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아르헨티나 정부가 추진했던 국제가격 변동에 따른 곡물 수출세 연동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정부로써는 물가안정과 세수증대라는 일석이조의 성과를 노렸지만 체면만 깎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지난 3월 11일 수준인 35%의 수출세 징수에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수출세 대폭인상 노력에는 실패했지만 예년수준의 수출세를 그대로 징수할 수 있어 국제시장의 곡물가 인상폭을 감안한다면 크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 각국들이 농산물 수출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아르헨티나만 모든 농산물에 수출세를 거둬들이고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기자는 이번 아르헨티나 농민파동을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면서 핫이슈로 등장한 곡물 수출세에 얽힌 역사적인 연원을 추적해 봤다.
'아르헨티나 곡물 수출세의 역사'
광활한 목초지와 기름진 라 빰빠스 평원을 가진 아르헨티나는 지난 1900년대 초부터 '세계의 곡창'으로 불리며 신흥 강대국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밀과 옥수수, 쇠고기 등을 팔아 부를 축적하며 세계 최고의 도시 건설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곡물과 쇠고기 등이 당시로써는 최고의 수출품으로 평가받기 시작하자 영국과 미국 자본들이 아르헨티나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곡물의 유통과 교역을 이들 자본들이 장악하게 된다.
1907년부터 시작된 이들 외국자본들은 아르헨티나 현지에 대규모 냉동창고와 기계화된 도살장, 곡물 저장창고 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항만시설과 도로, 철도 등의 인프라도 대폭적으로 개선했음은 물론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들 자본들의 공격적인 투자를 크게 환영하는 상황이었고 정책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유럽시장에서 곡물과 쇠고기 등 식량이 금값으로 돌변하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곡물과 쇠고기 등이 유럽 시장으로 싹쓸이 식으로 팔려 나가버려 국내공급이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국내소비 시장을 무시한 지나친 수출붐이 곡물의 품귀사태는 물론 가격폭동 현상까지 불러왔다. 상황이 이렇게 돌변하자 아르헨티나 정부는 웃돈을 주고 이웃 나라에서 곡물을 역수입해야 하는 웃지 못 할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의 이런 상황과는 무관하게 아르헨티나 곡물유통과 수출입을 장악한 외국기업들은 천문학적인 수익을 챙겨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누가 챙긴다'는 속담처럼 농민들은 고생을 해서 농사를 지어도 그 수익 은 유통업자들과 수출업자들이 다 챙겨가는 현상이 심화된 것이다.
농민들의 원성이 높아가자 아르헨티나 정치인들은 곡물의 수출 제일주의 정책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특히 아르헨티나 사회주의당의 당수이자 상원의원이었던 후안 베 후스또 (Juan B. Justo.1865~1928) 의원 주도로 곡물의 수출세 제도와 소 도살장, 쇠고기 거래의 국유화가 추진되었다.
그때가 1923년의 일이었다. 당시 이들은 곡물거래의 국유화도 함께 추진을 했지만 워낙 대규모인 농장규모와 분업화된 생산구조, 복잡한 유통시스템 때문에 곡물산업의 국유화는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후안 베 후스또 의원은 아르헨티나산 모든 곡물에 15%의 수출세 징수법안을 통과시켜 농민지원금으로 삼아야 한다는 법을 정착시켰다. 또한 그는 모든 곡물의 적정량을 국내 수요를 위해 항상 비축해야 된다는 것과 국제가격에 상관없이 안정적인 가격을 유지해야 한다는 법령도 입법화에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곡물 수출세 제도는 정권과 국제시세에 따라 그 세율이 10%대 에서 40%대 이상까지 오르내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 아르헨티나 농민파동도 따지고 보면 대규모 농장주들과 다국적기업들에게 추가수익만큼의 세금을 물리려다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한 경우다. 결국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번 파동을 통해 국민들의 뜻을 공권력을 통해 억누를 수 없다는 값진 교훈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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