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의 주둔을 또다시 연장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부는 '1200여명 규모의 병력을 600명 가량으로 줄여 철군 시기를 내년 말로 조정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자이툰 부대 임무종결계획서를 이번 주 내로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정부가 자이툰 주둔을 지속해야 한다며 내건 명분은 크게 두 가지다. 북한 핵문제의 해결이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게 첫 번째고, 이라크 재건사업에 한국 기업이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놔야 한다는 게 두 번째 이유다.
그러나 이같은 입장에도 불구하고 '2007년 말 철군'을 공언했던 정부가 결국 거짓말을 한 셈이라는 비난은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이툰으로 북핵 해결에서 미국의 협조를 받는다'는 말이 과연 타당한 것이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임기 끝나기 전에 자위대 불러들인 고이즈미
정부가 임무종결계획서에 '파병 연장' 대신 '철군 시기 조정'이란 표현을 넣은 것은 이번 결정이 '연장도 아니고 철군도 아닌 어떤 것'이라는 뜻을 담겠다는 것이다. 이같은 '묘안'을 짜낸 것은 올해 말까지 철군하겠다는 작년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정부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1년간 자이툰 주둔 연장설이 불거질 때마다 철군 계획에는 변함이 없다고 못박아 왔다. 대표적으로 한 청와대 관계자는 지난 5월 31일 국방부 쪽 파병연장설이 흘러나오는데 대해 "우리 (철군) 계획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그랬던 정부가 말을 확연히 바꾼 것은 지난 17일이었다. 그동안 '연내 철군 불변'을 확인해 온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그날 "올해 말까지 철군하겠다는 기존의 방침과 한반도 현안을 풀어나가는데 있어 한미공조의 중요성 사이에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철군 시기 조정'이란 말로 표현한다고 해서 정부의 '대국민 거짓말'을 은폐할 수는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오히려 정부가 꼼수를 부리고 있다는 비난만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연장' 대신 '시기 조정'이란 표현을 쓴 것은 노무현 정부가 끝까지 책임을 진다는 뜻을 담은 것이라는 적극적인 평가도 있다.
하지만 끝까지 책임을 진다는 것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의 경우에나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고이즈미는 총리 재임 시절 그토록 친미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임기가 끝나기 전 이라크에 파병됐던 자위대를 모두 불러들여 결자해지(結者解之)를 실천했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이 묶어 놓은 매듭을 차기 정부가 풀라고 떠넘기는 동시에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크게 손상시키게 됐다.
참여연대는 22일 성명서에서 "연내 철군하겠다는 지난해의 약속도 미국의 파병 연장 요청 앞에서 공염불이 되는 마당에 미국의 파병요청이 계속되는 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있어 미국과의 공조가 전혀 필요없게 되지 않는 한, 내년에 철군하겠다는 정부의 말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자이툰 있었어도 안 풀렸던 금융제재
노 대통령은 23일로 예상되는 대국민 담화에서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라는 해묵은 논리로 국민들을 설득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이툰으로 북핵을 푼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2005년 9.19공동성명부터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까지의 위기 정국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미국은 당시 북한에 취해진 금융제재를 완화했으면 하는 한국의 희망을 철저히 외면했다. 자이툰 부대를 파병해 미국을 돕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의 태도를 변화시키는데 아무런 변수가 되지 못했다.
북핵 문제가 위기가 아닌 해결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현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북핵 문제가 순풍을 탄 것은 대외정책에서 실패만 경험했던 조지 부시 미 행정부가 북한 문제 하나라도 건져보자는 절박함 때문에 조성된 국면일 뿐이다.
즉 미국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상황이지,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이 고마워서 '한국 원하는 대로 해겠다'는 게 결코 아닌 것이다. (☞관련 기사 : "평화대통령? 자이툰 철수부터!")
자이툰 병력을 증파해도 미국 뜻대로 될 것
이달 초 열린 남북정상회담 이후 나타나고 있는 미묘한 변화를 봐도 그렇다.
정상회담 직후인 지난 7일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종전선언을 위한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 시기와 관련해 "연내 성사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도 같은 날 "종전선언은 평화체제 협상의 끝에 하는 것일 수도 있고 평화체제 협상의 개시 선언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해 종전선언의 시점이 앞당겨 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같은 발언들은 노 대통령 임기 내에도 뭔가가 가능하다는 기대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종전선언이 금방이라도 추진될 것 같았던 분위기는 11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차관급 전략대화, '북핵이 폐기되는 시점에서 평화체제 협상의 개시가 가능하다'는 미국 측의 잇달 발언 등을 거치며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에 따라 이제는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은 커녕 연내에 6자 외교장관 회담만 성사시켜도 큰 성과라는 게 정부 당국자의 전언이다.
이에 송민순 장관은 지난 18일 국회에서 "한미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비핵화가 '의미있는 진전'을 할 경우 평화체제 논의를 출범시킨다는 것"이라며 '의미있는 진전'은 "손에 잡히는 불능화"라고 답했다. 이는 7일 발언과는 확연히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것으로 미국과의 협의 과정에서 종전선언에 대한 속도조절이 이뤄졌음을 짐작케 했다.
사실 미국은 그동안 '종전선언'이란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고, 단지 북핵이 폐기되면 '평화협정' 혹은 '평화조약'을 맺을 수 있다는 입장만을 밝혀왔다.
이처럼 미국은 철저히 자신들의 필요와 시간표에 의거해 북핵 문제를 다루고 있다. 종전선언을 추진하자는 남북 정상의 합의도 자신들의 로드맵에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자이툰 주둔 연장이 아니라 이라크에 한국군을 증파하겠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각에서는 종전선언이 실제로 이뤄지지는 않더라도, 자이툰 주둔 연장을 대미 협상의 카드로 활용해 '종전선언 추진을 지지한다'는 정도의 발언만이라도 이끌어 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담화가 예상되고 있는 전날까지도 미국은 그런 기미를 일절 비치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자이툰으로 북핵 문제에서 미국의 협조를 이끌어 낸다'는 논리는 이처럼 빈약하기 짝이 없는 희망사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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