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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인내를 서로 시험하는 어리석음 피할까?

코리아연구원의 '아베 시대' 분석 <2> 북일관계 전망

2006년 8월 12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은 자신의 지역구인 야마구치 현 시모노세키 시에서 열린 후원회 모임에서 사실상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를 선언하면서, 전후세대가 책임을 져 간다는 기개(氣槪)를 가질 때가 왔다고 말했다. 9월 20일에 치러진 자민당 총재 선거에는 아베 관방장관 외에 아소 다로(麻生太郎) 외상,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 재무상 등 세 사람이 입후보했지만 아베 장관이 당선됐다.

전후 최연소 '전후세대' 총리

세 사람의 후보 가운데 전후세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1954년 9월 21일 생인 아베 장관뿐이며, 9월 26일에 개최될 중의원과 참의원 합동 본회의에서 제90대 총리에 취임하게 되면 만 52세로 전후 총리 가운데 최연소다. 노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일본에서 전쟁을 체험한 세대의 인구는 전체 인구의 20%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특히 국회의원들의 세대교체가 현저하게 진행되고 있다. 2004년 8월의 시점에서 소학교(초등학교) 재학 이상의 나이에 종전을 맞이한 의원의 비율은 중의원이 약 16%, 참의원은 약 23%에 불과하다.

1972년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실현했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는 그해 7월 총리가 되었을 때 54세였지만 1918년생이다. 또한 1993년 8월 소위 '55년 체제'가 붕괴하면서 등장했던 비(非)자민당 연립정권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는 55세에 총리가 되었지만, 1938년생으로 전후세대가 아니다.

최근 한일 및 중일 관계가 국교수립 이후 최악의 상태에 빠져버린 것은 고이즈미 총리의 계속된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그 뒤에는 과거의 침략전쟁이나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역사인식이나 향후 일본의 국가진로 혹은 국가상(國家像)을 둘러싼 인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여·야당에 관계 없이 전후세대의 젊은 의원들일수록 지난 전쟁에 대한 반성이나 책임의식이 희박할 뿐만 아니라, 자위대의 해외파견 등 국제사회에서의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과 헌법 개정 등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1995년에 전후 50주년을 맞이하여 자민, 사회 및 사키가케 등 연립3당이 중의원에서 '역사를 교훈 삼아 평화의 결의(決意)를 새로이 하는 결의(決議)'를 채택하려 하자 1961년 생인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중의원 의원은 3월 16일 외무위원회에서 자신과 같은 전후세대는 당사자가 아니라 반성할 이유가 없다고 반대의 뜻을 표명했다. 같은 해 8월 15일 무라야마(村山富市) 총리가 과거 전쟁에 대한 사죄담화를 발표할 때 자민당의 중·참의원 161명이 '종전 50주년 국회의원연맹'을 결성하여 반대했는데, 여기에 참여했던 5선 이하의 젊은 의원들은 1997년 2월 '일본의 미래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을 결성해 일본에서 역사왜곡을 주도하고 있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활동을 전면적으로 지원했다. 이 '젊은 의원들의 모임'은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현 농림수산상이 대표를 아베 현 관방장관이 사무국장을 맡았고, 2001년 6월 초당파 의원연맹인 '역사교과서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회장: 나카가와 쇼이치)으로 확대되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은 2001년 10월 테러대책특별조치법을 제정하고 해상자위대의 보급함과 호위함을 인도양에 파견했는데, 국회심의 과정에서 나타난 정부의 헌법해석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신세기의 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이다. 결성 당시 이들은 유사법제의 정비,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헌법해석의 변경, 방위청의 방위성 승격, 새로운 위협에 대항할 수 있는 방위력의 정비 등을 목표로 내걸었다.

이미 유사법제는 만들어졌으며, 이 모임의 결성을 주도했던 이시바 시게루(石破茂)는 2002년 9월 30일 고이즈미 내각의 제1차 개각에서 방위청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당초 89명이었던 회원은 170명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야당인 민주당의 마에하라(前原誠司) 전 대표를 비롯하여 79명의 민주당 젊은 의원이 참가하고 있는데, 안전보장 문제에 관한 한 자민당과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 사이에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없다 해도 좋을 것이다.

이들 정치가만이 아니라 일본 국민들의 안보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이 북한이다. 2002년 9월의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은 그동안 부인해 왔던 일본인 납치를 스스로 인정하고 사과했지만 일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정상회담 직후 북한을 방문했던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에게 북한이 핵개발 계획을 시인했다고 전해지면서 일본 국민들은 북한을 일본 안보에 대한 현실적인 위협으로 보기 시작했다.

지난 5년5개월 간 고이즈미 정권은 납치 문제와 핵·미사일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두면서 '대화'와 '압력'의 병용이라는 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해 왔는데, 이것은 전후세대 정치가들이 보다 전면에 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아베 체제 하에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보수와 혁신 간의 뚜렷한 이념적인 대립을 특징으로 했던 '55년 체제' 하에서와는 달리 자민당 정권 지지층과 민주당 지지층이 중복되고 외교안보 문제나 헌법 개정문제 등에 있어서 자민당과 민주당의 젊은 의원들 사이에 정책 상의 차이가 없다는 점이 대북정책에 어떻게 반영되어 나타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고이즈미 대북외교의 막후 조정자

아베 신조 체제 출범의 일등공신은 고이즈미 총리와 북한이라고 할 수 있다. 2000년 7월 모리 총리에 의해 관방부장관에 임명된 아베는 2003년 9월 자민당 간사장에 임명될 때까지 고이즈미 정권 하에서도 관방부장관을 역임했다. 이때까지 정치가 아베는 사실상 무명에 가까운 존재였는데, 그런 그의 대중적 인지도와 인기를 급격하게 높여주었던 것이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그의 강경한 자세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총리 취임 이전에 우정대신과 후생대신을 역임했던 자신과 달리 각료 경험이 없는 아베를 배려해서였는지 고이즈미 총리는 2005년 10월 아베를 관방장관에 임명했다. 관방장관은 내각의 수장인 총리를 보좌하여 중요 정책의 기획입안, 종합조정 및 정보의 수집과 조사 등을 담당하는 내각관방의 실무책임자다. 총리가 한 가정을 대표하는 가장이라면 관방장관은 집안살림을 도맡아 하는 안주인이라 할 수 있으며, 통상 관방장관은 총리와 거취를 같이했던 전례에 비춰볼 때 관방장관 아베가 총리가 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정권의 외교안보 정책은 기본적으로 고이즈미 정권의 그것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2001년 5월 17일 첫 번째 소신표명 연설에서 "미일동맹을 기초로 하여 중국, 한국, 러시아 등 근린제국과의 우호관계를 유지·발전시켜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미일관계를 제외하면 커다란 성과를 거뒀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총리 자신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중국과의 관계는 '정랭경열(政冷經熱)' 혹은 '정랭경량(政冷經凉)'이라고 표현되고 있으며, 지난해 3월 시마네 현 의회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 이후 한일 양국은 '각박한 외교전쟁'을 벌이고 있다.
▲ 2002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첫번째 북일 정상회담 장면. ⓒ 연합뉴스

반면 2002년 9월 17일 열렸던 북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두 가지 점에서 대북외교는 성과가 있었다. 하나는 북일 국교 정상화와 관련해 몇 가지 원칙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대북외교에 있어서 최대 현안이었던 일본인 납치 문제와 관련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일정한 진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명한 평양선언 제2항에서 일본 측은 과거의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했으며, 그대신 북한은 정상회담 이전에 있었던 11차례의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일본이 주장했던 내용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다. 즉 양국은 식민지 시대에 발생한 양국의 재산 및 청구권을 서로 포기한다는 기본원칙에 따라 국교정상화 후에 양국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기간 동안 일본이 북한에 대해 무상 협력자금, 저리 장기차관 및 국제기관을 통한 인도주의적 지원 등의 경제협력을 제공하며, 구체적인 경제협력의 규모와 내용은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협의하기로 했던 것이다.

정상회담에 앞서 북한은 일본인 납치희생자 가운데 8명이 사망하고 5명이 생존해 있다고 일본 측에 통보했으며,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은 일본인 납치 문제와 공작선 침투 문제에 대해 고이즈미 총리에게 직접 유감과 사과를 표명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으며 이것은 평양선언 제3항에서도 재확인되었다. 그 뒤 생존자 5명은 일본으로 귀국했지만 8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일본 내의 대북여론을 악화시켰다.

10월 말 재개된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은 일본이 납치희생자 가족의 조기귀국과 핵 및 미사일 문제의 해결을 강하게 요구하고 북한이 이에 반발하면서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2004년 5월 17일 두 번째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은 납치피해자 가족의 출국과 함께 일본 측이 제기한 행방불명자에 대한 재조사도 약속했다. 그렇지만 그 뒤 북한 측이 일본에 전달한 행방불명자에 대한 조사 결과와 요코다 메구미 유골의 진위를 놓고 양국 간에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납치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한편 고이즈미 정권 하의 일본정부 내에는 대북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대립이 있었는데, 시간의 경과와 함께 강경파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그 뒤에는 아베가 있었다. 고이즈미 총리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북한과의 비밀교섭과 예비교섭을 통해 첫 번째 방북을 성사시켰던 인물이 온건파의 대표격인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었지만, 아베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그는 밀려나기 시작했다.

2002년 9월의 정상회담 시 아베 관방부장관은 평양으로 가는 기내에서 평양선언의 내용을 처음으로 알았을 정도로 소외되어 있었지만, 첫번째 정상회담 후 납치희생자 5명이 일시 귀국했을 때 북한과의 신뢰관계를 위해 일단 북한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다나카의 주장을 누르고 잔류시키면서 영향력을 높여갔다.

납치피해자 가족의 귀국 문제가 난관에 봉착하고 2003년 1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 것은 아베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켰다. 5월에 예정된 미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본정부 내에서는 북한문제에 대한 대처방법을 둘러싸고 의견대립이 재연되었다. 다나카는 불필요하게 북한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면서 북한과의 대화를 중시하고 '압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주장했지만,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북한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대화'와 '압력'이 필요하다고 말해 아베의 손을 들어주었다.

또한 자민당의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외환법을 개정하여 북한에 대한 송금과 무역을 중지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외무성과 재무성은 물론 자민당 수뇌부조차 이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2003년 9월 아베가 관방부장관에서 자민당 간사장으로 발탁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아베 간사장은 자민당 내에 설치된 납치문제대책본부 본부장을 맡아 외환법의 개정과 납치희생자 가족의 조기귀국을 추진했으며, 여론의 강한 지지를 배경으로 소극적이었던 공명당과 야당 민주당이 입장을 바꾸면서 2004년 2월 개정외환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6월에는 만경봉호 등 북한선박의 출입을 막는 특정선박입항금지법이 성립한 데 이어, 중의원과 참의원에 납치문제특별위원회가 만들어져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가능하게 된 것도 아베의 이니셔티브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04년 5월 22일 두 번째 북일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그에 앞서 다나카와 그를 지지했던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은 정상회담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4월 28일 고이즈미 총리로부터 방북 의사를 전달받고 준비를 지시받았을 뿐이다. 후쿠다는 5월 7일 자신을 포함한 각료들의 연금 미가입과 미납 문제가 정치문제화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관방장관을 사임했는데, 표면적인 이유와 달리 제2차 방북을 둘러싼 고이즈미 총리와의 의견대립이야말로 후쿠다가 고이즈미 총리와의 결별을 결정한 진정한 이유였다.

납치피해자가족모임과 이들을 지원하는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협의회'나 의원연맹, 보수적인 언론들로부터 일본의 국익을 훼손하는 '친북 외교관'이라고 비난받았던 다나카는 2005년 외무성 정기인사에서 동기인 야치 쇼타로(谷内正太郎)가 사무차관으로 승진하자 외무성을 떠났다. 야치는 2002년 10월 납치희생자 5명이 일시 귀국했을 때 그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며 다나카와 맞섰던 인물로, 당시 관방부장관보로서 아베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다.

고이즈미 정권 말기의 대북정책에 있어서 아베의 입지를 결정적으로 부각시킨 것이 북한 미사일 발사시험이었다. 거듭된 사전경고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대포동 2호를 포함해 미사일 7발을 발사하자 일본정부는 일본의 안전보장과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 나아가 대량파괴무기의 불확산이라는 관점에서 이는 중대한 문제일 뿐 아니라 북일 간의 평양선언과 6자회담 공동성명 위반이라고 강하게 비난하는 아베 관방장관 명의의 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 만경봉호의 입항을 금지하는 조치를 비롯한 대북 제재조치를 즉각적으로 발표했다.

또한 일본은 유엔 안보리를 통한 대북제재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본은 평화에 대한 위협, 평화의 파괴 및 침략행위에 대해 비군사적 및 군사적 강제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유엔헌장 제7장의 내용을 결의안에 포함시키려 했지만, 7월 16일(현지시간 15일)에 채택된 안보리 결의안은 북한에 대해 미사일 관련 계획과 발사시험의 중지, 6자회담으로의 무조건 복귀와 조속한 이행 등을 요구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는 일본 안에 대해 한국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었지만, 그 과정은 국제사회에 일본의 존재를 어필하기에 충분했으며 아베 장관의 역할도 돋보였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징후 포착 이후 아베는 자신의 책임 하에 대책팀을 만들어 북한의 미사일 발사 가능성이나 의도, 일본의 대응방안 등을 다양하게 검토했으며, 일본 정부가 발표한 일련의 대북 제재조치는 대책팀이 마련한 9개 항의 제재조치에 입각한 것이었다. 또한 아베는 미일동맹의 굳건함을 보여주기 위해 발사 당일 아침 토머스 시퍼 주일 미국대사를 총리관저로 불러 협의하는 모습도 연출했다.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퓨 리서치 센터'가 조사해 2006년 6월에 발표한 바에 의하면, 15개 조사대상국 가운데 일본에서 가장 많은 46%의 국민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국가로 북한을 지목했다. 북한은 이번 미사일 발사 시험을 통해 납치문제 외에도 북일 간에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일본 국민들에게 심어주려 했는지 모르지만, 이번 미사일 발사 시험은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핵보유 선언을 했던 북한을 현실적인 군사적 위협으로 인식하게 하고, 동시에 일본정부의 대응을 주도한 아베의 위기대처 능력을 높이 평가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베체제 출범 이후의 북일관계 전망

총리가 될 때까지 외교문제에 관여한 적이 거의 없었던 고이즈미 총리와 달리 아베는 1982년 부친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 외상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1993년 중의원에 당선된 후 자민당 정무조사회의 외교부회(外交部會)에서 활동해왔으며, 강연회나 TV 출연을 통해 외교안보 문제에 관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온 만큼 충분한 지식과 논리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지난 7월에 출판된 아베 장관의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美しい国へ)>가 전체 7개 장 가운데 사회복지 문제와 교육 문제를 다룬 마지막 두 개 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5개 장이 정치외교안보 문제에 할애되어 있는 것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아베 신 정권이 해결해야 할 외교과제는 산적해있다. 우선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한국 및 중국과의 관계를 조기에 정상화해야 한다. 고이즈미 총리가 남긴 '부(負)의 유산' 중 하나가 야스쿠니신사 참배인데, 이 문제는 더 이상 일본과 아시아 국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도교재판 A급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일본정부가 도쿄재판을 승낙했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부정하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아베 장관은 총리 취임 이후 야스쿠니신사 참배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않지만, 최근 미 의회에서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두고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인사의 무덤에 헌화하는 것과 같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다음으로 북일관계인데, 일본인 납치 문제나 과거사 청산, 핵과 미사일 등의 안전보장 문제 등에 대한 양측의 입장차이는 뚜렷하다. 이것은 올해 2월 4일부터 8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린 정부 간 포괄협의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일본 측은 '납치문제, 핵과 미사일 문제의 해결 없이 국교정상화는 없다'는 기본방침 하에 생존자의 귀국, 진상규명 및 용의자 인도를 강력하게 요구한 데 반해, 북한은 납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는 종전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식민지 지배에 따른 과거사 청산 문제의 우선적 협의를 주장했다.

또한 북한은 요코다 메구미의 유골 반환과 함께 탈북자를 지원한 일본인과 재일동포 등 7명의 인도를 요구했으며, 6자회담으로의 무조건 조기복귀를 요구하는 일본 측에 대해서도 미국의 금융제재 해제가 6자회담 복귀를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반발해 협의는 평행선을 긋고 끝났다.

이제 1주일 후면 전후세대 출신의 첫 번째 총리가 일본에서 탄생되지만, 북일관계가 개선될 전망은 그리 밝지 못하다. 우선 북한은 유엔 가맹국 중 유일하게 일본과 국교가 없는 나라이지만, 현실적으로 일본이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일본의 외교안보 정책에서 북일관계가 차지하는 우선순위가 매우 낮다.

아베 장관이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과제는 헌법개정과 교육개혁이다. 아베는 현행 헌법은 '점령시대 뉴딜러'라고 불리는 진보적인 젊은 점령군 스태프들에 의해 10일 정도의 단기간에 만들어진 것이며 전쟁의 포기, 전력의 불보유 및 교전권의 포기를 규정하고 있는 제9조는 독립국으로서의 요건을 결여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일본에 부합하는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헌법 제9조의 개정 혹은 삭제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전수방위나 집단적 자위권의 불행사 등 전후 일본이 취해 온 안보정책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

헌법개정과 더불어 아베 장관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교육개혁이다. 전후 일본사회에 전쟁과 패전의 원인이 국가주의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강해 국가적 견지에서 사고하는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면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와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일본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족주의적 보수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1990년대 중반 이후 과거역사에 대한 일방적인 단죄와 자학사관의 극복을 주장하는 소위 '역사수정주의'나 전후세대 젊은 의원들의 입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특히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 장관을 지지해 온 전후세대 젊은 의원들은 조각 과정에서 중용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들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해왔을 뿐 아니라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에 소극적이라는 점도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더욱이 북한이 "평양선언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것은 미국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일본의 대북 적대시 정책 때문"이라고 비난해 왔다는 점에 비춰볼 때, 북한 미사일 발사 시험 이후 일본이 취해 온 일련의 대북 제재조치, 특히 공교롭게도 베이징 6자회담에서 공동성명이 채택된 지 1년이 되는 9월 19일에 결정된 일본의 대북 금융제재 조치에 대해 북한은 한층 더 비판의 수위를 높여갈 것이다.

아베는 자신의 저서에서 경제제재 조치는 북한의 정책변화를 유도하는 수단이지 제재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북한의 정권 핵심부에 자금이 유입되는 것을 막아 북한 내부에서 '화학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이 대북제재에 소극적이며, 미국에 의한 방코델타아시아은행의 북한계좌 동결 조치에 반발해 북한이 6자회담 복귀를 거부하고 미사일 발사라는 강수를 두었던 점을 감안하면, 북한에 대한 제재 확대가 추가적인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 등 북한의 또 다른 강경대응을 초래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또한 납치문제와 관련해서도 아베체제 출범 이후 납치피해자가족모임과 이들을 지원하는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협의회'와 같은 단체들의 요구가 더욱 거세질 것이다. 특히 이들은 북한이 일본에 밝힌 8명의 사망자가 '생존'해 있다는 것을 전제로 북한과 교섭할 것을 요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납치희생자 수도 일본정부가 공식으로 인정하고 있는 16명보다 훨씬 많아 460명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로선 일본정부가 확실한 증거 없이 이들의 주장에 동조할 가능성은 적지만, 이미 납치문제는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북한과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까지의 일본의 대북정책은 '대화'와 '압력'을 두 축으로 전개되어 왔다. 비록 일본의 대북 금융제재가 임기 만료를 앞둔 고이즈미 정권 하에서 취해진 것이라 후임 총리의 정치적 부담이 덜하다고는 해도 북일 간 대화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2001년 5월 고이즈미 총리가 취임 후 첫 번째 소신표명 연설에서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를 외교과제로 제시했던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堪忍袋の緒が切れる(칸닌부쿠로노 오가 기레루).' 인내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을 비유할 때 사용하는 일본 속담이다. 서로의 인내 주머니가 얼마나 큰지를 시험하는 것처럼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다. 북한의 핵이나 미사일 개발이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는 것 이상으로 9월 5일 나카소네 전 총리가 핵문제 연구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 것이 주변 국가들에게 안전보장 상의 우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덧붙이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 이 글은 코리아연구원(www.knsi.org) 특별기획 '아베체제와 동아시아' 2편으로 코리아연구원의 양해를 구해 전재한다(☞원문 바로가기). 코리아연구원은 2005년 연구자, 정책전문가, NGO 활동가 등의 연구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설립된 '네트워크형 민간 싱크탱크'로 정책대안 및 국가전략 제시를 목적으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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