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인의 두 아들이 미군에 사살 당했다는 7월 22일, 뉴욕의 증권시장은 다우 존스, 나스닥 둘 다 상승세로 마감했다. 이웃집 증권맨 리처드는 맥주를 한잔 사겠단다. 그와 마주 앉아서 아프리카 라이베리아 미군 파병을 어떻게 여기느냐 물어보니, 손을 내젓는다. "1993년 소말리아 짝이 날텐데, 석유가 나는 쿠웨이트나 이라크도 아니니 이득 없는 비즈니스를 왜 하려 드느냐"는 것이다. 미국이 외면해온 서부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라이베리아와 시에라 리온의 내전, 이와는 대조적인 2차에 걸친 걸프전쟁은 '슈퍼 파워' 미국의 군사개입이 지닌 본질적 성격을 드러낸다. 즉 "석유 등 국가이익이 있어야 파병한다"는 기본원칙을 보여준다.
<사진 1> 미 대사관 앞에 시신을 모아놓고 미군 개입 늑장을 항의하는 몬로비아 주민들(뉴욕 타임스)
***시에라 리온-라이베리아 처리의 공통점**
1980년대 말부터 지금껏 20여만명의 희생자를 낸 라이베리아 내전은, 마찬가지로 20만 희생자를 낸 이웃 시에라 리온 내전과 깊이 연결돼 있다. 비전투원(민간인)의 손목을 도끼로 내려치는 것으로 악명 높은 시에라 리온 반군 혁명연합전선(RUF)으로부터 라이베리아 독재자 찰스 테일러는 다이아몬드를 사들이고, 그 대신 무기를 대주어왔다. 그 자신 반군 출신으로 1997년 정권을 잡은 테일러는 시에라 리온 내전을 부추긴 혐의로 지난 6월 유엔이 후원하는 시에라 리온 특별법정에서 '전쟁범죄자'로 기소됐다.
국제법 측면에서 보면, 시에라 리온 내전은 잔혹한 전쟁범죄행위자들에게 평화협정과 사면이란 절차를 통해 면죄부를 주었다가 2000년 봄 다시 내전이 격화됨에 따라 이를 취소한 특이한 기록을 지니고 있다. 내전 과정에서 포데이 산코가 이끈 반란군 RUF는 비전투원(민간인)들의 손목을 도끼나 칼로 마구 내리쳐 자르는 잔혹행위들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미국은 군사적 개입은커녕 유화책을 펴기에 급급했다. 1999년 로메 평화협정 체결과정에서 클린턴 미 대통령은 제시 잭슨 목사를 특사로 파견, 반군 지도자 산코를 설득했다. 내전 중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한 백지사면은 평화협상 과정에서 RUF 반군 지도자 포데이 산코가 처음부터 고집스레 요구한 사항이었다. 협상이 막바지 진통을 거듭하자, 클린턴은 산코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나말고 어떤 반란군 지도자가 미국대통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나?"--2000년 봄 필자와의 현지 인터뷰에서 산코는 그런 사실을 자랑삼아 언급했었다.
이를 두고 국제적인 비판 여론이 일어났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의 '아프리카 내전의 아프리카식 해법'이냐?"는 비판이었다. '싸구려 평화'를 구하려고 나쁜 전례만 남기게 됐다는 지적도 제기됐다.'싸구려 평화' 지적은 그 뒤 현실로 나타났다. 반군들은 사면만 받은 채 무장해제를 거부했고 평화협정 1년도 안 돼 급기야 영국군의 시에라 리온 파병까지 불렀다. 현재 전세계 유엔평화유지군 3만7천명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1만4천7백명)가 파견돼 있는 시에라 리온은 다행히 평화를 되찾아가는 중이다.(이와 관련, 필자가 월간지 <신동아> 8월호에 쓴 '세계분쟁지도-시에라 리온' 글을 읽어보길 바란다).
지난 7월초 부시 미 대통령은 5박6일의 짧은 일정으로 아프리카에 갔을 때만 해도 그는 '아프리카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곧 미군병력을 라이베리아에 보낼 듯이 말했다. 그러면서 예비조사단을 파견했었다. 내전에 지친 많은 라이베리아 주민들은 "이제야 평화가 오는가 보다"며 기대를 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미군 파병은 말뿐, 차일피일 미뤄져만 왔고 수도 몬로비아 공방전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죽임을 당해왔다. 기본적으로 럼스펠드 미 국방이나 파월 미 국무나 라이베리아 파병 뜻이 거의 없다. 파병에 따른 이렇다 할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시에라 리온 유엔특별법정에서 '전범'으로 지목된 테일러가 나이지리아로 망명한다면, 굳이 그를 붙잡지 않겠다는 투다.
<사진 2> 내전의 총격전에 휘말려 죽은 딸을 메고 가는 아빠 AFP
부시행정부의 라이베리아 파병 결정이 뒤로 늦춰지는 것을 두고 유럽의 국제정세분석가들은 "라이베리아에 석유가 많이 난다면, 상황은 벌써 달라졌을 것"이라 지적한다. 7월 21일엔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 미 대사관에 반군이 쏜 것으로 믿어지는 박격포탄이 날아들고, 몬로비아 주민들이 숨진 주검들을 미국 대사관 밖에 늘어놓으며 미군 파병을 요구하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부시 미행정부는 걸프지역 미군 4천5백명을 지중해로 이동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라이베리아로의 이동이 아니다. 지중해에서의 대기일 뿐이다. 미국의 중도우파 언론 <워싱턴 포스트>도 답답했는지, 7월 22일자 '거부된 라이베리아'란 제목의 사설에서 (2000년 봄 라이베리아 이웃 나라인 시에라 리온 내전 당시 반군 혁명연합전선 RUF가 수도 프리타운을 넘볼 때 7백명의 영국군이 파병돼 안정을 찾았듯), 그저 몇백명 정도 라이베리아로 파병하면 사태가 가라앉을 터인데, 왜 안 보내느냐는 투로 질책했다.
***아프간 지식인들, "9.11이 터지지 않았다면..."**
2002년 1월 아프가니스탄 현지취재를 갔을 때 만난 카불의 지식인들은 미국을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9.11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미국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아프간 내전을 구경하고 있을 것"이란 얘기들이다. 80년대 냉전시대에 옛소련군을 상대로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울 때 미국은 중앙정보국(CIA)을 통해 군수물자를 대주었다. 그러나 옛소련군이 물러나고, 곧이어 아프간 정부가 해체되는 운명을 맞자말자, 미국은 전략적 이용가치가 없어진 아프간을 떠나버렸다. 그 힘의 공백 속에 각 무장세력들끼리 다시 내전이 벌어졌고, 빈 라덴은 내전의 승자인 탈레반 정권의 비호 아래 9.11 테러공격을 기획한 모습이다. 23년 내전을 겪으면서 "한 나라의 대외정책은 다름 아닌 국가이익에 바탕해 결정된다"는 현실논리를 온몸으로 터득하고 있는 아프간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미국이 언젠가 아프간의 이용가치가 없어지는 날 이곳을 떠날 것"이란 생각들을 품고 있다.
아프간에서 그러했듯, 미국은 지난 냉전 시절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나라에는 '자유민주주의 수호' 또는 '인도적 지원'이란 명분 아래 군대를 보내고 경제원조를 퍼붓다가, 이용가치가 없어지거나 국내여론이 나빠지면 두말 않고 돌아서길 거듭했다. 만성적인 가난과 내전, 그리고 AIDS에 고통받는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도 아프간과 비슷한 역사적 고통을 겪어온 나라들이 여럿 있다. 80년대 냉전시대에는 미국의 도움을 받았다가 그뒤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버림받고, 내전의 회오리에 온 나라가 엉망진창이 된 나라들이다. 소말리아와 앙골라가 그 대표적인 보기다.
앙골라는 35년 넘게 만성적인 내전에 시달리는 동안 50만명 이상이 숨지고 인구의 3분의 1쯤인 4백만명의 난민을 낳았던 불행한 나라다. 내전은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았던 집권당 앙골라인민해방전선(MPLA) 대(對)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군 앙골라 완전독립민족연합(UNITA) 사이의 유혈투쟁이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옛 소련이 붕괴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미국은 (90년대 초의 아프가니스탄과 마찬가지로) 이용가치가 없어진 앙골라에서 손을 뗐고, 그 뒤부터 사빔비는 어려운 싸움을 벌이다 지난해 초 전투 중에 사망했다. 이즈음 앙골라는 35년 만에 평화의 빛이 찾아드는 중이다.
<사진 3> 시에라 리온 내전에서 반군들에게 붙잡혀 도끼로 손목을 잘린 두 형제.(김재명)
소말리아도 1980년대 말까지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나라다. 미국의 중동 석유수송 해역인 아덴만(Gulf of Aden) 가에 자리잡은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이다. 1960년 독립된 뒤 소말리아는 소련의 우방이었으나, 경찰간부였던 모하마드 사이드 바레가 6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군사독재를 펴면서 70년대엔 친미 쪽으로 돌아섰다. 각종 무기원조와 더불어 군사 고문관들이 80년대 소말리아로 밀려들어왔다. 가난한 소말리아 경제는 미국의 원조가 젖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되자, 이용가치가 없어진 소말리아의 독재정권을 미국은 더 이상 돌보지 않고 철수해버렸다. 아프간에서 물러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소말리아에 남은 것은 60년대 소련제 무기와 그 뒤 들어온 미제 무기들뿐이었다.
가난한 소말리아에 남은 몇 줌의 자원을 둘러싸고 부족들 사이의 내전이 터지면서 시아드 바레 정권은 91년초 무너졌다. 때마침 불어닥친 기근과 더불어 소말리아는 중앙정부가 없는 이른바 "실패한 국가"로 전락했다. 소말리아 사람들 눈에는 이 모든 불행의 씨앗을 미국이 뿌린 것으로 비쳐졌다. 92년말 유엔 식량차량들이 소말리아에서 반군들에게 탈취 당하는 사건들이 일어나자, 당시 부시(아버지) 대통령은 이른바 '인권 차원의 개입'을 내세우며 소말리아에 2만이 넘는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소말리아 인들은 "미국은 인권을 말할 자격이 없다"며 코웃음 쳤다. 소말리아가 불안해지면, 아라비아에서 미국의 석유자원 수송이 위협받을 수 있다. 미국의 국가이익을 위해서 냉전 직후 팽개쳤던 소말리아에 다시 군대를 보낸 데 지나지 않는다고 소말리아 인들은 꿰뚫어보았다.
파병 다음해인 1993년 10월 미군 특수부대인 레인저(Ranger)와 '특수부대의 특수부대'라 일컬어지는 미 최정예 부대 델타 포스(Delta Force) 병력이 군벌 모하마드 파라 아이디드의 핵심참모 두 사람을 잡으려다 18명의 희생자를 내자,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마무리도 짓지 않은 채 그 다음해에 군대를 물렸다. 기근에 시달리던 수백만 소말리아 인들의 목숨을 기근과 내전의 공포로부터 보호하겠다고 나섰다던 '인도적 개입' 논리는 18명 미군병사들의 죽음이 있고 나서 쑥 들어갔다. '냉전시대 독재정권 지원→ 냉전 해소 뒤 지정학적 이용가치 소멸→ 철수'라는 냉엄한 미국의 국가이익 논리가 싹을 틔운 반미 감정들이 모가디슈 시가전에서 그토록 치열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고 보아진다.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의 씁쓸한 체험은 미국으로 하여금 바로 다음해인 1994년 르완다에서 일어난 80만 규모의 인종학살(다수족인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 학살)을 강건너 불보듯 하도록 만들었다. 당시 국제적인 여론은 미국이 국제평화유지군을 파병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팔짱만 끼고 구경만 했고, 미 여론도 르완다를 모른 체 했다. 입으로는 자유와 민주를 말하면서도 미 국민의 인명손실이 생겨날 경우 어떠한 대의명분도 외면당했다고 보면 정확하다. 사실 이는 미국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90년대 전반기 스페인 정부는 자국군인 17명이 보스니아 내전에서 사망하자, 더 이상의 인명피해를 두려워한 나머지 군을 철수시켰다. 벨기에 정부도 94년 르완다 내전 초기에 개입했다가 같은 이유로 곧 철수했다. 이 두 국가는 자국 군인의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국내여론의 철수 압력에 부딪쳐 그런 결정을 내렸다.
***파월 독트린, "이익 분명해야 개입"**
미국의 역사를 보면, 미 외교정책에서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와 고립주의(isolationism)는 항상 충돌하는 개념이다. 베트남 전쟁 뒤인 70년대 중반엔 고립주의가 힘을 얻었고, 미 여론은 투입비용 대 산출이익(cost-benefit)을 따지는 경향이 늘어났다. 미국 외교정책의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헨리 키신저는 그의 신간 "미국은 외교정책이 필요한가"(2001년)에서 오로지 인권차원의 개입을 반대하고 있다. "'미국이 얻는 이득이 비용(희생)보다 훨씬 크다는 확신을 미국민 다수가 가질 때만이 미국의 개입 독트린(doctrine of intervention)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만약 미국의 이해관계가 걸프전에서의 중동 석유처럼 명확하다면, 여론은 미 행정부의 군사적 개입결정을 지지할 것이란 논리다. 개입으로 얻을 미국의 이득이 애매 모호하거나, 자살폭탄트럭으로 2백명 넘는 미 해병이 죽음을 당했던 레바논 개입(1983년)이나, 앞에서 살펴본 소말리아 개입(1993년) 경우처럼 심각한 인명손실이 생겨날 경우 여론은 악화되고 미군은 철수했다.
미 지도자들도 베트남전의 영향으로 미국의 대외 개입은 미국의 국가이익에 결정적일 경우에 한정돼야 한다는 생각들을 품어왔다. 이같은 생각들을 하나의 논리체계로 정리한 사람이 콜린 파월(미 국무장관)이다. 걸프전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콜린 파월은 격월간 외교평론지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 1992년 겨울호)에 기고한 '미 군사력, 당면한 도전'이란 글에서 "외부에의 군사적 개입은 인권 차원의 선한 일을 하면서 그 선(善)이 미국인의 인명 손실과 비용(희생)을 훨씬 능가하는 경우에 한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현재 미 군부에서 파월 독트린이란 이름 아래 하나의 군사교범으로 정리돼 있다.
파월 독트린은 다음과 같은 4가지 주장이 그 뼈대를 이루고 있다. 첫째, 무력 개입은 최후의 수단으로 쓰여져야 한다. 외교적 그리고 경제적 수단을 동원해 분쟁을 해결하려다 끝내 실패로 돌아갔을 경우에 한해야 한다. 둘째, 무력 개입은 분명한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경우에 한정돼야 한다. 여기에는 베트남전 개입이란 쓰라린 역사적 체험이 바탕에 깔려 있다. 셋째, 무력 개입에 투입된 병력의 철수 시점이 분명한 경우에 한해 무력개입을 해야한다. 파월 독트린은 다시 말해 무력개입을 했을 경우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분명히 측정될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걸프전의 경우, "쿠웨이트를 이라크 군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목적이 분명했고, 따라서 목적이 이뤄진 경우 즉각 철수가 가능했다. 넷째, 일단 무력 개입을 하기로 했다면, 엄청난 힘으로 상대를 압도해야 한다. 베트남전과 걸프전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파월 독트린의 뼈대를 이루는 역사적인 교훈이다.
파월 독트린의 핵심은 비용(희생) 대 산출(이익)의 냉정한 계산이다. 미 정치학자 리처드 하스(브루킹스 연구소 부소장)는 "개입, 탈냉전 시대 미 군사력 사용"(1999년판)에서 "군사적 개입으로 비용(희생)을 압도할 만큼의 국가이익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을 때만이, 그리고 다른 가능한 여러 정책보다 외부 개입이 훨씬 더 많은 이득을 가져다준다고 예상될 때만이 군사적 개입 결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파월 독트린의 뼈대를 풀이했다.
***"외교는 국가이익 잣대로 결정"**
어떤 나라가 내전이나 기근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을 때 치안유지를 위해 군대를 보내 돕는 것을 우리는 '인도주의적 인권차원의 개입'이라 말한다. 그러나 "어떠한 나라든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군사적 개입을 하길 꺼린다"는 게 필자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개입이 요구될지라도 국가이익이 별로 없다면, 개입을 망설이게 된다. 이미 많은 국제정치학자들이 현실주의에 바탕해 이론적 틀을 닦아놓은 상태다. 그들은 '국가이익'이란 관점에서 군사적 개입을 해석하고 있다. 국제정치학계의 거두 한스 모겐소는 일찌기 『국제정치학』(Politics among Nations)에서 고대 그리스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들에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아가 "외교정책의 목표는 국가이익이란 잣대로 결정돼야 한다"고 단언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베트남 파병 당시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었다. 결국 그는 "월남파병이 (대외적 명분인 '자유민주주의 수호'보다는) 한국 경제와 군 현대화에 도움이 된다"는 결론에 따라 파병을 결정했었다. 미첼 왈처는 그의 유명한 『정의의 전쟁, 불의의 전쟁』(Just Wars, Unjust Wars)에서 "국가들은 오로지 외국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파병하지 않는다. 외국인의 생명은 (파병을 둘러싼) 정책결정과정에서 그다지 비중이 크지 않다"고 썼다. 왈처에 따르면, 이른바 인도주의적 군사개입(humanitarian intervention)이라 선전되더라도 실제로 '인도주의적'인 요소는 극히 일부일 뿐이다. 다른 요소들(이를테면 국가이익)이 군사개입의 더 큰 배경이란 얘기다. 또다른 정치학자 니콜라스 휠러는 『외국인들 구하기, 국제사회에서의 인권 차원 개입』(2000년, 옥스퍼드대 출판부)에서 "일반적으로 국가들은 외국인들을 구하는 데 자국 군인들의 피를 흘리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지구촌 평화유지를 위한 유엔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엔은 오랜 꿈이라 할 평화유지 상비군조차 꾸리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저 일이 터질 때마다 "슈퍼 파워 미국과 유럽의 나토 군이 움직여주었으면..."하고 바랄 뿐이다. 그러나 미국은 라이베리아나 시에라 리온 같은 나라에 파병해봤자, 큰 이득이 없다. 콩고나 나이지리아처럼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아니다. 더구나 미국의 석유가 걸린 쿠웨이트나 이라크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1993년 소말리아 모가디슈 시가전 양상이 되풀이될 수도 있다. 친후세인 무장세력의 저항으로 '이라크 수렁'에 빠진 것이 아니냐는 소리를 듣는 부시다. 내년말 대선에서 재선되려면, 이렇다 할 이득이 없고 (자신의 주지지층인 백인 유권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라이베리아 파병은 내키지 않는 일이다. "미국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세계의 경찰'을 자부하는 슈퍼 파워라면, 걸프지역 파병으로 석유만 챙기려 들지 말고, 아프리카 평화도 챙겨라"는 원론적인 요구에 부시가 쉽사리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파병한다 해도 그저 몇 백명 수준으로, 그것도 얼마 안가서 곧 빼낼 것이다.
관련 링크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articles/A26045-2003Jul21.html?nav=hptoc_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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