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 일화는 신약성경 누가복음에 나온다. 2000년 전 본토박이 유대인이었다면 얼굴색이 짙고 검은 곱슬머리, 검은 눈동자였을, 그래서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인과 비슷하게 생겼을 가능성이 농후한 예수님에게 한 율법사가 묻는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누가복음 10장 25절)
예수님은 그에게 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고 되묻는다. 율법사는 구약성경의 신명기와 레위기를 인용하여 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7절)
신명기와 레위기는 유대교의 경전인 '토라(모세 5경)'에도 들어있다. 말하자면 2000년 전 율법사의 답변은 오늘날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율법이기도 한 것이다. 당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고 결론을 맺는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선한 사마리아인 같이) 하라." (37절)
이리하여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을 불멸의 명단에 등재시켰다. 신약성경이 잊혀지지 않는 한 이들 또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브라힘의 동생, 당연히 사마리아인인 '아부 세미'는 나블루스 지역에서 저항 운동을 주도하고 이스라엘군을 공격했다는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 받고, 올해로 7년째 이스라엘 감옥에 갇혀 있다. 다 합쳐봐야 700명밖에 안 되는 소수 종족이요, 믿는 종교도 주류 유대교와 다르기는 하지만 여전히 유대교이며, 이스라엘의 끈질긴 회유를 받는 사마리아인들 중에서 저항 투사가 나온 것이다. 그리고 형 이브라힘의 말에 따르면, 아부 세미가 유일한 경우도 아니다.
"종교나 종족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 부모들은 자식들을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애를 썼지만, 우리도 이스라엘의 점령을 겪으며 자랐다. 8년 전 나블루스에서 2차 인티파다가 벌어진 첫 날, 대학생이었던 나는 팔레스타인 동창이 이스라엘군의 총에 맞아 죽는 걸 보았다. 시위하다 도망치는 그의 어깨를 이스라엘군이 낚아채더니 머리에 총을 대고 쏘았다. 내 눈 앞에서. 어떻게 내가 그를 잊을 수 있겠나? 우리의 정체성은 팔레스타인인이다."
나블루스에서는 지금도 심심찮게 이스라엘군이 전 도시를 며칠씩 봉쇄하고 저항 운동가들을 색출하거나 즉결 처분한다. 저항운동을 주도할 때 아부 세미는 나름대로 굳은 각오를 했을 것이다. 그가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하고 목숨마저 바칠 각오로 사랑한 대상은 자유였다. 이스라엘의 점령에서 해방되는 것. 그는 이스라엘군에 잡혀가기 전에 나블루스 시내 한 벽에 이런 그래피티를 남겼다.
저항이여, 영원하라!
그에게 이스라엘 법정은 종신형을 선고하되, 한 번이 아니라 다섯 번 선고했다.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가둬두기를 다섯 번이라, 이 형용모순의 법률 또한 대단한 상상력이다. 서안 지구 전체를 장벽으로 둘러싸겠다는 발상만큼이나 아찔하다. 죽은 뒤에도 저승까지 따라가서 가둬두겠다는 것. 영혼의 자유까지 차단하겠다는 것.
팔레스타인 시가지는 열사들의 포스터로 덮여있다. 실은 포스터의 주인공들 대부분이 집이나 거리에서 이스라엘군의 폭격이나 포격, 정착민들의 총격과 구타에 일방적으로 희생당한 이들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은 부음 대신 알 악사 모스크, 꾸란, 투쟁 문구로 장식한 포스터를 붙임으로써, 이 억울한 죽음들을 신념을 지키기 위한 용감한 선택으로 바꾸려 한다. 비록 살아서는 피해자들이 불안에 떨었고 그나마 제 명을 다하지 못하였을지라도, 죽어서는 자랑스러운 승리자로 종교적인 믿음이나 역사적인 의미 안에 영원히 거하기를 바란다.
실제로 이스라엘군과 총 들고 싸우다 죽거나 자살 폭탄 공격을 감행한 이들은 돌아오지 못한다. 이들의 시신은 이스라엘군의 냉동실에 보관되든지, '숫자 묘지'에 묻힌다. 숫자 묘지는 군사 지역 안에 있는 탓에 유가족들이 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며, 간다 해도 묘지에 묘비 대신 숫자 판이 꽂혀 있어 찾는 묘를 알아볼 도리가 없다. 몇 번 묘에 누가 묻혀 있다는 자료는 이스라엘군이 갖고 있는데, 국제 인권 단체들의 따가운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군은 이를 절대로 공개하지 않는다. 시신들은 그 가족들로부터 영원히 격리된다.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을 상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주 너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자유를 사랑해도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그렇다. 자유 없는 삶이 영원히 이어지는 게 바로 지옥이다. 다른 종교, 다른 종족의 자유를 영원히 증오하는 것보다는, 나 자신의 자유를 영원히 사랑하는 쪽이 훨씬 아름답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자기 먼저 사랑해야 하고, 자유로운 자만이 사랑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유는 신의 한 얼굴이다.
사진: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www.palbrid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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