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학교는 죽었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학교는 죽었다!

[황새울에 평화를! 릴레이 기고] 박후기 '대추초교를 위한 통곡'

학교는 죽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던 사랑과 평화도 죽었고, 교실 밖 우두커니 서서 떠나간 졸업생들을 기다리던 커다란 나무도 뿌리 뽑혀 죽었다. 와르르 건물이 무너질 때, 담벼락에 기댄 채 통곡하던 대추리 노인의 가슴도 무너졌다. 마치 망자의 하관(下棺)을 지켜보며 오열하듯, 먼지를 내품으며 폭삭 주저앉는 교실의 최후를 바라보며 노인은 발을 동동 구를 뿐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게 해달라는 간절한 부탁이 거절되고, 노인은 방패 앞에서 학교처럼 주저앉는다.

맨손으로 학교를 세웠다

앞마을 도두리는 간척지 위에 세워진 마을이었고, 비만 오면 물살에 휩쓸려 길이 끊기곤 했다. 땅은 질었고 학교는 멀었다. 황새울을 가로질러 도두리를 지나 다시 피난민촌 장단과 홍학사비(碑)가 있는 꽃산을 넘어야 비로소 학교에 닿을 수 있었다.

대추리 사람들을 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보릿고개, 배고픈 시절이었고 먹고 죽으래야 쌀 한 됫박 없었지만 십시일반 돈을 모아 땅을 구입했다. 그리고 우마차로 흙을 퍼 날라 운동장을 다져나갔다. 맨손으로 너른 갯벌을 간척해 논으로 바꾸어놓은 사람들이었지만, 5월 4일 학교를 내리찍던 굴삭기라도 있었으면, 논바닥에 뿌려진 볍씨를 갈아 업던 불도저라도 있었으면 좀 더 수월했을까? 그들의 손에 들여 있던 도구라고 해봐야 가래와 삽이 전부였다.
▲ 쌀 한 되 두 되 모아 만든 대추초교는 대추리의 역사고 자랑이었다. ⓒ 황새우울

1969년, 학교를 지어달라고 맨손으로 만든 학교 땅을 도교육청에 모두 기증했다. 이듬해 계성초등학교 대추분교가 태어났다. 대추리 도두2리(신흥) 내리 사람들은 진흙 구덩이 천지였던 운동장을 고르기 위해 모래를 퍼 나르고 자갈을 실어 날랐다. 학부형들은 부역을 해서 학교 담장을 세우고 우물을 팠으며 교내 사택을 지었다. 플라타너스며 미루나무 등 학교 둘레의 나무들도 주민들이 직접 구해다 심었다.

초창기엔 해마다 봄가을 운동회도 주민들이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치르기도 했다. 한때 학생 수가 300~400명에 이르러 본교로부터 분리되어 독립 초등학교가 되기도 했으니, 대추리 도두2리 내리 원정리 아이들이 미군부대 철조망을 따라 줄지어 학교에 오갔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미군 헬리콥터와 정찰기가 창틀과 책상을 흔들고 지나갔고, 가끔 바람에 밀린 낙하산이 운동장에 떨어져도 누구 하나 미군을 원망하지 않았다.

2000년 9월, 대추초등학교는 학생 수 감소로 폐교가 되었다. 30년 동안 총29회, 83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던 대추초등학교는 이후 두레풍물보존회가 '전통문화 체험장'으로 임대해 주민들과 함께 평화롭게 공유했다. 운동장은 온 동네 사람들의 앞마당이었다. 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사람들은 설날이면 이곳에 모여 징을 울렸고, 정월 대보름이면 멍석을 펴고 하늘 높이 윷가락을 던졌다.

학교가 죽던 날, 이 나라 미래도 함께 죽었다

2003년,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미명 아래 주한 미군의 성격을 북한 선제공격 및 중국을 겨냥한 '동북아 신속 기동군' 개념으로 바꾸는 논의가 진행되면서 전방의 미 제2사단 및 용산의 사령부 등 대부분의 주한 미군이 평택으로 집결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은 평택기지 확장 및 부대 이전 비용을 한국이 부담할 것을 요구했고, 노무현 정부는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와 도두리 일대 약 340여만 평의 땅을 미군기지 확장을 위해 매입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이때부터 대추초등학교는 '평화의 장(場)'이 되어 버렸다.

대추리 사람들은 손수 모래를 깔고 돌멩이를 골라내 만든 학교 운동장에 모여 깃발과 촛불을 들었다. 졸업생들은 이미 세상 속으로 떠났고, 남은 자들은 시골에 남아 농사나 지으며 살다 죽는 게 소망인 작은 마을에 검은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정부는 돈을 줄 테니 아무 소리 말고 떠나라고 했다. 땅을 재테크와 투기의 대상으로 만든, 미국에 할 말은 하겠다던 농민 출신 대통령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자기를 지지했던 농민들의 등 뒤에 칼을 꽂았다.
▲ 5월 4일, 대추초교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 프레시안

2006년 5월 4일, 경찰과 용역 그리고 광주항쟁 이후 최초로 군을 투입한 노무현 정부는 대추초등학교를 지키던 농민, 예술가, 노동자, 활동가들을 폭력으로 진압한 후 중장비를 동원해 대추리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깃든 학교를 순식간에 철거했다.

대추리 사람들은 방패에 가로막혀 망자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다. 맨손으로 힘겹게 일군 제 땅을 학교 부지로 선뜻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당장 자기 먹을 쌀도 없으면서 쌀 한 말, 보리 서 말 빚을 내면서까지 학교 건립을 위해 내어 놓을 수 있었던 그 마음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못 배운 게 한이 되는 나라에서 산다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배움만이 가난을 이기는 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화와 정의, 사랑을 가르치던 교정에서 노무현 정권은 무자비하게 폭력과 증오의 발길질을 해댔다. 미국을 위해, 그들은 교실을 깔아뭉갠 자리와 수백만 평의 논바닥에 사람 키 높이로 토사를 채우고, 30년 전 대추리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아주 단단하게 땅을 다질 것이다. 덕분에 이 땅의 어느 아름다운 산 한두 개가 사라질 것이고, 농민들이 쫓겨난 드넓은 평원 위에 활주로와 골프장, 그리고 멋진 미국식 주택이 들어설 것이다.

진흙 바닥에 학교를 세우며 모래와 자갈로 낮은 땅을 다졌던 대추리 사람들의 마음을 알 턱없는 경찰과 군인들이 늙고 지친 제 나라 농민들을 향해 주먹을 날리던 5월 4일, 학교는 죽었다. 이 나라 미래도 함께 죽었다. 학교가 죽던 날, 수많은 농민과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끌려갔다.

하늘에서는 철조망이 쏟아져 내렸고, 들판에서는 한 무리의 군인들이 진흙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우고 있었다. 굴삭기의 난동 앞에서 '책 읽는 소녀' 상과 철봉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30년 동안 쌓아놓은 희망과 인정이 와르르 무너져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꺼이꺼이 목 놓아 우는 노인 곁에서 경찰 간부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섭다. 어쩌다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되었는가? 같은 민족의 아픔을 즐기는 자들이여, 이 땅이 전쟁터가 되어 모든 집과 학교가 무너지는 날에도 당신들은 미소를 지을 것인가?

2006년 5월 4일, 학교가 죽었다. 이제 "세상의 모든 졸업생들은 과거로 돌아가는 길을 잊었느니"(필자의 시 「철봉은 힘이 세다」 중에서) 폐허가 그들의 과거를 대신할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