받아 노동부에 진정서를 냈다. 그후 랭유린을 포함하여 3명이 더 퇴직했다. 노동부에서의 공방은 총명한 랭유린의 가세로 노동자 편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근로감독관이 식대를 진짜 식대로 보지 않고 임금으로 인정해준 것이다. 만일 식대를 받은 게 아니라 임금을 착취했다면 회사는 형사 처벌을 당할 것이다. 형사와 민사는 큰 차이가 나는 만큼 이건 노동자의 승리였다. 그러나 회사는 세월을 믿고 있었다.
"걔들 얼마 못 버텨. 1년만 질질 끌면 다 떨어져 나가."
완전히 이런 배짱이었다.
노동자들은 울면서 귀국했다. 그러나 랭유린은 안산에 있는 쉼터에 남아 있었다. 8명의 노동자 대표로서.
근로감독관이 형사소송을 진행시키는 동안 나는 민사소송을 진행시켰다. 소송은 지지부진해서 금세 3개월이 흘러갔다. 그러자 랭유린의 체류기간 연장에도 한계가 왔다. 출입국에서 더 이상 연장이 곤란하다는 통보를 해온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일 소송이 1년이 아니라 2년 또는 3년을 끈다면 어쩔 건가? 오히려 타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어느 봄날 나는 랭유린에게 귀국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예. 가겠어요."
그러나 랭유린이 양해해야 할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만일 회사와 타협이 이루어져도 퇴직금과 식대 전액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이미 회사에서는 퇴직금은 다 주어도 식대 부분은 20%만 주겠다는 제의를 해왔었다. 나는 식대 80%가 아니면 안된다고 거절했지만 얼마간 깎이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20과 80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면 어쩌면 50이 될지도 몰랐다. 그럴 경우 랭유린에게 어떤 대우를 해줘야 하나? 랭유린은 불이익을 감수하고 누구보다도 희생하며 투사처럼 싸웠는데. 그렇기 때문에 랭유린은 좀 더 주고 나머지는 좀 덜 줘? 물론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내 마음대로는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말했다.
"예를 들어 식대를 50%만 받는다면 랭유린도 다른 사람하고 똑같이 50%만 받을 수 있어요?"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엉터리 계약서에 싸인한 사람들하고 제가 어떻게 똑같이 받아야 되요? 싸인 안하는 바람에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그리고 제가 싸인을 하지 않아서 모두 돈을 받는 거잖아요 "
맞는 말이었다. 그가 싸인하지 않았기에 엉터리 계약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니까. 그러나 나는 사무적으로 설명했다. 물론 나도 랭유린을 특별히 대우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우선 다른 노동자들이 납득하지 않을 거고 회사 측에서도 응할 리 없다.
내가 듣기에도 내 말이 참 공허하구나 하고 느끼고 있을 무렵 랭유린의 눈자위가 빨개지더니 그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민망해서 창밖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결심한 듯 나직이 말했다.
"목사님 하라는 대로 할 게요."
그녀는 4월에 떠났다.
그 후 나는 회사 간부들의 재산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가압류해 나갔다. 그 때문에 회사 내부 분위기도 점점 안 좋아져서 그들도 어떡하든 싸움을 조기에 끝맺기를 원한다는 정보를 나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결국 랭유린이 떠난 지 6개월 만에 회사측에서 백기를 들고 찾아왔다. 회사 대표가 형사처벌 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들이 최종 제의한 퇴직금 100%에 식대 70%를 나는 받아들였다. 물론 소송비용은 회사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나는 8명의 노동자 모두에게 똑같은 비율로 송금했다.
랭유린이 받은 돈은 277 만원이었다.
*후기 : 랭유린 사건은 장장 12개월을 끈 최대의 사건으로 등장인물만 수십명이다. 글의 빠른 전개를 위해서 나 혼자 싸운 것처럼 묘사했지만, 실은 수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노동부 수원지청의 P감독관, 법률구조공단 수원지부의 전승렬 선생, 이창우, 김경철, 이상훈 법무관, 주재남, 황선기 변호사, 법무법인 덕수의 이석태 변호사, 법무법인 두우의 윤종현 변호사, 법무법인 시민의 이영직 변호사, 법무법인 다산의 서상범 변호사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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