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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노획 인민군 편지, 62년만에 주인을 찾습니다

[인터뷰]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엮은이 이흥환

한국전쟁이 터지기 보름 남짓 전인 1950년 6월 8일, 아내의 이름은 홍은애. 자강도 만포구 고산면 춘산리 제8반에 살고 있다. 수신인은 조선인민군 우편함 4630호의 남편 강득화다.

"조국을 위하여서 선봉대로 나선 봉석이 아버지는 그동안 편하지요. 나는 당신의 편지를 받아보았읍니다. (중략) 그리고 나는 편지를 바다 보고 영광으로 생각하면서도 한긋 생각하면 누물을 흘의면서 편지 보았읍니다. 그리 아를시오. 그리 나는 당신의 몸조심하기를 특기 부타합니다. 그리고 나는 칠월이 다처오면는 면해를 가계스니 봉석이 아버지는 요구되 것은 부타하시오. (중략) 나의 생각을 해줄 사람 없습니다. 당신 한나 받견 없읍니다. 해답 발이 해주시요."

'칠월이 닥쳐오면 면회를 가겠다'고 했다. 갔을까? 만났을까?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꼭 면회를 갔을 것만 같다. 그러나 편지를 쓴 '6월 8일'과 아직 '닥쳐오'지 않은 7월 사이에는 6월 25일이라는 날짜도 들어 있다.(19쪽∼21쪽)

60년 이상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 보관되어 있던 상자-조선인민군 우편함을 열자 "편지 뭉치 속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우편함을 연 사람은 미국 워싱턴 인터내셔널 센터(KISON, Korean Information Service on Net) 이흥환 선임 편집위원.

"인민군대 나간 남편에게 아내가 쓴 편지, 인민군 여전사가 고향의 어머니한테 쓴 편지, 아내에게 세간에 미련 두지 말고 빨리 피난을 떠나라고 다그치는 남편의 편지, 월북해 인민군이 된 아들이 전라도 고향의 어머니한테 소식도 못 드리고 입대해 죄송하다며 쓴 편지, 폭격 맞아 돌아가신 아버지 사망 소식을 '놀라지 말라'면서 함경도 누이에게 전하는 오라버니의 편지, 염치를 무릅쓰고 부탁드린다면서 속옷, 양말, 발싸개 등을 사가지고 빨리 면회와주십사 아버지한테 떼쓰는 인민군 특무장 아들의 편지, 어머니와 헤어져 평양 빈 집에 홀로 남은 아들이 고향 형한테 쓴 편지…" 등.

편지는 1950년 6.25전쟁 당시 미군이 북한에 진주했을 때 평양을 비롯한 북한 지역 전역에서 노획한 것이다. 미국은 이를 비밀문서로 분류해 놓았다가 1977년에 비밀을 해제하고 일반에 공개했다. 이미 국내에 소개된 편지도 있지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흥환 편집위원은 2008년 11월 이 편지들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 위원은 "편지를 읽다 보니 사연들이 구구절절했다"며 "6.25 한국전쟁을 개별사를 통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편지에는 개인의 희노애락(喜怒哀樂)뿐 아니라, 당시 전쟁사를 추측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많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공습'과 '추수'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 언급됐는데, 북한 주민들은 물론 인민군도 대규모 폭격에 떨었으며 가족들의 먹을거리를 걱정해 "(편지를) 고향에서 썼든, 전쟁터에서 썼든 항상 '추수'에 대해" 물었다.

이 위원은 "(비록 60여 년이 지났지만) 이제라도 수취인이나 발신인을 찾아 전달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편지를 선별해 지난 4월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로 묶었다. 사실 그는 책을 내기 전인 지난 2009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편지봉투에 쓰인 주소로 수취인과 발신인을 직접 찾아 나서기도 했으나 분단 60여 년이라는 세월은 과거의 흔적을 덮은 지 오래였다.

북한에 고향을 둔 월남인(越南人)이기도 한 그는 이번 책에 공개수록되지 못한 편지를 <프레시안>에 연재해 "'이산가족 찾기' 같은 '편지 찾아주기'를 하겠다"고 밝혔다. 62년만의 우편 배달,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다음은 지난 6일 <프레시안> 박인규 대표와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엮은이 이흥환 씨 ⓒ프레시안(최형락)

편지가 노획되다?

프레시안 : 책을 통해 공개한 편지가 1950년대 미국 노획된 문건인데 이 편지를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나.

이흥환 :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 내셔널 아카이브에 있는 문서군만해도 550개 정도가 된다. 그중에서 전문가들이 알고 있는 'RG242'라는 것이 '북한 노획 문서'이다. 지금까지 1200개 박스 분량 정도가 공개됐다. 사학자들이 보물 창고처럼 귀중하게 여기고 있다.

6.25 한국전쟁 기간이나 미군정 기간 동안 기록물을 남길 수 있는 형태가 못 됐기 때문에 미국 자료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연구자들이 정치·경제·군사·안보 분야는 발굴도 많이 하고 자료도 많이 나와 있지만, 개인사에 대해서는 아직 우선순위가 덜 한 것 같다. 현대사에서 빠진 부분을 메울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본다.

프레시안 : 이 편지는 어디서 노획된 것인가

이흥환 : 두 박스 분량, 2100통 정도 되는데, 미군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통해 북진하면서 노획한 것으로 보인다. 노획된 날짜가 대부분 그해 9월에서 10월 사이이다. 그 가운데 평양중앙우체국의 수취인이 찍힌 편지가 가장 많다. 그 외 함경도 같은 동쪽 지역 편지도 있지만, 지금 공개된 내셔널 아카이브 형태로 봐서는 어느 지역에서 노획된 것인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른 문서들과 같이 노획된 후 '사서'로 분류된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 노획된 편지를 다 읽었나. 책에 공개된 것을 몇 통 정도인가.

이흥환 : 2007년 말에서 2008년 초 이 편지들이 눈에 띄었다. 먼저 목록부터 작성하기 시작했다. 편지들을 읽다 보니 사연들이 구구절절했다. 사람들이 편지를 부치기는 했으나 받지는 못한 편지들이었다.

수취인이나 발신인을 찾아서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6.25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편지는 다 읽었다. 그리고 이전 것은 따로 분류해 놨다. 그 중에는 근하신년 같은 우편엽서, 모임 연락 문서, 세금 고지서 등 한 사람에게 200여 통이 보내진 것도 있다. 평양중앙우체국 소인이 찍힌 것도 아닌, 개인 편지이기 때문에 사신에 포함된 것 같다. 책에는 전체의 20분의 1 정도인 120여 통이 실려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전쟁 공포에 떨면서도 가족의 먹을거리 걱정

프레시안 : 미 국립문서보관소에는 여러 문서들이 있을 텐데, 편지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흥환 : 가족사에 얽힌 개인적인 동기가 있는데, 아버지가 해방 이전에 평북 정주에서 내려온 월남인이다. 작은아버지는 인민군이었다가 다시 북으로 올라갔다.

6.25 전쟁을 개별사를 통해 보고 싶었다. 우리나라 전쟁사는 거시 역사 중심의 군사(軍史) 형태가 많은데, 개개인들의 사연을 통해 현미경으로 보는 것처럼 볼 수도 있다. 편지에는 개인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많이 담겨 있다는 것 말고도, 개인 편지에서 당시 전사를 추측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많이 있다.

거의 모든 편지에 '공습'과 '추수'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9월과 10월경이기 때문에 편지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썼든, 딸이 어머니에게 썼든, 고향에서 썼든, 전쟁터에서 썼든 항상 '추수'에 대해 묻는다. '추수가 잘 되고 있다' 또는 '잘 되고 있느냐, 먹을 걱정을 없느냐' 등.

또 하나는 '공습'이다. '지금 폭격을 맞고 있는 중에 이 편지를 쓴다', '지금 폭격을 피해서 길을 떠났는데, 길 위에서 잠깐 앉아서 쓴다', '그쪽은 폭격이 어떠냐, 절대 움직이지 말아라' 등 상대방과의 공격이 한창인 와중에 편지를 썼다. 당시 전쟁을 치르던 개개인들이 자신들의 '목숨' 이전에 염두에 두었던 것들이 '공습'과 '추수(먹을거리)'라는 두 가지에 거의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프레시안 : 전쟁 당시 미국이 대대적인 공습을 통해 '평양을 석기시대로 돌려놨다'라고 자랑했다는데, 당시 북한 사람들이 느꼈던 공포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 같다.

이흥환 : 그렇다. 편지에는 당시의 공포가 그대로 묻어 있다. 일반적인 전사(戰史)에는 미국이 얼마의 포탄을, 어느 지역에, 어떻게 투하했는지 기록되어 있지만, 직접 피해를 당한 (평양) 시민들이 얼마만큼의 공포에 시달렸는지 등은 알 수 없다. 그런데 편지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공포를 느낄 수 있다.

낯설기만 한 북한 인민군,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

프레시안 : 책에 공개된 편지가 주로 북한 사람들의 것인데 사람에 따라서는 낯설게 느껴질 것 같다. 책에 나온 내용으로 항의한 사람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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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이흥환 엮음, 삼인 펴냄) ⓒ삼인
이흥환 : 편지에 '강도 같은', '원쑤의', '야수적인', '역도를 차단하고', '야만적인' 같은 표현이나 '조국전쟁', '해방전쟁', '정의의 전쟁' 등 북한식 용어가 곳곳에 등장한다. 그러나 이런 선전선동 문구나 정치적 색깔이 있는 문구를 일부러 배제한 것은 아니다. 다만, 책에 개인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선별 작업을 했다.

전쟁을 겪는 사람이 보는 전쟁에 대한 시각, 또는 전쟁에 희생된 가족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같은 인간 대 인간의 시각이 부각될 수 있는 편지들을 위주로 선별했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많이 받았다. 지금 40·50대는 일방적으로 받은 반공교육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10대와 20대는 전쟁 자체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다. 그들이 메일로 '당시 미군이 어떻게 북한에 가서 이 문서를 가져왔느냐', '모스크바나 중국의 동북 삼성에서 어떻게 편지가 오고 갔느냐' 등 당시의 지리적 이해가 없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들을 했다.

특히 '정말 인민군이 쓴 편지냐'와 같은 질문이 제일 많았다. '내가 아는 인민군은 편지를 쓸 만한 사람도 없고, 인간의 채취를 느낄 수 없는, 빨간색으로만 도배된 동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의 편지 아니냐'라는 내용이었다.

프레시안 : 책을 보면서 '북한 사람들도 전쟁의 공포나 고통을 많이 겪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할 말은 많아라. 불도 없고, 시간도 없다"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군대에서 상관의 통제 속에서 편지를 쓴 것 같기도 하고, 남쪽 사람이 인민군 밑에 있으면서 쓴 것 같기도 하다.

이흥환 : 편지 중 이런 내용도 있다. 부인이 남편에게 마지막 인사로 '끝으로, 악수…키스'라고 쓴 것인데, '악수하고, 키스하겠다'라는 표현이다. 또 1950년대 북한 지역에서 현재 젊은 사람들의 사랑 표현법 이상의 감정이 절절이 묻어나는 것도 있다.

당시 사람들과 상황을 구호나 정치적 슬로건보다는, 개별 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게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교과서에 편지 한 통이라도 실린다면, 한국전쟁을 이해하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표본이 없을 것 같다.

40·50대들을 포함해서 전쟁 후 세대에게 꼭 권하고 싶은 편지들이 많다. 북한이 내려와 남한이 잠시 해방구가 됐을 때 황해도 친구가 '(남쪽으로) 내려가니 거기 사정이 어떠냐'라며 충주인민위원회 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다. 위원장이 '와보니 여기 사정이 어떻다'라고 답장을 보냈는데, 제도권 내 역사교과서에서 당시 관료가 남한의 경제사정과 현지사정을 친구에게 편지로 전달했다는 사실을 본 적이 없다.

남북 이산가족 찾기 2탄, '편지 찾아주기'

▲ ⓒ프레시안
프레시안
: 책을 출판한 것을 계기로 수취인을 찾고 싶다고 들었다.

이흥환 : 일부 편지를 공개하긴 했지만, 공개 안 된 1000여 통의 주소록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언론기관이라든가 또 다른 형태의 출판물이든 공개를 해서 '이산가족 찾기' 같은 '편지 찾아주기'를 하려고 한다.

프레시안 : '1950년대에 쓰였으나, 62년 동안 배달되지 못한 편지를 지금에라도 배달하고 싶다'는 것인가.

이흥환 : 아직 한반도는 이념 대결 중이고, 분단 상태이기 때문에 수취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취인이 편지를 거절하더라도 그것 나름대로 '지금의 역사가 얼마나 풀리지 않은 역사인지'를 반증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산가족 찾기'라는 행사가 있었다. 생사를 확인해서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의미가 더 크겠지만, 생사 확인이 안 된 상태에서 보낸 편지들이다. 사실 수취인은 편지를 썼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당시 어머니, 아버지, 누이, 오빠가 편지를 썼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알게 되면 가족과 개인에게 의미가 깊다고 본다.

프레시안 : '전쟁으로 끊어진 가족 간의 끈을 이어주고 싶다'는 의미인 것 같다. 편지 봉투에 적힌 주소대로 수취인을 찾은 적도 있나.

이흥환 : 2009년에 전라도와 충청도의 세 곳 정도, 남한에 주소를 두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갔는데 못 찾았다. 1950년대 주소지와 지금 행정구역 명칭이 많이 바뀌었고 이미 돌아가신 분도 있겠지만, 혹시 자손이라도 살아 있을까 기대했는데 결국 실패했다.

인민군이 남한으로 내려왔을 때 남한 사람들이 인민군에 지원해서 북으로 갔었다. 그들이 주로 고향에 있는 어머니에게 '인사도 못하고 떠나서 죄송합니다. 저는 인민군에 포함돼서 북으로 올라와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강제든 자진입대든 그들의 편지 주소지는 남한이다. 그런데 아직도 일부 폐쇄적인 마을이나 가족들은 이런 일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한다.

편지 주인이 나타나면, 원본 반환 요청할 것

프레시안 : 앞서 언론기관 등을 통해 수취인을 찾고 싶다고 했는데, <프레시안>에 공개 안 된 편지를 연재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흥환 : 책에서 공개하지 못한 편지도 소개하면서 한편으로는, 주소를 지역별로-북한 지역의 평안도, 함경도, 남한 지역, 아니면 동북 삼성 지역, 소련지역 등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그러면, 편지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 만약에 편지 주인이 나타나면, 직접 편지 원본을 받을 수 있나?

이흥환 : 스캔된 편지 사본은 이미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편지 원본은 법적으로 미국 정부 소유물이다. 특히 내셔널 아카이브가 가지고 있는 문서가 다른 나라에 반환된 적이 한 번도 없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도 미국이 노획한 것이지만 다 사본으로 갖고 있다.

하지만 이 편지들은 개인들 것이다. 만약 <프레시안> 연재를 계기로 편지 주인이 한 명이라도 나타난다면 인도적 차원에서라도 원본을 받을 수 있게 정부에 요청해 볼 것이다. 시도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엮은이, 이흥환은?

<시사저널>기자로 베이징 특파원을 지냈다. 1997년 <시사저널> 퇴직 후,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 시거 아시아 연구센터 객원 연구위원으로 통일안보관련 자료를 번역, 한반도 안보관련 전문가들에게 뉴스레터를 보내는 KISON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는 현재 KISON의 선임 편집위원이다. 저서로는 <구술 한국 현대사>, <부시 행정부와 북한>, <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장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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