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패러다임(paradigm), 프레임(frame), 정책(policy)으로 편의상 나눠놓고 생각해 본다. 패러다임은 일상에서 자주 쓰는 용어인데 좀 차원이 높은 이야기 같다. 아주 쉽게 이야기해보면,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天動說)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地動說)에의 전환을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좀 거창한 패러다임의 이야기이고, 일상에서 우리가 쓰는 패러다임이란 용어는 그 차원보다는 훨씬 낮다.
개념을 낮추어 가다 보면 패러다임과 프레임이란 개념이 뒤섞이며 혼란스럽게 된다. 프레임을 생각의 틀이라거나 세상을 보는 방식이라고 쉽게 정의를 내려, 프레임을 패러다임보다는 한 단계 낮은 차원이라고 생각해보면 편리할 것 같다.
프레임의 밑에 정책을 두고, 마치 정책보다 한 차원 높은 것이 프레임처럼 말했는데, 여기에도 약간의 뒤섞임이 있을 것 같다. 정책이라고 말할 때도 아주 중요한 것 가운데는 프레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책이 축적되면 프레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편리하게 패러다임, 프레임, 정책이라고 나누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최근의 신문을 보니 "책임있는 정치 대 새로운 정치…문-안 '프레임 경쟁'"이라는 큰 제목이 보인다.(<한겨레> 10월 30일 자) 나는 이 문제를 20년 가까운 정치의 경험에 바탕하여 나의 관점에서 말해보려 한다. 프레임 짜기 이야기다.
① 신문기자 생활 후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이 있었다. 여기서 유신 자체를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때 박 대통령의 강한 의지와 정치적 경직 사태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희생을 치르지 않고 지혜롭게 벗어나 정상적인 정치 발전을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었다. 물론 유신 반대 투쟁의 길도 있다. 그렇지만 온건론자들은 타협적인 모색을 하였다.
그런 사람들은 이원집정부제(二元執政府制) 비슷한 개헌(改憲) 방향을 생각했다. 박 대통령에게 대통령의 영예는 그대로 주면서 외교(外交), 국방(國防)의 권한만 맡기고 그 밖의 내치(內治)는 내각(그러니까 정당들)에 일임한다는 그런 방식이다. 꼭 드러내놓고 이원제(二元制)가 아니고 막연하게나마 범(汎) 국민적 운동체 같은 형식의 울타리는 마련하고서이다.
박 대통령의 오기나 체면은 살리고 저항을 적게 하면서, 그러면서 한 단계의 정치 발전을 이룩하는 그런 편법이다.
그러한 움직임이 암암리에 여러 곳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한 사람을 지적하면, 당시 일본에서 <통일일보(統一日報)>를 발행하던 이영근 사장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동서로 CIA 파견 주일공사(駐日公使)로 있던 최세현 전 고려대 교수를 통해서 한국 정치의 중앙을 향해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유석현, 권오돈, 송남헌 씨 등 독립운동 계열의 인사들로 추진체의 명분상 핵심도 구성해 놓았다. 실제로 박 대통령과의 면담이 이야기가 되었다고 하여 이영근 사장이 서울로 와서 얼마간 대기한 적도 있었다. 최 공사는 지금 미국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증언을 들어보았으면 좋겠다.
나도 미력이나마 "유신 2년 유감"(<서울신문> 1974년 10월 10일 자)에서 몇 년 안에 개헌할 필요성이 있음을 말하고, "정치발전을 생각한다"(<정경연구> 1977년 9월호)란 논문에서 개헌의 방향을 구름 잡듯이나마 제시했었다.
그리고 10대 국회에 진출하면서 그 일을 구체적으로 추진할 의욕도 갖고 있었는데 남은 기간이 짧았고, 박정희-차지철의 극단으로 경직화된 체제에서 그럴 틈이 전혀 없었다. 박-차의 벽을 뚫고 들어간 인사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김재규 부장의 권총 말고는. 이 이원집정부제 비슷한 착상(着想)도 프레임이다.
② 전두환 정권이 되면서 민정당에 흡수되게 되었다. 나는 6.25 전쟁으로 과도하게 비대해진 군부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일단은 군(軍)·민(民)의 연합정치(聯合政治)를 거쳐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였다. 군인과 시민의 연합(military-civil partnership) 이야기인데 첫 단계에서 군이 상급자(senior), 민이 하급자(junior)로 가다가, 둘째 단계에는 민이 상급자, 군이 하급자로 가는 순서를 밟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정당 창당 초에 정책위 의장일 때 미국의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CSM)>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와의 인터뷰에서 그런 뜻을 말했는데 <CSM>(1981년 1월 30일 자, 오까 다까시 특파원)의 기사가 군민의 연합정치를 그런 대로 더 잘 언급하였다.
그런 이야기를 자주 했으나 그 실현은 어려웠다. 그러다가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합당으로 기회가 찾아왔다.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출함에 있어서 민정당에서는 박태준·이종찬 씨 등이 나섰고 나는 그들과 매우 가까웠으나, 이제는 민이 상급자 파트너가 될 때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주장하며 군 출신인 박태준·이종찬 씨를 어렵사리 거부하고, 민주계인 김영삼 씨를 적극 밀었다. 민정당에서 정책위의장을 두 번 지내고 중앙위의장을 했던 4선 의원이었으니 YS에게 힘이 되었을 것이다. YS는 어찌 생각했든 간에….
군인과 시민의 연합(military-civil partnership)과 상급자 파트너, 하급자 파트너 이야기도 역시 프레임이라 할 수 있다. 평가는 별도로 하고.
③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는 민주화합추진위원회(民和委))라는 것을 만들었다. 김영삼 이후의 당선자들은 정권인수위(政權引受委)를 만들었지만 노태우 씨는 전두환 씨한테서 정권을 인수받으면서 감히 '정권 인수'란 표현을 못 쓰고 민화위 형태를 택한 것이다.
민화위는 사회 각계 인사로 구성되고 세 개 분과위로 나누어졌는데 그 가운데 광주(光州)분과위가 특별하게 있었다. 그때는 이 광주문제가 가장 중요하고도 심각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민화위 위원장은 언론인 이관구 씨, 광주분과 위원장은 박병권 전 국방장관, 동 간사는 장덕진 전 농수산부장관이었다. 각 분과위에는 민정당 국회의원이 한 명씩만 배치되었는데, 영문도 모른 채 내가 광주분과에 배치된 것이다.
(민주화합추진위는 1988년 1월 11일 발족했다. 87년 민주화 물결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대통령의 군사정권이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에게 고스란히 이양됐다. 이에 노 당선자는 12.16 대통령선거과정에서 표출된 지역 간, 계층 간, 종교 간, 세대 간 갈등의 매듭을 풀겠다며 민화위를 만들었다. 민화위는 △민주발전 △민주화합 △사회개혁 등 3개 분과위로 구성해 광주민주항쟁과 관련한 화합책 및 대사면령, 5공화국의 부정 비리 대책과 권위주의 체제 종식을 목표로 했다. 편집자 주)
광주사태에 관한 서적 등 자료나 필름도 많이 보고 몇몇 증인의 증언도 듣는 등 일단 절차를 거쳤다. 그때까지 광주사태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폭도'를 '진압'했다고 하던 시절이다. 다루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광주분과엔 이강훈 선생이 계셨는데 그분은 독립투사 가운데에서도 원로 격인 분이다. 그 후 광복회장도 지냈다. 이강훈 선생은 광주 '의거(義擧)'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의거' 말고는 달리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당시 현홍주 의원이 노태우 당선자의 최측근 브레인이었다. 나는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랬더니 대학의 후배인 그는 "선배가 알아서 처리하셔야지요" 하고 언급을 회피한다. 난감했다. 마침 간사인 장덕진 씨는 전부터 친한 사이라 그와 상의할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결국 내가 '광주 민주화운동'이란 용어를 제시했다. '폭동'도 아니고 '의거'도 아니고 '민주화운동'이라는 다섯 글자로 된 개념규정이다. 사태를 다섯 글자를 써가며 규정한 것은 아마 처음일 것이다. 나는 '폭도'라고 하는 그 당시의 강경 군부와 '의거'라고 하는 민주운동 측의 중간지대에서 비교적 중립적인 개념인 '민주화운동'을 택한 것이다. 그때는 양비론(兩非論)이 나오다가 양시론(兩是論)이 나오는 등 의견이 분분할 때다.
머리가 좋기로 당시에 소문이 나 있던 장덕진 씨는 바로 동의해주었고, 광주분과와 민화위 전체회의도 달리 방도가 없으니 전혀 이의 없이 통과가 되었다. 민화위의 얇지 않은 보고서는 정중한 의식 절차를 갖추어 대통령 당선자에게 전달되었다. 세리머니 치고는 엄숙했다.
그런데 나는 민화위 보고서에서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이라고 정의한 것 말고는 무어 다른 게 있었는지 기억이 없다. 이 '민주화운동'이란 정의가 노태우 당선자에서 숨구멍을 터준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광주에서 무자비한 탄압(살육)을 감행한 강경 군부의 비위를 '민화위' 핑계를 대고 거슬리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이 '민주화운동'이란 기다란 용어는 지금까지도 20년 넘게 유지되는 불변의 정의다. 나는 이것도 프레임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인간사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정치의 영역에서도 언어는 큰 힘을 발휘한다.
④ 노동부 장관이 되었을 때 참 고민이 되었다. 그때 한국노총과 민주노총(당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全勞協))이 노동운동의 두 축을 이루고 있었는데, 한국노총은 중소기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민주노총은 대기업 현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복수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법제일 때라 한국노총만이 합법 노조고 민주노총은 불법 노조라고 했다. 더구나 민주노총을 위험시하거나 적대시까지 했다. 사갈시(蛇蝎視, 악독한 것을 보고 끔찍이 싫어함)란 표현 대로다. 정부, 노동부 안에서도 '빨갱이' 운운이 나올 정도였다.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이때 단위노조(기업체마다의 노조)의 복수 인정은 때가 이르다 하더라도 그 상위인 연합체에 있어서의 복수 노조 인정은, 그리하여 민주노총을 합법화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상위 노조 복수화의 프레임을 정한 것이다. 한국노총이 필사적으로 (생사 결단하듯이) 반대하는 것은 물론, 재계도 대단히 겁을 내고 있으며, 정부 안에서도 거의 모두 반대 입장이었다. (대통령도 주저했던 것 같다.)
노동부는 물론 정부 측 모두가 민주노총 측을 위험시하여 일체 만나지조차 않았다. 제네바에서 있은 ILO(국제노동기구) 총회에 민주노총과 함께 간 노동부 대표가 그들을 거기 가서까지도 외면했다니 그때의 분위기를 짐작할 만하다.
나는 청와대에 상위노조 복수화(複數化)를 설득하는 한편, 민주노총을 '불법 노조' 운운하는 관료들에게 '불법'이 아닌 '법외(法外) 노조'라고 호칭하도록 지시하고 민주노총 측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한국노총에서 나를 '빨갱이'라고 음해 공세를 한다. 그 험담이 정부 상층까지 갔으며 퍼지고 퍼져서 미국 대사관에까지 이르렀다. 하루는 찰스 카트먼 정무담당 참사관을 만나니 구면인 그는 "당신을 Red라고 말하고 있어"라며 걱정을 해준다. 그래 나는 "응, 그래. 나는 영화 <Reds>를 좋아하지"라고 농을 쳤다. 영화<Reds>(1981년 작, 워렌 비티 주연)는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되었는데 러시아 혁명을 다룬 <세계를 뒤흔든 10일간(Ten days that shook the world)>의 저자 존 리드의 생애를 영화화한 것이다.
여하간 민주노총 합법화를 위한 노력은 갖가지 고통만을 안긴 채 나의 재임 시절엔 성사되지 못하고 김대중 정권에 가서야 비로소 성사가 되는 어려운 과정을 겪었다. 김영삼 정권 말기에도 시도는 되었는데 그때 당 쪽의 이상한 사람들이 방해를 놓아 이른바 '노동대란'이 일어나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말에 큰 창피를 당하였다. 그때 공교로운 우연의 일치가 한 가지 있었다. 청와대에서 민주노총 합법화를 입안한 수석 비서관, 그것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킨 총리, 그것을 국회에서 받은 여당 대표 모두가 서울 법대 출신이고 그것을 파토 낸 당의 실무진도 또한 서울 법대 출신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노총(상위 노조) 합법화의 프레임은 참으로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⑤ 남북한 관계에 있어서도 나는 나 나름대로 프레임을 아주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남북 간의 군사적 대치와 긴장을 완화하여 평화 상태로 가는 것이 급선무다. 긴장이 완화되어 남북 간의 경계선이 거의 의미가 없는 상태가 되면 그때 통일에의 진입은 아주 손쉬운 일이 된다. 따라서 당면해서는 군사적 긴장 완화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군사적 긴장을 고조하는 일체의 언동을 안 하는 것이다.
<사회와 사상>이라는 한길사에서 잠깐 동안 나온 잡지가 있었는데 그 창간호(1988년 9월호)에 '현 단계 민족통일운동의 실천전략'이라는 특집이 있었다. 거기에 문익환, 김대중, 오충일, 남재희, 김낙중, 김중기 씨 등이 기고했는데, 나는 "경계선이 의미가 없는 상태"란 방안을 썼다.
나는 지금도 그런 프레임이 맞는다고 본다. 이러쿵저러쿵 통일 방안을 말하지만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요즘 쟁점이 된 NLL의 문제도 그런 방향으로 해결 방안을 생각해야만 한다.
지금 박근혜 후보 측과 문재인 후보 측이 다투고 있는 NLL 문제도 노무현 대통령 시대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두 당의 대북정책에 관한 태도의, 강경 또는 유연의 시금석과도 같은, 매우 중요한 논쟁인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남북한 간의 문제만이 아니다. 미·중·러·일의 국제적 관계 속에서 생각하여야 하는데 그 가운데 미국이 결정적이라 할 열쇠를 쥐고 있다 하겠다. 호텔에서 쓰는 마스터·키가 생각난다.
⑥ 차원이 다른 프레임을 하나 말해보겠다. 자기가 속한 정당·정파가 아닌 타(他) 정당·정파를 대하는 태도를 놓고서이다. 따라서 행태적(行態的) 프레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역사의 발전이 상이한 주장을 하는 세력들이 경합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관점이 중요하다. 그럴 때 타자에 대한 아량 있는 태도가 생길 수 있다.
구체적 한 예를 들어, 많은 주변 사람들이 진보정당을 경계하고 있고 더러는 위험시하고 있다. 근래에는 보수적 거대신문의 영향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 같다.
나는 그 진보정당이 당연히 있어야 하고 그들이 가능하면 원내 교섭단체를 이룰 수 있을 만한 상태가 될 때 우리 정치는 한 단계 수준이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하여 왔다.(그 진보정당이 내다볼 수 있는 가까운 장래에 집권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예를 들어 비례대표의 의원 수를 늘리는 문제(독일의 비례대표제 참고),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제(프랑스 경우 참고)를 채택하는 일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국민이 여러 계층으로 분화되는 시대이다. 특히 노동계층이 크게 증대된 시대이다. 이런 분화된 모든 부문의 국민들이 가능한 골고루 대표되는 게 옳다. 정국을 관찰할 때도 그런 프레임의 안목을 갖는 일이 필요할 줄 안다.
⑦ 87년 민주화운동 이후의 개헌 과정에서 나는 당내 개헌위와 국회 개헌위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때 김종인 박사가 역시 당내, 국회의 개헌안에 참여하여 오늘날에는 아주 유명해진 제119조 2항(경제민주화 조항)을 성안(成案)하여 넣은 것이다.
그 경과를 알고 있고 그 조항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명심하고 있던 나는 작년까지의 각종의 개헌 논의 세미나에서 그 조항을 삭제해야 마땅하다는 여러 사람들에 맞서 그 조항의 삭제는 불가하다고 고군분투하다시피 하였다. 아주 중요한 대화문화아카데미의 개헌시안 마련에서도 나는 핏대를 올리며 논쟁을 하였다. 여하튼 그 시안에 아슬아슬하게(?) 제119조 2항이 살아남았다. 오늘날 생각하면 대화문화아카데미가 체면을 구기지 않은 것이다.
오래 전 국회에서 내는 <국회보>에서 정치 회고담을 연재해 달라기에 한 회 분은 그 경제민주화 조항에 집중했다. 김종인 박사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그 성안 취지를 새삼 정리하여 설명해 달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도 그 중요성을 알고 취지를 정성 들여 써서 보내왔다. 그것이 <국회보>(2005년 1월호~2006년 6월호)에 "개헌…제119조 2항·헌재·편집권 독립"편으로 실리고, 나중에 책자로 나온 <아주 사적인 정치비망록>(민음사 펴냄)에 수록된 것이다. 그것이 제119조 2항에 관한 첫 번째의 그런대로의 자세한 설명이 되었고 그 후로는 그만한 설명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그 조항을 미국 의회에 관한 예에 따라 '김종인 조항'이라고 이름을 지어 그렇게 기록하였다. 새누리당에 들어간 김 박사가 경제민주화를 실현하느냐, 결과적으로 decoy(오리 떼를 유인하기 위해 호수에 띄워 놓는 나무로 만든 오리) 같은 것이 되고 마느냐는 두고 볼 일이다. 아무래도 이용만 당하는 것 같기만 하다.
경제민주화 말고도 복지의 문제가 있고, 노동의 문제가 있다. 그 세 가지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셋이 밀접히 연관된 하나의 테마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보는 학자들도 있다. 경제민주화에 복지가 포함되어 있으며 노사관계도 불가분의 문제로 연결된다.
우리의 임시정부 때부터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三均主義 : 정치의 균등(균정권), 경제의 균등(균리권), 교육의 균등(균학권))는 그 영향이 매우 컸다. 제헌 헌법에도 그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거기에 이익균점권의 개념이 있었다. 경제민주화는 그런 흐름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다. 새누리당의 김 아무개가 안철수 후보의 복지 논리를 마르크스주의라고 공격하는 판인데 또 무슨 흉측한 말이 튀어나올지….
내가 읽어본 <Economic Democracy>(1980)란 책에도 경제민주화에 복지·노사관계의 합리화 등이 포함되어 있다. 둘이 쓴 책인데 그 중 한 명은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교수다.
⑧ 이왕 프레임을 이야기하는 기회에 아주 오래 전의 일 하나를 추가하여 보자. 나는 1965년인가부터 강원용 목사의 크리스천 아카데미 운동에 참여했었다. 강 목사의 사회운동 방향이 올바르다고 생각되어서다.
1967년부터 68년까지 미국 하버드 대학의 니만 언론 펠로우로 1년간 가 있었는데 68년 학년 말에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의 저서<소용돌이의 한국 정치(Korea-The Politics of Vortex)>를 하버드 출판부에서 판매하기 전에 먼저 읽을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래서 그때의 소속 언론사인 <조선일보>에 신간 소개 서평을 즉각 보냈다.
귀국하여 얼마 후 강 목사를 만나니 박정희 정권의 압제가 점차 심해져서 프로그램이 마땅치 않다는 고민을 말한다. 그래서 헨더슨 책에 나오는 '중간매개집단'의 이야기를 하며 그것을 육성·강화하여 민주화에 기여하자는 의견을 말하였다. 중간집단엔 지방자치단체(그때에는 선거를 안 했다)가 가장 우선이고 각종 직능단체(예컨대 농협, 약사회, 의사회, 변호사회 등등)가 있는데, 헨더슨은 미국 국무부 관리 출신이라 그런지 몰라도 그 책에서 가장 중요한 노동조합을 언급하지 아니 하였다. 어떤 미국 학자의 서평에는 그 점을 특히 꼬집어 지적한 게 있다.
그리고 얼마 후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노동·농촌·여성·교회 등 분야에서 '중간집단교육'을 대규모로 시작한 것이다. 서울에서도 하고 수원의 연수원에서도 하였다. 나도 몇 번 가서 강연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의 의견을 받아들여 한완상 박사로 하여금 운동의 프로그램을 마련토록 하여 교육을 실행한 것이다.
그것이 1979년에 이른바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이란 대대적인 구속 사건이 된 것이다. 중앙정보부가 그 중간집단교육이 불온하다고 그 교육의 강사들을 일망타진했는데 간사 가운데는 한명숙(후에 노무현 정부 국무총리), 신인령(후에 이화여대 12대 총장), 이우재(후에 민중당 상임대표), 김세균(후에 서울대 교수) 등등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그 당시 국회의원이었는데 강원용 박사의 다급한 연락을 박고 박준규 공화당 의장과의 면담을 주선해 주었다.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혹 얼마간 막는 데 도움이 된지 모르겠다.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은 큰 사건으로 자세한 연구서가 있어야만 할 사건이다. 발단은 나의 헨더슨 책 이야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중간집단 이야기가 여하간 민주화를 위한 프레임이라고도 할 것이다.
지금 대통령 선거전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데 이 선거전에서도 프레임을 먼저 정하는 쪽이 유리하고 그 프레임에 뒤늦게 얽매이는 쪽이 불리하다. 그것은 국민에게 한 번 각인된 프레임을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느 신문 칼럼에 보니 프레임 선택을 전장(戰場) 선택에 비유했다. 싸울 장소를 선정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프레임에서 구체적인 정책을 이끌어낼 수 있다. 프레임이 정책 수립의 방향이 되기도 한다. 경제민주화의 프레임도 그렇고, 앞서 말한 이원집정부제, 군·민 연합, 광주 민주화운동 등등의 프레임도 역시 그렇다.
이상은 나의 경험담을 이야기 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성공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항상 시대에 맞다고 생각하는 프레임을 설정하고 생각하였기에 때로는 구체적인 정책(법안 등)을 만드는 관료들에게 방향을 제시할 수도 있었다.
정책 작성·법안 성안·예산 편성 등 대부분의 일은 관료들이 한다. 그것이 매우 전문화된 현대 사회의 실상이다. 의원들이 발의하는 안건들도 뒤를 살펴보면 대부분이 관료들이 밑 작업을 한 것들이다. 관료층의 비대, 관료국가화는 아무도 어쩔 수 없다. 다만 관료는 누구의 말마따나 "영혼이 없는 조직"이니 밖에서 프레임이나 패러다임이나 이데올로기로 혼을 집어넣어야만 하는 것이다.
* 오는 15일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가 주최하는 제3회 개혁리더십 가을 특강 2번째 시간에 발표될 원고로 주최 측의 양해를 얻어 미리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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