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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바디스, 경제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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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바디스, 경제 민주화

[남재희 칼럼] 대기업 쪽의 이니셔티브를 기대해 본다

경제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하는 학자로 우선 김종인, 정운찬, 유종일 박사 등이 눈에 띄어 그들이 이 어렵고 어려운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어떤 진영에 속해 있던 서로 협력해야만 할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었는데, 정말 공교롭게도 그들 모두가 일단 전선(前線)에서 물러나 앉고 말았다. 좀 엉뚱한 상상을 해 보면, 승천하는 용을 보고 '용이다' 하면 떨어져 또다시 이무기로 기다려야 한다는 동화처럼 된 것 같기도 하다.

김종인 박사(전 청와대 경제수석)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으로 복지와 경제민주화의 정책을 만드는 데까지는 일단 성공한 듯했으나, 새누리당의 국회의원 공천과정에서 그가 원하던 인물은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로 그가 경제 민주화에 역행한다고 지목한 세력들이 공천을 받는 심한 좌절을 겪고 비대위원을 물러났다. 물론 원숙한 정치인이라 박근혜 씨와의 연은 끊지 않고서이다. 나는 이용당했다고 본다.

유종일 박사(KDI 교수)는 정동영 의원이 그의 선거구를 인계하는 듯 보도되기도 하더니 바뀌어 서울에서 전략공천 한다거나 비례로 들어가는 듯도 운위되다가 이상하게 되었다. 그런저런 일도 있고 하여 박영선 의원은 최고위원직을 사퇴하는 항의를 하기도 했다. 유 박사의 튀는 성격 이야기도 있기는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근 정운찬 박사(전 국무총리)가 동반성장위원회의 위원장직을 씁쓸하게 사퇴한 것이다. 그는 '이익공유제'를 주장하다가 최대 재벌의 수장한테서 심한 표현의 한방을 먹고, 또 이어 당시의 소관 장관한테서 모욕적인 견제를 받는 등 난처한 처지가 되었는데 임명자인 MB는 전혀 '나 몰라라' 뒷받침을 하지 않아 고립무원 상태였다. 그래서 퇴임 회견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해체를 주장하기까지 한 것이다. "대기업이 경제 정의와 법을 무시하고 기업철학마저 휴지통에 버리길 서슴지 않았다"라고도 했다.

이 셋이 일단 일선에서 물러나는 모습을 보면서 <동아일보> 논설위원도 지낸 이론가이자 독설가로 유명했던 신상초(申相楚) 씨의 오래전의 말이 생각난다. 좀 엉뚱할지는 모르겠으나 어떻든 거대권력을 향한 말이나 글에 있어서는 기교 상 참고가 될 것 같다. 내가 신문사에 있으면서 중앙정보부에 너덧 번 끌려다니니까(그때는 법률적인 처벌 차원이 아니라, 군대의 기합주기와 같은 짓거리였다) 10여 년 선배인 신 씨가 하루는 술을 사면서 주의를 준다.

"남 형, 박정희 정권을 비판할 때는 말입니다. 우선 김일성 정권을 냅다 한참 맹렬히 공격하다가 그다음 박 정권을 비판해야 하는 거요. 그런데 박 정권만 비판하니까 당하는 게 아니오."

나는 신 선배에게 짚신 장사 아버지가 아들에게 죽기에 앞서서 "털, 털"하고 비법을 가르쳐주었다더니 "왜 이제야, 그 말을 하는 거요" 하였다. 짚신은 다 삼은 뒤 털을 깨끗하게 다듬어야 잘 팔렸다는 옛이야기다.

화법이나 필법의 기교에 있어서 약간 관련이 있다. 경제 민주화를 말할 때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니까 생략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시장경제·자유기업의 예찬을 한참 늘어놓고서 할 것을 그랬다. 누가 시장경제·자유기업을 부인하나?

그러나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면 안 된다. 출세하고 자리를 오해 유지하는 경제 전문가들을 보면 너무나 당연한 교과서 같은 그런 이야기들을 지루할 정도로 되풀이한다. 꾀에 있어서는 신상초 씨의 그것과 닮았다고 본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리스트도 지낸 재치 있는 논객 윌리엄·사파이어가 쓴 정치용어사전의 '출신계급에의 배반자(traitor to his class)' 항목을 보니 뉴딜정책이라는 미국 역사상 드물게 보는 개혁적인 정책들을 시행한 프랭크린·루즈벨트 대통령이 거명되고 있다. F·D·R는 그 당시까지 선출직으로는 미국에서 가장 부호인 것 같다는 것이다. 부자들은 개혁적이지 못하고 민중 편에 서지 못한다는 것이 통념인데 그가 그 틀을 깨고 아주 개혁적인 정책을 시행하였기에 그를 '출신계급에의 배반자'라고 하는 익살에 넣은 것이다.

F·D·R 말고는 온건개혁적인 부자 정치인으로 애버럴·해리만, 넬슨·록펠러, 그리고 로버트·케네디를 비롯한 케네디 가문 사람들을 들었다. 이른바 미국 동부의 리버럴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어째서 그런 개혁적인 부호, 개혁적인 부자 정치가 없는 것인지. 있는데도 모르고 지나친 것인지. 사회학에서는 부자가 3대 째가 되어야 차원 높은 가치에 눈을 돌린다고 말한다. 3대 째쯤 되면 돈벌이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도 눈을 뜨고 공공적인 가치를 위해서도 헌신하게 된다는 통계적인 이야기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그러한 단계가 아닌 것인가.

▲ 지난 1월 19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경제5단체장 간담회'에서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과 허창수 전경련 회장이 악수하고 있다. ⓒ연합
경제 5단체는 지난 3월 22일 대표들의 협의회를 갖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무분별하게 쏟아내는 '반기업 공약'에 대해 정부 측에 강한 우려를 표시했다." 또한 "인기에 영합하는 선거용 정책 공약을 자제하고 지속가능한 복지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한국적 현실에 맞는 정책을 낼 것을 촉구했다. "정치권의 무분별한 기업 비판이 기업가 정신과 경영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다"면서 "기업에 대한 근거 없는 비판을 자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23일 자 <서울신문> "정치권은 기업 때리기 중단하라" 인용)

대충 그런 경제 5단체 측의 반응인데 대체로 수긍할만한 이야기도 많이 포함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런데, 빠진 게 있다. 그들이 잘못된 현상들의 시정을 위해 개혁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들은 듣지도, 보지도 아니 했는가. 국민 다수가 그렇게 비판하고, 학자들이 방향을 제시하였는데도 그동안 진행된 경제 민주화 논의에 대한 재계 측의 답변을 찾을 수가 없다. 우리는 미국의 루즈벨트나 록펠러나 케네디와 같은 수준의 개혁적인 부자들을 가질 성숙단계가 아직 못되었는가. 서글픈 일이다.

"지배는 개인적이건 현실적이건 재산이다." 뛰어난 여성 정치이론가였던 한나·아렌트의 글에서의 인용이다. 이 재산의 문제는 정말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는 전문 학자들은 시장경제·자유기업 예찬론도 덤으로 전개하면서 재계를 구슬리며 경제 민주화의 합리적인 정책을 알기 쉽게 내세워야 한다. 함께 사는 세상의 이치를 말이다.

재계는 재계대로 그들이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하는 선을 제시해야 한다. '재계의 이니셔티브(Initiative, 주도권)'라고 불릴만한, 그리고 칭찬받을 만한 제시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스웨덴의 재벌들은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창의적인 상상력은 현상유지를 위협할 수 있다. 지금 힘을 가진 측은 그들의 주장한 특혜·특권이 박탈될까봐 이 현상 유지가 훼손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국민들이, 학자들이 경제 민주화를 주장할 때 재벌들이, 대기업들이, 재계가 뒷짐 지고 쉬고 있었다고 여기는 것은 참 낭만적이다. 그들은 치열한 자위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 현실적이고, 또한 사회과학적이다.

정당들은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 선거는 돈을 먹는 하마이다. 따라서 재계와 정당들 사이에, 재계가 원했건, 정계가 원했건, 무슨 일이 일어났겠는가는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비밀리에 진행되는 것이기에 당장 증거를 잡을 수 없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 밝혀질 것이다. 지금 무서운 흥정이, 음모가 진행되었고, 진행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재벌을 편드는 이론가 논객들이 마치 벌떼처럼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경계심을 갖고 이번의 선거 국면을 주시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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