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벽초 홍명희로 인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벽초 홍명희로 인해...

김민웅의 세상읽기 <93>

때는 조선 명종(明宗) 치하인 1560년대 전후로, 황해도를 시발점으로 평안도에 이르기까지 매서운 기세로 휩쓴 경기도 양주 출신의 '임꺽정(林巨正)'이라는 한 장쾌한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헐벗은 농민들과 한(恨)으로 가득 차 있던 천민(賤民)들을 규합해 양반세력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대하여 일대 타격을 주면서 '민중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실로 민중들이 서로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흐뭇한 유언비어(流言蜚語)'였고, 세상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하는, 칠흑 같은 밤에 본 건너편 산 위로 불시에 솟아오른 '봉화(烽火)'였습니다. 그의 부대는 관군(官軍)의 추격을 따돌리고 허를 찔러 산채로 복귀하는 데 성공한 '신출귀몰(神出鬼沒)의 전설'이었고, 아침결 무언가 낌새가 이상하여 문을 열고 내다보니 싸리문 안에 던져진 고맙기 그지없는 '쌀 한 가마니'였던 것입니다.

기존의 법과 질서로는 그가 한 일이 분명 도적질이었지만, 빼앗긴 것을 본래의 주인들에게 다시 돌려준다는 차원에서 임꺽정은 가난한 백성들로부터 '의적(義賊)'의 칭호를 얻게 됩니다. 홍길동(洪吉童), 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임꺽정은 조선의 3대 의적의 하나였으며 민중의 삶이 피폐해질 때마다 그들의 가슴에 초혼(招魂)하듯 불러들이는 절박한 기원(祈願)의 실체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백정(白丁)'이라고 해서 가장 천시 받은 무리에 속했는데, 본래 백정이라 함은 흔히들 생각하듯이 '소를 잡는 자'라는 뜻이 아니라 '손에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더 이상 뺏으려 해도 빼앗길 것도 없고 뒤로 물러서고자 해도 물러설 데가 없는 막바지 인생을 살고 있는 천민들의 현실이 바로 이 '백정'이라는 단어에 압축되어 있는 셈이었습니다.

그것은 희망이 없는 삶이었고,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며 권력 앞에서 언제라도 가볍게 희생될 수 있는 미미한 처지의 존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백정 임꺽정이 양반세력에 대한 공격의 선봉에 서서 민중반란의 중심 지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세상의 미력한 자들을 더는 업신여길 수 없으며 더는 함부로 짓밟을 수 없는 때가 오고야 말았다는 것을 뜻하게 됩니다.

이 시기, 조정은 연일 파벌쟁투로 혼란에 빠져들었고 지배세력은 온갖 명목으로 세를 거두어 가는 방식으로 민중들을 수탈했기에, 이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유랑민이 된 백성들은 도처에서 도적 떼가 되거나, 관군과 대적하는 농민군으로 발전하기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은 조선의 내부사정이 이렇게 무너져 가고 있었던 것에도 그 이유가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월에, 임꺽정의 활약상은 당연히 당시 조선조 지배층에게는 위협적인 사건이었으나 민중들에게는 이러다가 잘만 하면 새로운 세상이 올 수도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준 쾌거였습니다. 임꺽정 세력은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인해 결국 패퇴하고 말지만, 그와 관련된 온갖 야담(野談)과 같은 이야기는 민중들 속에 널리 퍼져 자신들을 약탈하고 억압하는 세상에 대한 저항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원천의 하나가 됩니다.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던 벽초(碧初) 홍명희는, 애초의 발걸음과는 달리 그만 민족의 배신자가 된 앞의 두 인물과는 다르게 민족적 진로에 평생을 걸었고 민중의 역사를 그의 문학 속에 거대한 기풍과 세밀한 묘사로 담아냅니다. 일제 강점기에 그가 조선일보에 발표한 대하역사소설 <임꺽정>은 진보적 민족주의 문학의 마르지 않는 샘터가 됩니다.

벽초의 <임꺽정>을 읽고 성장하여 훗날 <장길산>을 쓴 이 시대의 대표작가 황석영과 벽초의 손자이자 그 자신 또한 <황진이>를 쓴 북의 작가인 홍석중이 공동 집필을 통해 작품을 쓰기로 했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남과 북의 문인들이 "6.15 민족문학인 협회"를 구성해 문학을 통한 남과 북의 통일을 이루겠다고 다짐한 자리에서, 이들 두 작가가 벽초로부터 내려오는 문학적 맥락 속에서 하나가 되기로 한 것은 문학사적 기념비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듭니다.

역시 우리는 나뉠 수 없는 하나이며, 통일에 대한 민족의 염원을 위해 헌신할 때 이 시대를 사는 흥분과 열정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바입니다. 이 땅에 정녕 새 것이 태어나려나 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