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변형으로 영화화된 <타잔(Tarzan)>은 1912년 “에드가 라이스 버로우즈(Edgar Rice Burroughs)”가 <원숭이들의 타잔/Tarzan of the Apes>이라는 원제로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 소설이 나온 1910년대의 미국은 쿠바, 필리핀에 이어 아이티, 니카라과 등 카리브해 국가들에 대한 식민지 지배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이른바 야만의 지역에 문명의 선도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시기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시대적 열기가 미국 사회를 채우고 있을 때 등장한 타잔 이야기는 서구 문명의 최정점에 서 있다고 여긴 미국의 자부심과 무의식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대중들의 열띤 관심과 흥미를 모았습니다. 백인 청년 타잔의 지혜와 용맹함은 아프리카 밀림으로 상징되는 야만의 땅에서 누가 과연 진정한 주역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대의 배경은 아프리카였고, 영국과 프랑스가 이 지역을 둘러싸고 식민지 쟁탈전의 각축을 벌였던 시점에서, 한 영국인 외교사절이 원숭이들의 습격을 받고 사망하고 남겨진 아이가 이들 원숭이 집단에 의해 길러지는 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백인 아이는 그렇게 문명과 단절된 상황에서 원시적 출발선에 섭니다. 동물적 감각과 본능의 차원에서 보면 그는 다른 원숭이들에 비해 모든 것이 불리한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타잔의 원작은 이들 원숭이 부족 내의 여러 가지 갈등과 권력관계까지 묘사하는데, 그것은 마치 아프리카 원주민 사회의 현실을 반영해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소년 타잔은 이러한 부족 내부의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에서 결국에는 이들보다 월등한 능력과 지혜로 살아남고, 마침내 이들 모두와 밀림 전체의 지도자가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백인 소년은 그 어떤 환경과 조건에 갖다 놓아도 지배자의 지위를 얻게 되어 있음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타잔은 단지 자신이 살아왔던 야만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친부모가 살아 있던 통나무집을 우연히 발견하고 여기서 문명의 흔적을 더듬어 이를 배우면서 이른바 야만의 현실에서 문명의 학습자가 되는 동시에, 서구와 아프리카 사이의 의사소통의 통로가 됩니다.
말하자면 그의 몸은 아프리카에 있었으나 그의 영혼은 어디까지나 서구문명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보다 깊숙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백인 여성 “제인(Jane)”의 존재였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의 현실에서 백인들의 아담과 이브인 셈이었습니다. 타잔과 제인은 여기서 말하자면 <문명의 원천>이었습니다.
타잔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서구 제국주의의 깃발이었던 이른바 “백인들의 짐(White man's burden)”, 다시 말해서 비서구 지역의 낙후한 현실을 일으켜 세워야 할 책임은 백인들에게 있다는 논리로 식민지 지배경영에 나섰던 역사의 한 반영이기도 합니다. 밀림에서의 소란과 갈등은 언제나 타잔의 외침 하나로 평정되었고, 그는 아프리카에서 서구 문명의 우월한 논리를 그대로 실현해나가는 존재로 부각됩니다. 20세기 초반, 미국은 타잔의 모습에서, 아프리카 밀림으로 상징되는 세계를 기이한 외침 하나로 평정해나갈 자신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은 흘러 이제 새로운 타잔이 등장하고 있는 듯 합니다. 더욱이 그건 원숭이 부족으로 불린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 더욱 주목이 됩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라는 일본 근세사의 사상가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벗어나 서구문명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주장했습니다. 일본은 서구인들이 경멸하는 원숭이들이 사는 아시아의 숲이 아니라, 이들이 자신과 마찬가지 인간으로 생각해줄 서구문명의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후 일본은 그렇게 해서 아시아의 백인이 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고, 그 과정에서 이웃 아시아 민족에게 말할 수 없는 재앙을 강요했었습니다. 그러다가 패전의 고통을 치렀고, 다시 미국의 우산 아래 바로 이 탈아입구에 주력해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노력과 충성이 주효한 까닭인지 전범(戰犯)의 역사를 뒤로 하고 오늘날 일본은 미국에게 “이제 그만하면 세계적으로 책임 있는 역할을 맡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칭찬을 받기에 이르렀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의 지지까지 받고 있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원숭이의 나라에서, 미국의 후원 아래 21세기의 타잔이 되고 있는 일본을 보면서 우리는 문명이 아니라 야만의 시대가 다시 새롭게 열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깊은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꼭 100년 전 이 나라는 일본의 손아귀에 공식적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로써 아시아는 평화를 상실하고 전란(戰亂)에 휩싸이는 암울한 서곡을 들어야 했습니다. 몸은 아시아에 있으나 그의 영혼은 제국의 군악대 소리에 취해 있는 일본의 오늘을 보면서, 모두가 자연의 생명을 갈구하는 밀림의 진정한 평화를 어떻게 확보해야 하는 것인지 거듭 생각을 다져야 하는 때가 아닌가 합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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