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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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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랍어

[오수연의 팔레스타인 명장면] <3>

모든 것은 아랍에서 시작되었다. 현악기, 관악기, 알파벳, 화학, 정제주, 향수, 커피, 천문학, 점성술....... 나는 팔레스타인 전통 의상 사진첩을 보고 우리 한복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 말을 팔레스타인 친구들에게 하지 않았다. 그 말 들으면 이들이 한복도 아랍에서 건너 간 게 틀림없다고 주장할까봐.

특히 아랍어에 대한 이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언젠가 내가 너희 언어에는 복모음에 없어서 한국어의 모음을 제대로 발음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아랍어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언어라 모든 언어의 모든 자음과 모음을 완벽하게 발음할 수 있다면서, 이들이 나조차 제대로 발음하기 힘든 '외' '웨' 등을 침을 튀겨가며 극구 해보려 했던 것이다.

이들은 입을 모아 자기들이 아랍어를 모국어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절대로 아랍어를 배우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지 않을 거라고, 아랍어를 배우고 있는 나한테는 결코 고무적이지 않은 선언을 하기까지 했다. 그중 내게 아랍어를 가르쳐 주는 친구가 다행히 곧 정신 차려 자기 같은 훌륭한 선생님을 두었으니 걱정 말라고, 나를 위로하기는 했지만.
▲ 탄투라 인형극단의 인형 배우들. 가운데 빨간 옷 소년이 주인공이다. 이스라엘이 만든 장벽을 소재로 한 인형극에서 이 팔레스타인 소년은 할아버지와 함께 장벽을 어떻게 넘을지 여러 모로 고민하다가 결국은 날아서 넘는다.ⓒ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www.palbridge.org)

무엇보다 그는 열의가 있었다. 내가 아랍어를 배우러 그의 집에 가면 커피 끓여 내오고, 탁자 위에 희고 깨끗한 종이를 펼쳐놓고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랍어 공부를 시작할까?"

그리고 공부가 끝나면 마찬가지로 눈을 빛내며 내게 물었다.

"다음 아랍어 공부는 언제 할까?"

그런데 그 날은 내가 가방에서 공책과 필통을 꺼냈는데도, 그가 조금만 텔레비전 뉴스를 더 보고 시작하자고 했다. 잘못된 일은 없고 다만 약간 피곤할 뿐이라고 했다. 채널이 '알 자지라'이니 뉴스는 계속 이어졌다. 그 날은 커피도 없었다. 텔레비전에서는 같은 장면들이 거듭 나와, 나는 아랍어를 알아듣지는 못해도 같은 뉴스가 반복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는 같은 뉴스를 보고 또 봤다. 장례식, 피 흘리는 어린 아이, 폭삭 주저앉은 건물. 또 장례식, 피 흘리는 어린 아이....... 창문으로 노을빛이 드리웠다가 벽을 쓰다듬고는 물러갔다. 해가 져갔다.

"오늘도 가자에서 네 명이 죽었어. 우리는 양계장의 닭들 같아."

문득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그 뉴스는 나도 여러 번 보다보니 짐작한 바였다. 지난 며칠간 이스라엘의 대 공습으로 가자에서 죽은 희생자 숫자가 30명을 넘었다. 그가 목소리에 힘을 넣고 손짓을 섞어서 말을 이었다.

"날마다 철커덕 철커덕 죽어가지. 철커덕, 철커덕."

그가 '철커덕'이라고 말할 때마다 옆으로 세운 그의 손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쳐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뿐,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는 다시 텔레비전으로 얼굴을 돌렸다. 우리는 같은 뉴스를 보고 또 봤다. 어두워졌으나 그나 나나 전등을 켜려고 일어나지는 않았다.

"메카로 순례 가려던 가자 사람들이 이집트 국경에서 발이 묶였어."

모처럼 새 리포터가 무슨 사건인가 빠른 말로 보도하는 새 장면이 나오자, 그가 내게 설명해주었다. 빙빙 경광등이 돌아가는 이집트 경찰차, 이집트 출입국 사무소 등의 풍경이 화면에 스쳐갔다. 이스라엘인들은 이집트에 마음대로 관광갈 수 있으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집트 국경에서 까다롭게 심문당하고 걸핏하면 퇴짜 맞는다는 이야기를, 나도 들은 적이 있었다.
▲ 단장 '니달 카팁'이 자기 닮은 인형을 들고 있다. 그는 장벽에 둘러싸인 마을과 난민촌들을 찾아다니며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아랍어'로 인형극을 상연한다.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www.palbridge.org)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오, 아버지! 저는 요셉이에요>라는 시에서 '요셉을 죽인 후 찬양하려 했다'는 '형제들'이란, 말로만 아랍 형제국을 떠들면서 팔레스타인 이슈를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아랍 국가들에 대한 명백한 비유였다. 다시 화면에 스쳐가는 리포터, 이집트 경찰차, 이집트 출입국 사무소. 그러나 이집트 국경에서 발이 묶였다는 가자의 순례자들은 정작 나오지 않았다. 내 마음을 읽은 듯이 그는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텔레비전 불빛에 그의 희미한 미소가 보였다. 나의 훌륭한 아랍어 선생님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그 순례자들은 인터뷰를 거부했어. 그들은 지금 아랍이 신물 나서, 아랍어로 말하기가 싫대."

그 아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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