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앞창이 벌어져 발가락이 튀어나온, 행색이 추레한 아프리카 사람이 찾아왔다. 나이지리아 인 폴이다. 몸이 아픈데 서울에서 아무도 치료해 주지 않아 발안까지 내려왔다는 것이다. 발안은 별 수 있나? 한심했지만 보건소 외국인 담당자 C선생에게 전화했다.
"그리 보낼 테니 한번 봐주세요."
조금 있다 C선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림프종이예요. 이건 수원의료원에서도 못 고치는데."
수원의료원에서도 못 고친다면 방법은 하나, 서울의료원에 부탁하는 수밖에. 너무 늦은 시간이라 폴은 서울로 올라가고, 다음날 나는 우리센터의 후원회장이신 홍성우 변호사님을 모시고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서울의료원을 찾아갔다. 첫 만남이지만 원장 U박사는 시원시원했다.
"아프리카 사람이 돈이 없다구요? 도와드려야지요."
원장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약속시간으로부터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기 와있어요. 원무과 앞에."
너무나 반가워서 원무과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까만 사람은커녕 가만 사람도 없다. 나는 폴에게 전화해서 옆에 있는 한국 사람 아무나 바꿔달라고 했다. 한국 사람은 뜻밖의 소리를 했다.
"목사님이시죠? 거기 어디에요? 여기는 원무과 앞인데."
"맞아요. 나도 원무과 앞인데."
"국립의료원 맞아요? 을지로 6가에 있는."
"아니, 여긴 서울의료원이에요.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나는 폴을 바꿔 달래서 왜 국립의료원으로 갔냐고 물었더니 폴의 대답이 기막히다.
"여기가 더 잘 고칠 것 같아서요."
한심했지만 자세히 설명했다. 아무리 잘 고쳐도 네 맘대로 병원을 고르면 안된다. 거긴 도와준다는 약속이 안 되어있으니까.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내일 서울의료원 원무과로 다시 와라. 나는 바빠서 다시 못 오지만 원무과장에게 잘 얘기해 놓았으니 치료비는 걱정 말고. 나는 단단히 일러놓고 발안으로 내려왔다. 다음날 오후 늦은 시간에 폴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사님 나 지금 가리봉에 있는 외국인노동자 전용의원으로 가고 있어요."
"엥? 거기서는 못 고치는데. 왜 서울의료원에서는 안된대요?"
"치료비 다 내야 된대요."
서울의료원 원무과에 알아보니 폴이 과거에 어떤 회사에 다닌 적이 있고, 그때 의료보험을 만들었는데 그 회사는 진작에 망했지만 의료보험은 아직 살아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40일간은 효력이 남아있어서 그 동안은 무료치료가 안된다는 것이다. 의료보험도 없는 아주 불쌍한 외국인만 무료치료가 된다는 뜻이겠지! 사실 폴이야말로 그야말로 불쌍한데.
그런데 며칠 후 이번에는 서울의료원 원무과에서 전화가 왔다.
"폴이 여기 다시 입원했어요."
신출귀몰하는구먼. 원무과 직원은 계속 말했다.
"폴의 통장에 30만원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입원시켰죠. 그런데 치료비가 턱없이 모자라요. 퇴원할 때 목사님이 나머지 돈 내주시면 계속 치료할 수 있구요."
"알았어요. 어떻게든 낼 테니 계속 치료해주세요."
폴은 11일간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나는 그가 퇴원한 줄도 몰랐으니 그는 나 모르는 새에 또 홀연히 사라졌다.
원무과에서는 총 치료비가 71만원이 나왔다며 30만원은 폴이 냈지만 나머지 41만원은 나보고 내라고 했다. 그 돈 때문에 며칠 동안 전화에 시달렸다.
"목사님이 준다고 했잖아요!"
"그러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원장님의 인격이 아무리 고매하다 하더라도 원무과 직원의 닦달은 계속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이해는 되었다. 원장님과 직원의 입장이 다르고 또한 자립도가 낮은 병원이기 때문에. 결국 일주일 만에 화성보건소의 지원으로 41만원을 갚았다.
제멋대로 폴! 잘 지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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