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합민주신당(통합신당)이 대선에서 참패한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민생문제에 대한 대안 부재였다. 대선 직후 실시된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 국민들은 부동산가격 폭등, 사회 양극화 심화, 비정규직 증가 등을 노무현정부의 대표적인 실정으로 꼽고 있다(《한겨레》 2008.1.2). 사실 고용, 성장, 국제수지 등 거시경제 지표만 본다면 노무현정부에서 한국경제가 크게 어려워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문제는 급증한 비정규직과 영세 자영업자 등 사회경제적 약자계층이 겪게 된 구조적 민생고였다. 소득과 자산의 격차 확대를 포함한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이들의 체감경제는 가히 '죽은' 것이라 할 만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공약에 환호하고 그의 집권에 기대를 모아준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민심 이반을 막고자 했다면 통합신당은 한나라당의 해법에 맞설 만한 구체적 비전이나 정책대안을 제시했어야 했으나 그리하질 못했다.
통합신당, 패배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
대선과정에서 한나라당이 내놓은 경제 살리기 처방은 한마디로 '기업하기 (더욱) 좋은 나라'를 만들어 경제성장을 극대화함으로써 고용과 분배 관련 문제 등을 풀어간다는 것이었다. 방점은 물론 대기업 혹은 재벌의 경제활동 자유화에 두었다. 실질적 혹은 잠재적 국제경쟁력을 확보한 대기업들이 대내외 시장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야 국가경제의 효율성과 생산성, 따라서 성장이 극대화될 수 있으며 그렇게 고성장이 지속돼야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 발생에 의한 중소기업 부양, 고용확대, 분배증진 등도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대기업 중심의 이른바 '자유시장' 경제체제로 가자는 것이었다. 이는 탈규제, 민영화, 시장개방, 국가 개입의 최소화 등을 골자로 하는 시장만능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적 색채가 매우 강한 처방이었다.
통합신당이 이러한 한나라당에 맞서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적 처방의 허점과 맹점 등을 적시해주고 그 대안을 내놓아야 했다. 예컨대 적하효과란 결코 시장 기능에 의해 저절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며 그 효과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여 대기업과 중소기업, 제조산업과 써비스산업, 수출부문과 내수부문, 강자와 약자, 있는자와 없는자 사이의 상생구조를 안정적으로 구축하기 위한 산업, 통상, 기업, 노동, 복지, 조세, 교육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함을 강조하고, 실제로 그러한 정책패키지를 실천공약으로 내걸어야 했다.
신자유주의적 해법은 오히려 사회 양극화와 비정규직 급증 등의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며, 그같은 폐해를 방지하면서도 지속적인 성장과 개방이 가능한 다른 구체적 대안이 있음을 설명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바라기로는 그 대안을 체계화한, 이를테면 한국형 '조정시장' 경제모델을 제시해야 했다. 그러나 통합신당은 대안모델은커녕 사회 양극화나 비정규직 그리고 한미FTA 문제 등 최소한의 핵심이슈 영역에서도 한나라당과 분명히 구별되는 현실성 있는 대안정책을 내놓지 못했고, 결국 참패했다.
대선이 끝난 지는 이미 달포 가량이 지났고, 총선까지는 두달여밖에 남지 않은 현재까지 통합신당은 아직도 패인 분석을 정확히 못했거나 아니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듯하다. 신자유주의의 대안모델을 구축해보겠다는 중장기적 프로젝트는 물론 주요한 개별이슈 영역에서 한나라당과 정책대결을 벌여보겠다는 단기 계획조차도 (개인은 몰라도 당 차원에선)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선명 야당'으로서의 정체성 결핍
이념과 가치 또는 정책기조의 차이가 유권자들로 하여금 각 정당을 구분하고 그들의 정당 선호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본 요소라고 할진대, 통합신당은 (지역정당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으로 스스로를 한나라당과 차별화하고 그 당에 맞서겠다는 것인지 도대체 알 도리가 없다. 향후 통합신당의 '선명 야당'으로서의 정체성 결핍을 전망케 해주는 대표적인 예는 한미FTA 비준동의안의 국회 통과를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겠다고 한 최근 손학규 대표의 발언이다.
한미FTA 문제에 대하여 통합신당은 손 대표의 취임 이전까지는 적어도 '신중한' 태도는 지켜왔다. 당 안팎에 존재하는 상당한 반대의견을 의식하여 당론 결정을 미뤄왔던 것이다. 사실 서민과 중산층의 이익을 대표하겠다는 정당이 한미FTA를 적극 추진하겠다고 나서기는 매우 곤란했을 터이다. 많은 이들이 이미 잘 알고 있듯, 한미FTA는 한국의 사회경제체제를 신자유주의적인 것으로 고착시킬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한미FTA 체결 내용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단순한 무역자유화협정이 아님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오히려 자본자유화협정이라 해야 할 것이며, 중간 수준 이상의 경제통합협정에 해당한다. 이 협정이 발효되어 양국간의 경제통합이 가속화되면 양측의 제도, 정책, 규범 등은 빠른 속도로 수렴돼갈 것이 자명하다. 말이 수렴이지 실제로는 상대적 약소국인 한국의 사회경제체제가 '미국형' 신자유주의화의 길을 걷게 되는 형국일 것이다.
그 경우 미국처럼 한국에서도 자본과 기업의 자유나 경쟁시장의 효율성 등만이 강조될 것이며, 시장조정자로서의 국가의 역할이나 공동체 사회의 형평성 등은 (지금보다 더) 경시 혹은 무시될 것이다. 따라서 빈부격차의 확대는 당연시될 것이며 복지나 사회정책의 강화를 통한 사회경제적 약자에 대한 제도적 배려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反신자유주의 세력의 행보를 기대한다
그런데 이제 통합신당의 대표는 이러한 성격의 한미FTA가 신속히 발효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겠다는 공언을 서슴지 않고 하고 있다. 그 협조의 대상은 물론 대기업과 한나라당이다. 정녕 손학규 체제의 통합신당은 노무현정부가 이루지 못한 '대연정'의 꿈을 한미FTA 연대를 통해 부분적이나마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 대안을 내놓아도 시원치 않을 상황에서 한나라당의 신자유주의 노선에 편승하려는 까닭은 무엇인가?
비단 한미FTA 문제만이 아니다. 통합신당은 대통령직 인수위가 내놓고 있는 출자총액제한 및 금산분리의 완화 또는 폐지, 자율형 사립고의 확대, 신문법 폐지, 부동산 양도세의 공제 확대 등 '자유시장'형 정책방안들에 대하여 대체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통합신당이 이대로 간다면 총선 결과는 이미 뻔하다. 대선 참패를 맛보고도 전혀 개선되지 않은 아니 오히려 악화된 듯한 통합신당의 무능과 태만 그리고 뻔뻔스럽기까지 한 그 무감각에 대하여 서민과 중산층 유권자들은 더 큰 응징을 가할 것이 예상된다. 이 상황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통합신당 내에 건재하고 있는 반(反)신자유주의 세력의 향후 행보이다. 통합신당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 중도진보정당의 미래는 이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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