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5월 17일, 경의선 열차가 군사분계선을 통과해 개성으로 갔고 동해선 열차가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설악산으로 왔다. 철로 위를 달리는 것은 기차가 아니라 꿈이었다. 57년 동안의 열망으로 뭉치고 뭉쳤던 꿈이 한 덩어리가 되어 구름 위를 달려가는 느낌이었다.
그 구름 사이에서 늦봄 문익환 목사님을 보았다. 발바닥으로 꿈을 꾸었고, 발바닥으로 피를 흘렸고, 발바닥으로 하나님과 민중을 섬겼던 사람. 발바닥으로 환하게 웃었고 끝내는 발바닥으로 월경(越境)의 모험을 감행했던 예언자. 꿈으로 금기(禁忌)를 무너뜨리고 끝내는 노래가 되고 길이 되었던 늦봄 문익환 목사. 그가 비로소 부활하여 미래가 되는 순간이었다. 늦봄 자신이 꿈을 가득 실은 기차가 되어 칙칙폭폭 덜커덩거리며 민족의 가슴 속으로 아주 짧은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가 남북을 횡단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오래지 않아 서울역에서 "평양행 기차표 두 장이요!"라고 말할 때가 오고야 말리라는 예감에 콧등이 시큰해졌다.
5월 16일 밤, 빗줄기가 퍼붓는 성공회 성당 안에서는 '평양행 기차표를 달라'는 늦봄의 시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많은 사람들이 미친 짓이라고, 잠꼬대라고 손가락질 했을 때에도 의연하게 '말'을 쏟아놓았던 늦봄의 '은유를 버린 직설'이 빗줄기 속에서 춤을 추었다.
문익환의 직설은 언제나 가슴을 서늘하게 관통하는 비수와 같았다. 늦봄은 유럽이나 미국 혹은 일본이 편집하고 소개한 미학에 갇혀 낯선 이미지와 표현에만 집착하는 문학계의 터무니없는 관념을 일갈했다. '나는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라는 시에서는 삶의 벼랑에 내몰린 민중의 이야기를 너무도 쉬운 말로 풀어 놓았다. 그 쉽기만 한 언어들은 비수가 되어 지식인의 비대한 뇌에 화살처럼 박히곤 했다. 그는 스스로 여공이 되었고 농민이었으며, 철거민, 노점상이었다.
예수가 글로써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히브리 민중 누구나 공감하는 생활의 언어로 소통했듯이 그렇게 문익환은 당대 현실 속에서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시를 '노래'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노래가 쏟아내는 놀라운 빛을 일순간 만나게 되었다.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이 시를 늦봄의 오랜 '친구' 고은 시인이 낭송했다. 육군교도소에서 벽을 두드려 통방했던 사이였다. 어둠을 두드리며 내리는 빗줄기가 그치면 개성행 기차를 '구름처럼 바람처럼' 타게 될 고은 시인의 목소리는 낮았고 떨렸다.
신영복 선생은 '비무장지대 만세'를 차분하게 외쳤고, 도종환은 '철조망 위를 걸어오신 예수'를 노래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민주노총 전위원장과 전농 위원장의 목소리로 아들 전태일을 늦봄의 시 속에서 불러냈고, 김근태 의원과 이창복 의장과 이인영 전대협 의장은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음'을 고백했다. 늦봄의 제자였던 이해동 김상근 이해학 목사는 '땅의 평화'를 기도했고, 김형수 시인은 '예언자'를 노래했다.
솔직히 말하자.
문익환만큼 자신의 일생 속에 역사를 많이 담고 산 사람이 있었을까? 그의 일생은 우리 현대사의 시공간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 격동의 순간과 함께 요동쳤다. 늦봄이 잠꼬대 같은 꿈과 발바닥으로 한 시대의 정신과 역사의 운명을 예감했던 저 마지막 구절처럼 경의선, 동해선에서 기차가 북상했고 남하했다. 겨우 한 시간의 짧은 거리를 57년 만에 넘어야 했던 역사가 한 매듭을 묶고, 이제 다시 새로운 민족의 미래에 대한 꿈꾸기가 시작된 것이다.
문익환은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며,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다'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부활의 뜻이 그이의 시를 낭송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타고 넘어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다들 지금 뭐하는 거야! 당신들이 주인이 되는 잔치를 벌여야지, 춤추고 놀아야지. 저 기차를 타고 대륙으로 시베리아로 유럽으로 가서 질펀하게 놀아야지. 세계는 니들 거야. 발바닥으로 샅샅이 훑고 다녀야지! 통일은 됐어!"
그랬다. 늦봄이었다. 문익환을 알고 나서 모든 봄은 늦게 왔고, 여름도 늦은 봄이었으며, 가을과 겨울 또한 더 늦은, 더더 늦은 봄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영원히 봄의 연장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가 말한 부활은, 통일은 현재진행형이므로….
오늘, 우리는 남북을 연결하며 달리는 기차에서 문익환이 먼저 꾼 꿈을 보았다. 우리 모두는 문익환의 꿈길을 철로 삼아 그 위를 달린 것이다.
6월 3일, 늦봄이 먼저 시작한 민족의 오랜 꿈들을 모아 도라산역에 늦봄의 시비(詩碑)를 세우고자 한다. 이는 문익환 개인을 추억하기 위해서도, 기념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어느 늦봄의 하루에, 편안하게 소풍을 가는 마음으로 문익환의 시 옆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문익환을 만나기 위해서다. 우리 모두의 오랜 꿈을 함께 꾸기 위해서다.
* 안내 : 늦봄 문익환 목사 시비 제막식
장소 : 도라산역
일시 : 2007년 6월 3일 오후 4시
문의 : 02-392-3615 (통일맞이늦봄문익환목사기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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