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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만 바라보다 '낙동강 오리알' 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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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만 바라보다 '낙동강 오리알' 될라

MB정부, 북핵위기史에서 배워라 <4·끝> 무엇을 택할텐가

북한학 박사이자 <SBS>에서 한반도 문제를 취재하고 있는 안정식 기자가 북핵 문제에 있어 한국의 역할을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안 기자는 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던 김영삼 정부 때부터 북한의 핵실험과 2.13 합의가 있던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북핵문제에 있어 한국은 '중재자'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 마지막 편이다. <편집자>


(☞ 북핵위기史 <1> "YS의 '변덕'도 어쨌든 미국에 통하더라")
(☞ 북핵위기史 <2> DJ가 사흘간 두문불출한 까닭은?)
(☞ 북핵위기史 <3> "한국은 뭘 했냐고 질문할 기자분 있나요?")

93년 북한의 NPT 탈퇴 선언으로 제1차 북핵 위기가 촉발된 이후 지금까지 한국은 북핵문제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해 온 것인가? 지난 15년간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한국은 크게 다음과 같은 역할들을 수행해왔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북미간의 관계를 중재해 북핵 협상을 진전시키거나 북미관계 개선을 이끈 역할이다. 노무현 정부 당시 9.19 공동성명을 도출해 내는 과정이나,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국이 북미관계 개선을 이끌었던 과정 등이 이러한 사례라고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경우는 북미간의 중재자로서 한국이 상황을 주도했다는 측면에서 한국의 적극적 역할이 부각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김대중 정부 시기 한국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조성된 남북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북미관계의 개선을 이끌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에게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권유한 데 이어, 미국 측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미국과 관계개선을 하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점을 전달했다. 북한과 미국은 한국의 적극적인 중재에 힘입어 움직이기 시작했고, 조명록 특사의 방미와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에 이어 클린턴 미 대통령의 방북이 논의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클린턴의 방북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이 시기 북미간의 데탕트는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다져진 남북 간 신뢰 분위기와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다져진 한미 간의 신뢰 분위기 속에 한국의 중재에 의해 힘입은 바 컸다.

노무현 정부 시기 9.19 공동성명을 도출해가는 과정 역시 한국의 적극적 역할이 부각됐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2004년 하반기부터 남북, 북미관계가 냉각되기 시작하고 2005년 2월 북한이 핵무기 보유와 6자회담 무기중단을 선언하자, 한국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다. 먼저, 남북관계에 주력한 한국은 수차례의 남북대화 시도 끝에 2005년 6월 17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위원장의 면담에서 남북관계 복원과 북한의 6자회담 복귀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미국을 북한과의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려는 한국의 노력은 처음에는 결과가 그리 신통치 않았으나 부시 미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이후 미국의 분위기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고, 6.17 면담 이후 정동영 장관의 방미 시에는 북한과 대화하라는 한국의 설득에 대해 '충분한 고려'를 하겠다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러한 과정 끝에 재개된 4차 6자회담에서도 한국의 적극적 역할은 두드러졌는데, 한국은 6자회담에서 때로는 북한을 때로는 미국을 압박하면서 북미간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북한 대표단과 미국 대표단의 만남은 의장국인 중국이 아니라 한국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졌고, 경수로 문제로 협상이 난항을 겪자 한국은 '북한이 경수로를 가질 기회의 창이 열려 있다'는 입장을 미국과 상의 없이 발표하는 등 협상의 고비에서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한국의 적극적 역할로 인해, 중국은 의장국으로서의 체면이 서지 않는 데 대해 불쾌감을 표시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한국이 이렇게 북미간의 중재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 것인가? 북미간의 중재 역할은 한미관계 뿐 아니라 남북관계가 잘 돌아가고 있을 때 가능하다. 남북관계가 유지돼야 북한을 실질적으로 설득할 수 있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북미간의 중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국이 북미관계 개선을 이끌었던 시기나, 노무현 정부 당시 9.19 공동성명이 이뤄지던 시기 모두 남북관계는 신뢰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2005년 6.17 면담이 남북 간 신뢰 형성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

한국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북미관계에서 적극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북핵문제와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라는 문제가 기본적으로 북미간의 구도로 진행되지만, 북미관계를 중재해 북미관계가 원활히 돌아가도록 하는 데 있어서는 한국이 중요하고도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동맹을 통해 미국과 강력한 연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이 북핵문제에서 한국이 적극적 역할을 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북핵문제에서 한국이 해 왔던 두 번째 역할은,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해 한국이 이견을 갖고 있을 때 한국이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미국의 대북정책 수행에 제약을 가했던 역할이다. 한국의 이런 역할은 탈냉전 들어 한미동맹 내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가능해진 역할인데, 이는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한 한국의 안보위협 감소와 민주화, 국력상승 등에 힘입은 바 컸다.

지난 15년 동안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경우를 살펴보면, 김영삼 정부 당시 미국의 대북협상이나 대북강경책에 한국이 반발했던 사례나, 노무현 정부 초기 미국의 대북 강경 분위기에 노 대통령이 강력히 반발했던 사례 등을 찾아볼 수 있다. 또, 2002년 초 '악의 축' 발언 등으로 위기가 고조되던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미 대통령을 설득해 위기를 누그러뜨렸던 사례도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 북핵문제 해결에 있어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누구의 뒤를 따라 갈 것인가? 아니면 그 누구보다 못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나온 전직 대통령들 ⓒ연합뉴스

김영삼 정부 시기 한국은 북미 1차 고위급 회담이나 미국이 '포괄적 접근방안'을 고려했을 때 등 북핵 협상의 고비마다 문제를 제기해 미국의 대북협상에 제동을 걸었다. 94년 들어 북핵문제가 위기 국면에 진입했을 때에도, 한국은 패트리어트 미사일 한국 배치 반대와 6월 위기 당시 한반도 전쟁 반대 등 미국의 대북 강경책에 반대의사를 표명해 미국의 대북정책 수행을 어렵게 했다. 제네바 합의 이후로도 북미관계 개선은 남북관계 악화로 인해 한계를 가지기도 했는데, 이는 미국의 대북정책이 한국의 지지를 얻지 않는 한 추진력에 있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들어 노 대통령이 미국의 대북 강경 분위기에 강력히 반발한 것 또한 이러한 사례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제2차 북핵 위기가 시작돼 위기가 고조국면에 있던 시기에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당시 미국에서는 북한에 대해 '맞춤형 봉쇄'를 추진한다든가 이라크와 북한 두 곳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는 등 대북 강경 분위기가 팽배한 상태였다. 노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서 유엔을 통한 대북제재에 반대한다거나 미국에 너무 앞서나가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다는 등 참모진의 우려를 불러일으킬 정도의 대미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노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미국의 정책기조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라는 부시 미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뒤 자취를 감추는데, 이 시기 노 대통령의 강력한 반발은 미국의 대북 강경론을 견제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2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이 미국의 대북 강경노선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한 것 또한 한국이 미국의 대북정책을 제어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미국에서는 9.11 테러 이후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칭하는 등 대북 강경 분위기가 고조돼 있는 상황이었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2월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미 대통령을 집중적으로 설득해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발언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이 날의 정상회담으로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 자체가 바뀌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선제공격 가능성까지 거론되며 위험스럽게 흘러가던 미국의 대북 강경노선이 한국의 설득에 의해 한 단계 완화된 것만은 틀림없었다.

2003년 하반기 북핵문제와 이라크 추가파병을 연계시키려는 노무현 정부의 시도도 한미 간의 불협화음을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대북강경 노선을 한 단계 톤다운 시키는 역할을 했다. 부시 미 대통령은 2003년 10월 20일 방콕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다자틀 내에서의 대북 안전보장 제공의사를 밝혔는데, 부시 대통령이 대북 안전보장 제공을 확인한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다. 한국은 이 정상회담이 열리기 이틀 전인 10월 18일 이라크 추가파병 방침을 발표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역할과 관련해 세 번째로 살펴볼 범주는 북미간의 대치 국면 속에서 한국이 사실상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경우이다. 김대중 정부 당시 제2차 북핵 위기가 불거지던 시기와 노무현 정부 당시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하던 시기가 바로 이러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김대중 정부 말기 제2차 북핵 위기가 표면화되자 한국은 위기의 고조를 막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다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북한에 대해 핵문제를 제기하기는 했지만 북핵 위기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미국을 설득해 북한에 대한 중유 공급을 한 달 더 연장시키기는 했지만 제네바 합의의 파탄을 막지는 못했다. 북한과 미국이 서로를 향해 강경 대치를 계속해가는 상황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사실상 거의 없었던 것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단행했던 2006년의 경우에도 노무현 정부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다. BDA 문제로 북미 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노무현 정부는 북한에 많은 양보를 하겠다고 하면서까지 남북관계의 발전을 도모했지만, 미국을 향해 도발적인 행동을 벌이는 북한의 과격한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미사일을 발사하면 쌀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경고나 핵실험을 막기 위해 남북정상회담을 시도했던 노력들 모두 결국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단행해 북한문제가 국제화되자 한국의 역할범위는 더욱 축소됐다. 유엔 차원의 국제제재가 단행되는 상황에서 한국만 예외일 수 없었고, 한국은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수세적 상황이 됐다. 북미간의 대치가 한반도 차원을 넘어 전세계적 이슈로 확대되면서 한국의 외교적 활동공간은 더욱 협소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한국이 북핵문제에서 제3자적 위치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북미가 첨예한 대치 국면으로 가는 것을 사전에 예방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지난 15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 한국이 북핵문제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해왔는가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북핵문제에서 한국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각자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지난 15년간의 역사적 경험은 이렇게 어려워 보이는 듯 한 문제에 대한 답을 비교적 명확하게 예시하고 있다. 북핵문제에서 한국은 적극적 역할을 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제3자적 위치에 머물기를 원하는가? 지난 15년의 경험에서 어떤 교훈을 얻고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이제 우리 앞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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