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지 3주밖에 안되었다는데 회사가 도산해서 일자리가 없단다.
펑이 말했다.
"이 사람 말이, 한국 사정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대요. 만일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거래요."
그 말에는 원망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내가 한국은 아니지만, 한국을 대신해서 사과했다.
"미안해요. 우리도 이렇게 어려워질 줄은 몰랐어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내가 다시 물었다.
"잘 데는 있어요?"
"지금 당장은 제 기숙사에 데리고 있는데 눈치가 보이면 그때 부탁할 게요."
그래도 그 후배는 다행이었다. 암탉같이 품어주는 고향 선배를 만나서. 둘은 베트남 중부 호이안 출신이었다.
수요일. 어느 회사의 인사 담당자가 옷가방을 든 네팔 사람 둘을 데려왔다.
한국에 온 지 2주 되었다는데 회사가 너무 어려워 해고했단다.
한심했다. 오죽하면 이런 햇병아리를 해고했을까.
인사 담당자가 말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잘 데 좀 부탁해요."
하지만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잘 데가 문제가 아니라, 일자리를 잡아주셔야지요! 평택고용지원센터에 가서 알선장이나 받아오세요."
"제가 좀 바쁜데."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어디가 어딘지도 분간 못하는 천둥벌거숭이를 이렇게 떠넘기고 갈 거에요."
그는 할 수 없이 두 네팔인을 데리고 평택에 가서 알선장을 받아왔다. 하지만 알선장에 나온 회사에 일일이 전화해 보았지만 네팔 사람을 쓰는 데는 없었다.
그들에게 길잡이가 필요할 것 같아서 한국말을 잘하는 네팔 사람 비노드와 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우선 쉼터로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화성에는 쉼터가 없으므로 안산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의 K 목사에게 잘 데를 부탁했다. 그곳 쉼터가 크므로. K목사는 말했다.
"아시잖아요. 상황이 안 좋아져서 방이 차기 직전이에요. 빨리 보내세요."
나는 네팔인들에게 전철노선도 두 장을 쥐어주고 우선 33번 버스를 타고 수원역에 가서 1호선 전철을 타고 금정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탄 다음, 안산 중앙역에서 내려서 15분 거리에 있는 안산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로 가서 K목사를 찾으라고 누누이 일렀다. 그러나 그들을 막상 떠나보내려고 하니 그들이 안산까지 가기 위하여 취해야 할 최초 행동 즉, 33번 버스를 발안 어디에서 타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나는 직원을 시켜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고 오라고 했다.
33번 버스가 왔다. 네팔인들이 올라탔다. 그러나 뒤돌아보고는 우리 직원이 따라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자 우당탕퉁탕 급하게 다시 내렸다. 얼마나 겁이 났으면 그랬을까? 직원은 손짓발짓으로 안산까지 따라갈 수 없으니 이제부턴 당신들 힘으로 가라고 타일렀다.
그들을 보내놓고 나니 심란했다. 히말라야에서는 저들이 우리를 안내하는데, 우리는 저들을 허허벌판에 방치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드디어 비노드와 통화가 되었다.
"비노드, 왜 그렇게 통화가 안되요?"
"일할 때는 당연히 안되지요."
"네팔 사람 둘이 전화할 거에요. 안내 좀 부탁해요."
"예. 알았어요."
▲ ⓒ프레시안 |
그 순간부터 난 네팔인에 관한 모든 것을 잊기로 했다.
걱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두 사람이 잊어지지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새벽 4시에 일어나 그들에 관한 보고서를 쓰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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