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술(IT)과 엔터테인먼트(ET).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 두 산업은 서로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거리는 상극(相剋)지간이었다. 특히 ET쪽의 피해의식은 극에 달할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껏 정성들여 만든 컨텐츠들이 IT기술에 의해 불법으로 복제돼 퍼져나가는 바람에 피해가 막심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2년전 마이클 아이즈너 월트디즈니 CEO와 인텔의 레슬리 바다스 회장은 미 상원 청문회의장에서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이기까지 했다.
아이즈너는 “IT야말로 영화나 음악 컨텐츠의 불법 복제 확산을 부추기는 주범”이라고 몰아세웠고 바다스는 “ET가 새로운 디지털 세계를 다룰 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맞받아 쳤다.
그런데 청문회 후에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치열했던 양측의 치열한 입씨름이 슬그머니 수그러들더니 어느새 어깨동무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협력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IT기술혁신이 ET산업의 성장을 이끄는 견인차라는 점을 서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불법복제를 방지할 수 있다면 인터넷을 통한 영화나 음악 배달시스템은 컨텐츠 제막과 배급이 골칫거리였던 ET산업 입장에선 대박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 휼렛 패커드(HP)는 불법복제 방지 기술을 개발해 워너브러더스(WB)로부터 인증을 받음으로써 상생의 길을 텄다. 매킨토시 컴퓨터로 유명한 애플. 하지만 지금 애플은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iPod가 주력제품이다.
IT와 ET간의 상생은 협력, 합작투자, 전략적 제휴 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작년 HP는 애플의 iPod 기술을 디지털음악 플레이어기술로 인증했다. 아울러 스타벅스 커피점에서 CD를 구울 수 있는 서비스를 시작했고, 로버트 레드퍼드의 선댄스 영화제엔 재정과 노트북 컴퓨터를 지원했다. 칼리 피오리나 HP 회장이 선댄스측으로부터 ‘예술부문 감투상(RiskTaker in the Arts)’을 받은 것도 이 덕분.
한술 더 떠 피오리나는 지난달말 미국 라스베이가스에서 개최된 전미 방송 컨벤션 개막연설에선 “컨텐츠가 관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만장했던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은 피오리나의 진부한 구호에서 IT와 ET의 상생 가능성을 재확인했다. HP는 이 행사에서 애니메이션 비용을 엄청나게 절감할 수 있는 신기술을 공개했다. WB와 필름 복원기술 및 제작후 기술을 공동 개발하겠다고도 밝혔다.
애플 컴퓨터도 새로운 특수 효과 프로그램과 최신 버전의 편집 기술을 선보였으며, 마이크로소프트(MS)는 HD-TV컨텐츠를 실시간에 편집 방송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빌 게이츠는 자사의 인터넷 포털인 MSN으로 비디오 게임, 음악, 디즈니 영화 등을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아울러 메이저 영화사들의 영화를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무비링크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두 산업의 이같은 로맨스는 물론 한 순간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스티브 잡스 애플 CEO는 양 산업이 서로 으르렁거릴 때도 믿음직한 행동으로 신뢰를 쌓았다. 그 결과 그는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에 관한 선구자는 아니었지만, IT부문에서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부터 구애받은 첫 IT부문 CEO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상생은 신뢰에서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가 여기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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