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년 전 영화 <꽃잎>을 보았다. 그리고 2007년 여름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 십여년이라는 세월 동안 변한 건 없다. 아니, 많은 게 변했다. 전두환의 적자들은 정권을 넘겨주었고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났으며 한국군은 평시작전권을 미군에서 회수했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게 있다. 전두환의 적자들은 건재하고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뀔 날은 요원하며 미군은 여전히 주둔 중이다. 배를 타다 육지에 내리면 배멀미 대신 땅멀미를 앓게 된다. 단단한 땅이 흔들리고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욕지기가 솟는다. 짧은 항해만으로도 그러한데, 역사가 한번 뒤흔들고 간 사람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멀미에 시달려야 하는 걸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엉뚱한 결혼식에 축의금을 내버린 하객처럼 불편한 심정이었다. 연인들끼리, 벗들끼리 온 사람도 많았지만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온 젊은 부부들도 적지 않았다. 관람석 곳곳에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총탄에 맞아 쓰러지면 나직한 탄식도 흘러나왔다. 슬픔과 눈물은 전염성이 강하다. 나 역시 콧등이 시큰했지만 울어보려 해도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들에 동화되지 못하는 내가 낯설었고 그 낯섦이 나를 불편케 했다. 나는 내가 독해졌다고 생각했다.
멜로드라마의 전염성과 불편함
영화는 끝났다. 편곡을 했는지 귀에 익지 않은 곡조의 <님을 위한 행진곡>을 배경으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갔다. 십여년 전 <꽃잎>을 볼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그때는 영화가 끝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명작이어서가 아니다. 광주를 스크린으로 옮겨놓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격할 수 있었던 시대다. 그때보다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은 많아졌건만, 이제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는다. <화려한 휴가>는 광주를 다룬 영화가 아니다. 광주를 후경으로 삼은 멜로드라마다. 예나 지금이나 멜로드라마를 보고 박수 치는 사람은 없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가장 비겁한 사람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광주시민들이었다. 그들은 계엄군이 최후의 진압작전을 펼치던 5월 27일 새벽, 도청을 사수하는 시민군의 대열에 합류해달라는, 잠들지 말아달라는 절규를 외면했다. 계엄군의 탱크가 지나간 곳은 금남로가 아닌 그들의 가슴이었으며, 계엄군이 점령한 곳은 도청이 아닌 그들의 양심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후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광주시민들은 누구보다 용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슴에 새겨진 캐터필러 자국을 잊지 않았다. 반면, 그후 가장 비겁한 건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우리는 진상규명도 없이 망월동에 국립묘역을 조성했고, 암매장된 주검들을 찾아내지도 않은 채 그들을 국가유공자로 만들었다. 몇푼의 세금을 떼어 광주를 기념비로 만들어버린 우리는 돈으로 모든 걸 살 수 있다고 믿는 현대인이다. 그리고 이제 광주는 <화려한 휴가>에 이르러 판타지의 세계가 되었다.
판타지의 선악구도 속에 빠진 것
판타지의 특징은 선과 악의 대립구도가 확실하다는 거다. 그래서 관객들은 자신을 '선'에 위치시키게 된다. 항쟁 당시에도 죽은 이들의 명단에는 단 한명의 지식인도 들어 있지 않았다. 광주를 언급하면 눈살을 찌푸리던 자들이 지금 영화관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 행위에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나는 모른다. 어쨌거나 그들이 영화를 본 뒤에 가지고 나올 것은 카타르시스뿐이다. 더러는 광주에 새삼 관심을 가지게 되었노라 고백을 할 것이며 더러는 분노와 절망감으로 광주를 되새기리라. 그리고 까맣게 까먹으리라. 자신의 의무를 다했으므로.
광주를 다룬 소설의 궤적을 훑어보자. 최초의 작품들은 광주를 전면에 내세울 수 없어 우회하는 방식을 썼다. 고발과 증언을 위해 광주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그린 윤정모의 <밤길>이 대표적이다. 홍희담의 <깃발>에 이르러서야 광주는 소설의 한복판에 등장한다. 우회하지 않고 항쟁기간의 광주를 묘사한 첫 작품이다. 정찬의 <슬픔의 노래>에 이르면 드디어 피해자인 광주시민의 시야를 벗어나 가해자인 진압군의 눈으로 광주를 볼 수 있게 된다. 정도상의 《열애》(전2권)는 폐허나 다름없는 광주에서도 끈질기게 피어나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보여주고, 임철우의 《봄날》(전5권)에 이르면 광주를 읊은 거대한 서사시를 볼 수 있게 된다. <밤길>에서 《봄날》에 이르는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부정과 확신을 반복하면서 끈질기게 매달린 뒤에야 이곳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미는 여전하다.
아직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다
해서 나는 광주라는 것만으로도 찔끔 눈물이 나는 정서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멜로나 보여주길 기대하지 않았다. 그건 <꽃잎>으로 충분했다. 또한, 27년이 지난 오늘 새삼스럽게 광주의 진실이 무엇인지 영화가 밝혀주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꽃잎>과 《봄날》이후를 보고 싶었을 따름이다. <화려한 휴가>는 우리에게 공범의식을 불러일으키지도 않고, 반성적 성찰의 기회를 주지도 않는다. 선과 악의 대결구도만이 있으며, 이 영화의 메씨지가 온전히 받아들여진다 해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당시 광주시민들은 폭도가 아니었다는 철 지난 항변뿐이다. 27년이란 세월은 어떤 기억이든 추억으로 만들기에는 에누리 없이 적당한 시간이다. 혹자는 이 영화에 애정의 눈길을 보내기도 할 것이다. 광주를 다뤄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여길 분들도 많으리라. 그이들의 순정을 동경해 마지않는다. 십여년 전이었다면 나 역시 동감이다.
<꽃잎> 이후 십여년. 다시 우리가 광주를 다룬 영화를 만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십년을 기다려야 한다. <화려한 휴가>가 찾아왔기 때문에 한동안은 즐길 수 있겠지만 관객들도 당분간은 광주 영화에 흥미를 잃을 테고, 야심만만한 젊은 감독들도 섣불리 손대지 못할 것이다. 십년이 지난 뒤에 무엇이 우리를 찾아올지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건 아직 눈물을 흘릴 때는 아니라는 점이다. 눈물은, 광주가 기념비가 되어도 좋다고 인정할 수 있을 때, 그때 흘리자.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독해질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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