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급격한 출산율 하락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2005년 현재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08로 세계 최저수준인데, 쉽게 말해 출산이 가능한 가임연령(15~49세)에 있는 여성 한 명이 평생 출산하는 평균 자녀수가 1.08명이란 의미다. 합계출산율이 인구규모를 유지하는 수준인 2.1 이하로 떨어진 것은 1983년경인 데 반해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2000년 이후였다. 인구가 늘어나면 모두 가난해진다는 개발독재 시절의 캠페인을 지나치게 학습한 나머지 눈앞에서 출산율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미처 대응할 생각조차 못한 채 십수 년이 흘렀던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정부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설치와 이른바 '새로마지플랜2010'(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의 수립,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조합 및 기업이 참여하는 저출산·고령화사회협약 체결 등 나름대로 분주한 일정을 밟아 왔다. 이제 저출산 문제는 시대적인 과제로 인식되고 있지만 과거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미래를 잘못 진단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
일할 사람이 없으니 일단 많이 낳아라?
첫번째 문제는 여전히 성장제일주의의 렌즈를 통해 저출산을 바라보는 것이다. 대다수 정부보고서는 저출산의 사회적 효과를 신생아 감소, 생산연령 인구의 감소와 부양비 증가라는 '양적' 차원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저출산이 경제성장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에 촛점을 맞춘다. 정책 목표는 '적게 낳자'에서 '많이 낳자'로 역전되었지만 좀더 깊이 들어가보면 출산과 양육을 보는 근본 시각은 과거 개발국가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고출산이 성장을 저해한다고 보았다면 이제는 저출산이 성장을 위협한다고 하니 결국 성장제일주의 담론으로 수렴하는 셈이다.
저출산·고령화 현상이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그러나 저출산 그 자체를 '경제현상'으로만 보는 것은 큰 잘못이다. 산업발전을 지원하고 건설경기를 부양하듯 출산을 늘릴 수는 없다. 결혼과 출산은 반드시 해야 한다거나 결혼적령기가 따로 있다는 인식은 이미 상당히 약화되었다. 결혼연령의 상승과 비혼(非婚) 인구의 증가, 이혼과 재혼의 증가 등은 한국사회에도 친밀성의 구조변동이 진행중임을 보여준다. 개인과 가족, 여성과 남성, 정서적 친밀성과 경제적 부양의 관계는 위계적이고 전통적인 가족규범의 경계를 넘어서서 이른바 탈산업사회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단지 국가의 경제성장을 위해 출산을 늘려야 한다는 발상은 매우 시대착오적이다.
두번째는 국가정책으로 직접 출산을 줄이거나 늘릴 수 있다고 믿는 과도한 국가개입주의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1960년대 말부터 보건소와 가족계획협회는 국제기구에서 제공하는 피임기구와 피임약을 전국적으로 보급하고자 시술대상 여성을 모집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러나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기구나 약물의 보급이 이후 여성 건강에 어떤 부작용을 미쳤는지 제대로 조사를 실시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산아제한정책의 어두운 이면, 여성의 몸에 대한 일방적이고 억압적인 개입의 부작용과 문제점을 겸허하고 솔직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잘 살아보세'에서 바뀌지 않은 것: 과도한 국가개입
마찬가지로 출산장려정책에도 경계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정부나 지자체에서는 이른바 출산축하금 지급, 출산관련 의료비의 보험적용 확대, 불임부부의 시험관아기 시술 지원 등을 하고 있다. 건강한 출산을 위한 지원 자체는 바람직한 것이지만, 출산의 증대만을 목표로 삼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이른바 출산장려정책은 분만을 전후한 수 개월의 짧은 기간에 혜택을 집중시키는데, 그 이유는 건강한 신생아를 얻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신생아 수가 늘어나면 저출산·고령화가 초래할 사회문제가 해결되는가? 출산 이후에는 더 큰 문제, 곧 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가르치며 자립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저출산 대응책을 단지 결혼과 출산의 테두리에서만 찾는 것은 매우 편협한 시각이며 다른 중요한 문제들을 외면하는 것이다. 가령 이미 태어난 아이들이 사회적 무관심으로 방치되거나 해외로 입양되는 문제, 통일 이후 우리 사회의 일원이 될 북한 아동의 열악한 성장환경, 나날이 늘어나는 이주노동자 문제 등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제 출산은 개인의 자율적인 선택이며 각자가 행복 추구나 가치관에 따라 결정할 문제가 되었다. 쌍춘년, 속칭 황금돼지해를 맞이하여 결혼과 출산이 상당히 늘어난 현상을 보면 무리한 정책개입보다는 행운을 원하는 자발적인 시민의 선택이 훨씬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화하는 모성상 반영하는 사회적 환경 가꿔야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저출산이 심각하다고 하면서도 출산의 주체인 모성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편향적이며 불충분하다는 점이다. 저출산 대책은 일차적으로 생물학적 모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모성사망률이 높았던 근대화 시기에는 생물학적 모성에 개입하는 모자보건 정책이 중심이 되었겠지만, 그러나 기본적인 보건의료 서비스가 제도화된 오늘날 어머니의 역할은 '낳는 것'뿐 아니라 '잘 키우는 것'으로 촛점이 옮겨가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에 대비하는 가장 좋은 방안은 '많이 낳는 사회'가 아니라 '잘 키우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잘 키우는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단지 낳는 존재로만 보는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2005년 인구조사 결과 전국의 가구주 중 21.9%는 여성이었는데, 다섯 집 중 한 집은 여성가장이 이끌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또한 15세 이상 여성의 절반 정도가 이미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웬만한 중산층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다 보니 이제 취직을 못하면 결혼하기 어렵다는 말이 여성에게도 해당된다고 한다.
요컨대 출산의 고통과 헌신적 양육으로 상징되는 단일한 모성상은 이제 복잡한 시대의 다양한 모성상, 즉 가족부양을 책임지는 어머니, 일하는 어머니,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어머니, 개성과 성공을 추구하는 어머니 등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획일적인 출산장려가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어머니들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녀를 잘 키울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를 사회가 제공해야 한다. 더 나아가 남성과 여성 모두 양육과 보살핌을 분담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장주의 벗어나 지속가능성 추구로
여성, 특히 어머니를 고용하려면 기업의 입장에서 추가비용이 든다고 흔히 말한다. 출산휴가, 육아휴직, 직장보육시설 운영, 근무시간 단축 등에는 어느 정도 돈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비용을 사회가 함께 분담하지 않고는 '잘 키우는 사회'로 나아갈 방법이 없다. OECD 국가의 예를 보더라도 여성이 경제활동을 많이 하는 국가일수록 출산율이 더 높게 나타난다. 저출산으로 고민하는 한국, 일본,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공통점은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50% 수준 또는 그 이하에 머물러 있다는 것과 더불어 가족주의가 중시되고 부계중심의 가족규범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초저출산 문제를 단지 경제성장의 위험요소로만 보는 것은 곤란하다. 오히려 잘 살아보기 위해 지금까지 우리가 고집했던 방식, 예를 들면 배타적 민족주의, 이기적 가족주의, 경제성장우선주의, 남성중심의 가부장주의 등이 고착되면 될수록 더 큰 위기가 닥쳐오리라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는 성장제일주의가 오히려 우리 사회의 재생산과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위험요소가 아닌가를 진지하게 되물어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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