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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주의, 영국의 철학교수도 못 들어봤다는데…

[김제완의 '좌우간에']<11> 전명혜 교수의 체험적 증언

지난주 필자의 글 "노회찬 유시민의 봉숭아학당 놀이"가 나가고 나서 몇 분이 전화와 메일로 관심을 표해주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서양에서는 진보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 그리고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유럽 미국에서 유학하고 온 정치학 박사조차 진보주의라는 말을 잘 모른다고?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왜 지금까지 알지 못했나? 이런 의문이다. 상식적이고 타당한 의문이다.

독자들에게 무언가 부연설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몇 해 전 영국의 한인 대학교수와 주고받았던 글 하나가 떠올랐다. 개인적인 경험을 담은 자유로운 글이지만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글을 쓴 이는 영국의 한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강의하는 전명혜 교수이다.
▲ 서거 2개월 여 전 '진보주의 연구'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사람사는세상

전 교수와 필자가 진보주의를 주제로 토론한 것은 지난 2009년 7월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업인 진보주의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만든 "진보의 미래 2.0" 팀에서 연구편집위원으로 만나 인터넷 사이트의 게시판에서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때 그는 진보와 진보주의 용어가 영국에서는 어떻게 사용되는지 설명했다. 전 교수의 글은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그래서 구어체의 글이지만 가급적 손대지 않고 소개한다.

"우선 이 '진보'라는 단어 자체는 그냥 좋은 뜻을 가진 좋은 단어입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영국에서 이 단어는, 즉 'Progress' 라는 단어는 향상되다 혹은 진전을 보이고 있다는 등의 뜻으로, '내 발표 실력이 많이 향상되고 있다' 혹은 '나의 병이 호전되고 있다' 등의 문장과 관련하여 많이 언급됩니다. 그리고 저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영국인들이 이 단어를 가장 자주 접하는 문장은 아마도 기계 고장과 관련된 일일 텐데요. 기계관련 장치가 고장났을 때, 우리는 Technological progress가 진행 중이다, 라는 안내문을 수도 없이 받게 됩니다.

지금까지 제가 예를 들어 사용한 문장들엔 그 어떤 정치색도 없습니다. 그냥 좋은 결과를 기대케 하는 단어로 쓰였을 뿐입니다. 굳이 이 Progress라는 단어를 정치에 관련된 문장 안에서 사용해야 한다면, 예를 들어 '어느 나라가 지난 선거를 통하여 민주주의를 향한 발전(진보)에 첫 발을 내딛었다' 정도의 문장에 사용할 수 있겠는데요. 이 문장에서도 Progress라는 단어는 '발전'이라는 뜻의 단어로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정치색을 입히는 단어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towards democracy) 이라는 또 다른 단어가 사용됩니다."

필자의 앞선 글에서도 진보는 서양의 과학기술의 분야에서 주로 사용되는 단어라고 했다. 전 교수의 발언은 이런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전 교수는 progress에 이어서 progressive의 용법을 설명한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그조차도 이 단어를 정치관련 뉴스에서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정치분야에서 사용될 때조차 어떠한 정치색도 없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하지만 '진보적'이라는 단어로 즉 Progressive 라는 영단어로 한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진보'라는 사상을 번역할 때는 문제가 좀 더 복잡해집니다. 제가 이 단어를 가장 자주 접한 예는 혹은 제 생각에 많은 영국인들이 이 단어와 관련하여 사용하는 표현은 a progressive disease라는 병이 진행되고 있는, 그것도 주로 회복이 불가능한 불치병과 관련하여서이기 때문에, 좋은 뜻으로 다가오기가 힘든 단어일 수도 있습니다. 나쁜 뜻이라기보다는 문맥상 어두운 뜻이라 할 수 있겠죠. 그 외에 이 Progressive라는 단어를 정치관련 뉴스 등에서 들어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사용이 되었을 가능성도 분명 있습니다. 제가 모든 정치 뉴스를 귀를 세워가며 듣거나, 모든 신문을 읽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일부 사전에서 이 단어를 정치와 관련된 예문에서 사용한 것을 발견하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실생활에서 '빈도수'를 따졌을 때, 정치 뉴스를 즐겨보고, 대학에서 보낸 시간이 그토록 긴 저도 이 단어를 정치와 관련하여 사용했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고, 들어본 기억도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이 Progressive란 단어를 명사로, 즉 '새로운 사고와 사회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할 경우인데요. 이 명사의 사용과 관련하여서도 이 단어가 힘을 받으려면, 그 새로운 사고가 도대체 무엇인지, 어떤 변화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추가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Reformer라는 단어를 쓰던지요. 이 단어가 훨씬 일상 생활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입니다."

한국의 진보와 진보주의를 영어로 옮길 때 어떤 영단어를 선택할까. 당연히 프로그레스 프로그레시비즘을 선택할 터이다. 그런데 전 교수의 글을 읽어보면 이 영단어들에는 한국에서 사용되는 의미가 담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의 학자들이 외국에서 열리는 국제학술세미나에서 논문을 발표하거나 외국의 학자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 한국의 진보와 진보주의를 어떤 말로 번역해서 사용했을까. 무척 궁금해진다. 전 교수는 progress progressive에 이어 세 번째로 progressivism에 대해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Progress에서 파생된 단어로 Progressivism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저는 이 단어를 제가 이 한국의 '진보'라는 사상을 좀 더 공부하기 위하여 Youtube에서 시청한 시사토론 프로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이 토론에 참석하신 몇 분이 이 Progressivism이란 단어를 언급하며 '진보'사상 언급을 하셨는데, 사실 저는 조금 당황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이 제 연구분야 중 한 분야인데도, 제가 들어본 적이 없는 사상이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제가 아직 공부가 부족하고, 읽지 못한 책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아직 알지 못하는 사상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좀 이상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배움이 부족해도 철학을 하며 보낸 시간이 있는데 적어도 명칭은 들어봤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이 곳 철학과 교수와 학생들에게 이 사상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첫마디가 공통적으로 '무슨 사상?' 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상 이야기만 실컷 하다 말았는데요. 제가 알아본 바로는 (물론 제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이 사상이 확립되어 사용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 Progressivism이 철학에서 사용되는 경우는, 교육 철학과 관련하여서인 것 같습니다. 그것도 영국보다는 미국의 교육자들에게 주로 언급되어지는 사상이라면 사상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영국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진보주의를 "들어본 적이 없는 사상"이어서 "당황했다"고 말하니 그 말을 듣는 우리가 더 놀라게 된다. 필자의 앞의 글에서 언급한 홍윤기 교수도 서양의 어느 사회과학사전이나 정치사상사 개론서에서도 진보주의를 별도의 항목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이하다는 표현을 쓰면서 놀라움을 표했었다. 그 역시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온 사람이다.

"오늘 제가 친하게 알고 지내는 영국인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분들이 전부 교사로 정년퇴직을 하신 분들이셨고, 나름대로 정치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분들께 Progressive라는 단어 혹은 Progressive Party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제일 먼저 드는지 한번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자신들의 첫 느낌을 바로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분들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친숙한 표현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제가 Party라는 단어를 들어도 이게 정치 관련 용어라는 생각이 들지 않냐고 물었더니, 혹시 지금 Marxism을 이야기하는 거냐면서 그 당이 Communist Party냐고 하길래, 제가 그건 아니고, 고 노무현 대통령과 그의 '진보' 사상 등에 관하여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분들 중 일부는 노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한 이야기를 저에게 이미 이전에 들었던 분들입니다. 그러다 급기야는 그 집에 비치되어 있는 옥스포드 대사전을 들고와서 어떤 영단어가 가장 적합한 표현일지 토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전에는 Progressive와 관련된 동의어가 정말 많았습니다. 그 수많은 단어들 중 추천을 받은 명칭은 Liberal Advancement Party, Revolutionary Party, Reformation Party 등입니다.

저는 오늘 이 경험으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 분들이 영국 국민 모두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제 주위에 있는 분들을 통하여 오늘 제가 겪은 하나의 경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제가 다른 영국인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를 가졌어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 교수의 체험적 증언은 계속된다. 자신이 만나본 영국인들 중에는 진보와 진보당이라는 단어를 듣고 그들의 느낌을 바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평생 교사로 살아온 영국인조차도 옥스포드 대사전을 찾아봐야 했다. 그만큼 생소한 표현이라는 뜻이다. 한국인인 그가 서구 사회에서 거주하며 '진보'라는 한국어를 대하며 겪은 혼돈과 의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전 교수는 이 글에서 "제가 겪은 하나의 경험에 불과하다"고 말했지만 우리에게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소중한 증언이다. 공리공담이나 탁상공론도 아니며 게다가 현재진행형이다. 짧은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전명혜 교수가 이 글을 작성했던 즈음 100분토론에서 나왔던 전원책 변호사의 발언 한토막을 소개한다. "미국의 그 소위 진보, liberalism 하고 유럽의 progressive liberalism 하고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 우리가 흔히 좌파라고 번역하는 progressive는 미국에서 거의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100분토론 419회 2009년 5월14일 방영)

전 변호사는 이 토론에서 유럽의 진보와 미국의 진보는 다르다면서 그 차이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 요점은 미국의 진보는 liberalism이며 유럽의 진보는 progressive liberalism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progressive는 미국에서 쓰이지 않으며 유럽에서 사용되는 용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전명혜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이 말은 미국에서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사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 변호사는 어디서 progressive liberalism이라는 말을 보고 사용했던 것일까.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에도 이 용어는 나타나지 않는다. 도대체 출처가 어디인 것일까. 그 비밀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를 영어로 번역한 '콩글리시'임이 분명하다.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순수한 국산품 개념을 영어로 번역해 말함으로써 서양에서 통용되는 용어인 듯이 위장했다는 의심이 든다. 그게 아니라면 누구라도 반론을 해주시기 바란다.

외국에서 사는 한국인들에게는 한국사회가 아주 뚜렷하게 보인다. 그래서 그들의 눈동자는 우리사회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비춰주는 거울과 같다. 영국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한국출신 대학교수에게 진보와 진보주의는 그동안 듣지 못한 말이었다. 전명혜 교수가 느끼는 혼란은 고스란히 우리가 지어야 할 우리 몫의 짐이다. 진보 보수진영 할 것 없이 한자리에 모여 이런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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