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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산당의 폐쇄성이 좌파운동 분열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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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일본 공산당의 폐쇄성이 좌파운동 분열의 원인

[수정일본사회 탐방]<8> 일본 신좌파 운동의 대부, 무토 이치요우 ①

한국의 사회운동은 80년대 이후 30여년 동안 장족의 발전을 해왔으며 수많은 단체들이 출현했다. 하지만 무한 상승곡선을 그릴 것으로 예상했던 한국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도 여러 지점에서 발전의 '병목지점'에 도달해 있으며, '전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면 일본의 사회운동은 대체로 '실패의 역사'로 한국에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패에서도 배울 점이 있으며, 실패의 역사라는 피상적 인식 이면에서 전개되어온 건강한 운동들은 정체기로 진입해가는 한국 사회운동 진영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런 취지에서 한국의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와 일본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케이센대학교의 이영채 교수가 일본 사회운동의 중요한 전환점과 위기의 지점들에 대해서 성찰적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활동가나 학자 등을 두루 만나 연쇄 인터뷰를 진행했다. 호사카 노부토(사타가야 구청장), 가와사키 아키라(피스보트 공동대표), 토리이 잇페이(노동운동가), 아하시 마사아키(학자), 요시다 유미코(생협운동 이사장), 우쓰미 아이코(평화운동가), 무토 이치요(신좌파 활동가), 우에무라 히데키(인권활동가) 등이다.


여덟번 째로 일본 '신좌파' 운동의 산증인이라 불리는 무토 이치요우(武藤 一羊) 씨를 만났다. 편의상 두 교수의 질문은 구분하지 않고 '조희연+이영채(조+이)'로 통일했다.<편집자>

무토 이치요우(武藤 一羊)

무토 이치요우(武藤 一羊)는 일본사회운동의 중심적 인물로 50년대 이후 '신좌파'운동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의 '신좌파'운동의 대부라 할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고 있으며, 50년대 이후 일본 좌파운동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동경대학 일본 공산당 학생조직의 세포 활동을 시작으로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일본 공산당에서 첫 활동을 시작했으며 일본 공산당에서 제명된 후, 베트남 반전운동을 이끌며 70년대에는 일본 국제연대운동의 상징적 기구인 '아시아태평양 자료센터(PARC)'를 설립해 대표를 역임했다. 냉전 붕괴 직전의 활동했다. 일본의 아시아 운동과 국제연대 운동의 개척자적 역할을 하며 80년대 말에는 아시아 민중대회를 개최했고, 90년대까지 그 성과를 이어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사회적 대안은 만드는 '민중플랜21(PP21, People's Plan 21)'에서 사회 운동을 주도했다. 현재 그는 PP21의 후속 단체인 PPSG(People's Plan Studies Group) 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으며, 일본 아시아 민중연대와 진보적 사회운동을 개척해 온 활동가로 평가 받고 있다.

3.11 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에는 전후(戰後) 일본의 좌파운동이 핵문제와 원전문제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하지 못한 책임을 피력하고 있다.

전후(戰後) 일본의 주요한 변화와 무토 이치요우

무토 이치요우의 인터뷰는 개인사이면서 또한 전후 일본 사회운동사의 한 면을 보여준다. 선생은 일본 사회운동사를 통괄하여 선생을 인터뷰 했으나, 독자들을 위해 간단하게 일본 운동사를 설명한다.

먼저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피해 이후,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임으로써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패전 이후 미국과 연합군은 GHQ를 설치하며 1952년까지 일본을 점령 통치했다.

1952년 미 군정이 끝날 때까지의 시기를 살펴보면, 일본은 1946년에 이른바 평화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은 메이지 유신 이후 신격화되었던 천황을 상징 천황으로 강등시키고, 일체의 무력행사를 포기한 헌법 제9조를 삽입하여 전후 일본의 평화구조를 지탱해 온 기본 틀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냉전의 격화 및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일본 내의 공산화를 우려하여 일본의 민주화 조치를 전면 중단하게 된다. 또한,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전쟁 수행을 위한 배후기지로서 일본을 활용하게 된다. 미국의 신동아시아 전략에 따라, 일본은 전범재판 등을 마치고 1951년 미국 및 연합국과의 대일강화조약(샌프라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동시에 미일 안보조약 체결에 따라, 미 군정이 정식으로 종료되고 새로운 독립국으로서 일본은 전후 시기를 출발한다.

한국전쟁이라는 특수 호황을 통해 빠른 속도로 경제를 회복한 일본에서는 1955년 선거에서 사회당의 약진과 이에 대항한 이른바 '1955년 체제'가 성립된다. 보수당과 자유당의 보수 대통합을 통해 만들어진 자민당이 등장, 이른바 패권적 보수정당이 존재하게 되고, 파트너로 사회당 55년 좌우 대립체제가 탄생한다. 이 55년 체제는 1993년 신당을 표방한 호소카와 내각의 등장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의 확대 및 냉전시기 동아시아의 긴장이 고조되어 감에 따라, 미국은 일본을 비군사 국가가 아닌 미국의 주변 정당으로 공산당이 존재하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정치구도가 출현하였다. 미국은 일본이 후방을 지원하는 군사동맹국으로 역할을 해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평화헌법에 발목이 잡혀 있는 일본은 1960년 미일 안보조약의 개정을 요구하는 키시내각에 대해 수많은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 세력들이 강력히 저항했고, 소위 60년대 초, 이른바 60년대 안보투쟁이 전개됐다.

1965년 한일회담 반대투쟁, 68년 베트남전쟁 반대를 위한 시민들의 저항운동, 70년 신안보 투쟁 등을 통해 일본의 사회운동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특히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 일본 자본주의 주류문화 및 사회의 권위주의 청산을 내건 소위 '전공투 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돼 일본의 사회운동은 일본 공산당과 사회당으로부터 독립, '신좌파 운동'이라는 다양한 사회분야로 운동이 전개됐다.

하지만 70년대 신안보 투쟁의 실패(미일 안보조약의 자동연장), 신좌파 운동의 극좌주의 및 고립주의 영향으로 사회운동 전체는 침체 국면에 접어든다. 7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사회운동의 또 하나의 분수령은 70년대 초반 전공투였으나, 한국에도 알려진 이 투쟁이 패배로 돌아가자 일본 사회운동은 전국적 투쟁의 시대를 종료하고 다양한 풀뿌리 운동과 지역운동으로 산개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일본의 좌파 정치조직으로는 일본 공산당과 일본 사회당이 대표적인데, 무토 이치요우 논의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좌파정당은 공산당과 사회당(전투적인 섹터(sector)로서의 해방파)이 있고, 이 두 정당 외에 비(非) 일본 공산당 반대파로는 혁명적 공산주의 그룹으로 불리는 분트와 트로츠키파 등 다양한 분파 혹은 섹터가 존재했다.

먼저 분트(Bund)그룹은 다시 혁명적 폭력투쟁, 무장투쟁 노선을 채택했던 극좌계열의 적군파, 깃발파, 반(反)깃발파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리고 트로츠키파는 제4인터내셔널파와 일본 독자파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 일본 독자파는 크게 대중운동과 현장투쟁을 중시하는 중핵파(츄가쿠파)와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가까쿠마루파)로 나눌 수 있다. 사회당 계열로는 혁명적 폭력투쟁 노선을 표방하며, 내부로는 무장투쟁을 중시하는 해방파가 존재한다.

또한, 60년대 일본 사회운동의 분출을 가져왔던 60년대 안보투쟁의 핵심인 전학련 학생조직은 주로 분트그룹이 주도했는데, 이들은 노동자 계급의 전위성을 기반으로 일본 공산당과 대립하면서 전학련 학생 간부들의 대량 제명사태를 초래하기도 했다.

무토 이치요우는 이러한 전후 일본사회운동의 핵심적 부분에서 좌파운동을 이끌어 온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조직가이다.


조+이 : 오늘 날 일본 구(舊)좌파운동과 신좌파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 70년대 일본 아시아연대운동의 상징적 기구인 아시아태평양 자료센터(PARC)를 둘러싼 활동과 평가, 이후 민중플랜(PP21) 운동의 전개, 현 시기 미국 패권체제와 반(反)세계화 운동, 글로벌 민주주의, 아시아 국제주의 운동의 과제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눌까 합니다. 마지막 부분에는 한국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니까, 한국의 진보정당운동 및 사회운동에 대한 조언을 듣고자 합니다.

▲ 무토 이치요우 ⓒ조희연, 이영채

식민지 지배 후손으로 사회운동에 참여

조+이 : 먼저 한국 독자들을 위해서 대학 때 한국전쟁을 경험하셨는데 개인적인 삶의 궤적을 간단히 소개해주시죠.

무토 이치요우 : 저는 1931년 9월 14일 생입니다. 태어난지 4일 후에 만주사변이 일어났죠. 저의 아버지(무토 토미오: 武藤富男, 1904-1908, 도쿄대 졸업, 만주국 사법부 형사 과장, 일본 그리스교당 결성, 메이지 학원 원장)는 재판관이었는데, 만주국에서 법률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파견됐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가 12살까지 장춘에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를 거기서 졸업했지요. 2차 대전 패배 직전에 일본으로 돌아왔고 이후 동경에서 살았습니다. 돌아온 무렵이 동경대공습(1944년 11월 이후 약 106번의 공습을 받음. 3월 10일 대규모 공습에 민간인 사망자 다수 발생)의 시기여서 마치 대공습을 맞으러 돌아온 것 같았다는 농담도 합니다. 1950년 4월에 동경대학에 입학했는데, 그 해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일어났죠.

조+이 : 1950년대 대학에 들어간 후 대학에서 학생운동에 관여하게 된 배경은?

무토 :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좌익활동을 경험한 후 아무것도 모르고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대학은 사회적 행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저도 자연히 그런 활동의 중심에 있게 됐습니다. 당시 일본은 미 군정청(연합군최고사령관총사령부, General Headquarters, GHQ : 포츠담 선언을 집행하기 위해 일본에 설치된 연합군 통치기구, 대부분 미국과 영국 군인 및 민간인으로 구성, 사령관 맥아더)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1950년 3월 경부터 매스컴과 GHQ가 합동으로 각계의 공산당원을 쫓아내는 이른바 '레드 퍼지(Red purge : 맥아더 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일본 공산당 및 그 동조자들을 공무원 및 민간 기업에서 퇴출시킨 사건. 약 1만 명이 퇴출됐고, 빨갱이 색출이라고도 불림. 1950년 5월 3일 일본 공산당을 비합법화, 6월 6일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 24명을 공직에서 추방, 한국전쟁 발생 이후 대대적인 퇴출 실시)'가 시작됩니다.

당시 레드퍼지 소동은 공산당원 뿐만 아니라 좌익이나 진보적인 인사들까지 축출하는 식으로 전개됐습니다. 당시 엘(Eel, GHQ 산하 민간정보교육국 고문. '미꾸라지'라고 불림), 미꾸라지라고 하는 사람이 공산당을 축출하기 위해서 대학을 돌며 강연을 하고, 빨갱이 교수를 축출하자는 캠페인을 했습니다(1949년 7월 17일 니가타 대학에서 공산주의자 추방 강연 등). 이에 대항해 전국의 대학에서 반대 투쟁이 일어났고 동경대에서도 시험거부운동(1950년 9월) 등이 전개됩니다.

다행히 이런 투쟁의 영향으로, 대학에서는 이러한 레드퍼지의 흐름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학생들이 참여했고, 이를 계기로 활동을 많이 하게 됩니다. 대학 외부의 회사나 기업 및 매스컴 등의 영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했지요.

한국전쟁 발발과 일본 공산당의 폭력혁명 노선 채택

조+이 : 당시 일본 좌익정당운동, 특히 공산당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 설명해 주시지요. 소련 공산당 및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무토 :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당시 '누가 침략했는가'에 대한 큰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좌익의 일반적인 생각은 '미국이 북한에 선제공격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일본 사회당은 한국전쟁 발발 2주 후,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판단, 일본 공산당은 소련의 입장 지지를 둘러싸고 분열). 당시 정보가 충분히 없었지요. 그리고 좌익은 그러한 입장과 분석 하에 운동을 했습니다.

이 무렵 일본 공산당이 아주 심각한 분열을 합니다. 문제는 소련의 스탈린 정책이었습니다. 당시는 코민포럼이 결성된 시기였죠. 1950년 1월에 소련의 <프라다>지가 갑자기 일본 공산당을 비판합니다. 미 제국주의와 싸우지 않으면서 현재의 미 군정 하에서 혁명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었죠.

그런 점에서 노사카 산조(野坂参三, 1892-1993, 초대 일본 공산당 의장, 코민테른 일본대표, 중의원 및 참의원 역임 : 1931년에 소련 입국, 1940년 연안에서 중국공산당에 합류, 1944년 일본 인민해방연맹 결성, 46년 1월 소련 경유로 일본 귀국, 3만 명의 환영대회. '사랑받는 공산당' 노선으로 천황제 인정, 미 점령군은 해방군 인정 및 그 산하에서의 평화혁명 노선을 주장. 50년 소련 공산당이 노자카의 노선을 비판하자 이에 반박하는 소감파에 속해 미야모토 겐지 등의 국제파와 대립. 1992년 잡지 기사에 의해 소련 스파이로 판명. 일본 공산당 명예 의장에서 제명)에 대한 입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당시 이 사람은 소련에 체류하다가 종전 후 일본에 온 사람입니다. 소련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생기니까 이것을 지지할 것인가, 아닌가로 일본 공산당이 분열하게 됩니다.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조+이 : 소위 국제파와 소감파의 대립이 발생하게 된 이유군요. 당시 정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죠.

무토 : 기본적으로는 당시 일본 공산당 내에는 소감파(1950년 1월 6일 코민포럼은 기관지를 통해 "일본정세에 대해서"를 발표, 노사카 산조의 '미 점령군은 해방군 및 평화혁명 노선'을 비판. 이에 대해 1월 12일 일본 정치국은 "'일본정세에 대해서'에 대한 소감"을 발표. 그리고 이에 반박한 주류 그룹인 도큐 다큐이치, 노사카 산조 등은 친(親)중국 공산당파라고도 불림. 이후 중국 공산당도 소련 공산당의 비판을 지지함으로서 소감파는 결국 평화 혁명론을 비판하고, 1952년 제 5차 전체대회에서 폭력 혁명론을 일방적으로 채택. 레드퍼지로 탄압이 심해지자 소감파는 중국에 망명하여 국내의 일본 공산당을 지도하였으나, 국제파의 비판을 받음. 도큐 다큐이지는 1953년 중국에서 사망, 노사카는 1955년 귀국해서 미야모토 겐지와 화해)와 국제파(소련 공산당의 일본 혁명 노선 비판에 대해 국제적 비판을 받아들이겠다는 입장, 일본 공산당 내의 비주류파. 미야모토 겐지를 중심으로 60년대 중반 이후 당 운영세력이 됨)로 나뉘어 대립합니다.

'소감'은 소련 공산당이 일본 공산당을 반박하자, 일본 공산당 주류파가 '그런 잘못을 고쳤다'는 취지의 소감 성명을 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결국 소감파의 성명은 공산당 내부의 파벌투쟁을 불러일으켰지요. 격렬했습니다. 당시 소수파였던 국제파는 코민포럼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어 중국 공산당도 일본 공산당을 비판하자, 주류인 소감파의 소련 공산당 비판 소감 성명에 대해 '벌써 잘못이 교정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토당토않다'고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또한 이 무렵 GHQ가 일본 공산당 기관지 <적기(赤旗)>(1928년 비합법신문에서 1935년 3월 4일 이후 발행금지, 45년 10월 20일 재발행, 66년부터 <적기>로 표기) 발행을 금지하게 됩니다. 나아가 중앙위원들의 정치활동도 금지했지요. 그래서 일본 공산당 활동가들은 잠수함(수배생활)을 타게 됩니다. 지하로 숨습니다. 공산당은 일종의 반(半)지하단체가 되었습니다. 소감파가 지하로 숨자, 국제파를 중심으로 한 공개 활동만 남게 됩니다.

당시 주류파와 소감파는 이론적 차이 보다도, 논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사실 심리적 패닉 상태였습니다. 당시 저는 동경대 공산당 세포로 활동하지는 않았었는데, 동경대 공산당 세포는 국제파였습니다. 그래서 소감파와 충돌이 생깁니다. 이런 긴장이 매일 지속됐고, 그 상황 속에서 국제파의 경우, 소련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한국전쟁에서도 북한을 지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감파들은 '이 전쟁에서 미국을 돕지 말아라'라고 했을 뿐 한국전쟁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조희연, 이영채

조+이 : 당시 일본 공산당운동에는 재일 조선인들도 많이 관여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무토 : 물론 그렇습니다. 각국은 당시 여기서 재일교포들도 관련이 됩니다. 당시 코민테른 이후의 방침에 전통에 따라 일국일당주의(一國一黨主義)의 원칙을 지키고 이었고, 따라서 일본에 있는 재일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일본 공산당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식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조선인들도 자신들의 대중조직(전후 일본의 재일조선인 조직으로는 1945년 10월에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연맹이 중심조직. 49년 9월 일본 정부와 미 점령군의 지시로 해산을 강요당함. 한국전쟁 발발 후 1951년 1월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을 결성, 일본 공산당 산하에서 폭력 혁명론에 참가.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결성으로 일본 공산당 산하에서 독립)을 가지고 있었지요.

예를 들면 동경대의 경우 소감파가 학생운동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제가 공산당에 가입했을 때는 소감파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동경대 공산당 세포의 최고 리더는 재일조선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입당서를 썼고, 당시 동의서를 써준 사람은 바로 그 조선인 학생이었습니다.

그때 가장 큰 쟁점은 한국전쟁 반대와 징병 반대였습니다. 평화 운동이라는 개념 보다는, 반전 운동이라는 개념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반전 운동은 여기서 GHQ의 대일점령정책을 비판하게 되고 당연히 미 점령군과의 싸움을 의미했습니다.

한 예로 당시 일본 공산당에 입당해 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후보 중 철학자, 이대 다가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도지사 후보 출마 연설을 트럭 위에서 했습니다. 저도 응원을 했죠. 그런데 그가 처음으로 미국을 비판합니다. 당시 미 점령군 비판은 죄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헌병에게 붙잡혔습니다. 헌병에게 잡히는 것은 군사재판을 받는 다는 것을 의미했고, 군사재판은 영어로 진행됐습니다. 같이 잡힌 사람 중에 영문과 학생이 있어 통역을 해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런 식의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시기 일본에는 민주주의가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그때 일본 공산당은 국제파와 소감파, 양파 모두 결국 타협을 하게 됩니다. 이 무렵 중국 <인민일보>의 사설이 공개됐는데, 소감파 중심으로 단결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서 무장투쟁을 하자는 소감파의 입장을 중국 <인민일보>가 대신 실었던 것이지요. 현 상황을 주장한 셈인데, 일본 공산당파가 사설을 실어 단결된 모습을 보이고자 했습니다. 민족 독립이 중요한 임무라는 식의 논리 전개였습니다.

천황제를 둘러싼 노선투쟁

조+이 : 일본 공산당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데요. 천황제에 대한 일본 공산당의 입장은 어떠했습니까? 폭력 투쟁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입니까.

무토 : 1932년 코민테른이 일본 문제에 대한 테제(1932년 5월 코민테른에서 결정된 '일본의 정세와 일본 공산당의 임무에 관한 테제'가 채택. 1932년 7월 10일 <적기> 특별호로 게재. 전전의 일본지배체제를 절대주의적 천황제, 지주적 토지소유, 독점 자본주의의 세 축으로 규정. 지주 및 독점 자본의 대변자 그리고 절대주의적 정치체제로서의 천황제로 명명. 당면 혁명은 절대주의적 천황제를 타도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며, 이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향하는 2단계 혁명론을 표명함)를 발표합니다.

천황제에 대해서 절대왕정주의라고 규정하고, 천황제 속에 봉건제가 남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천황제의 봉건제적 성격규정을 둘러싸고, 코민테른에서 큰 논쟁이 이루어졌던 것이지요. 일본 마르크스주의의 원류는 여기서 생깁니다. 코민테른이 한번 주장하면 당시에는 권위를 가졌으니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렇게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제국주의적 침략까지 하는데, 반(半)봉건적인 측면만 강조한다는 것은 이상하다'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공산당 분열이 이루어졌는데, 주류는 코민테른의 논리를 지지하게 되지요.

한편, 천황제의 반봉건성을 부정하는 노농파(전전의 일본 공산당 내 마르크스파, 1927년 창간 잡지 <노농(労農)>에 의거함. 메이지 유신은 철저한 부르주아 혁명, 천황은 부르주아 군주이며 제국주의 군주이기에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주장. 이후 코민테른 비판 및 일본 공산당 주류에서 제명당함. 1938년 2월 인민전선사건으로 대부분이 검열. 전후 일본사회 좌파의 이론지 <사회주의협회>로 계승되어 일본 사회당, 총평의 노선 형성에 영향을 줌)는 비주류가 됩니다. 이들은 <노농파>라는 잡지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1951년에 일본 공산당은 폭력혁명의 무장투쟁 노선을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이와나미(岩波)서점에서 <일본 자본주의 발달사 강좌>라는 책을 냈는데, 이 책에 일본 공산당의 입장을 명확히 밝혀놨습니다. 일본 공산당 주류파는 천황제의 반봉건성, 귀족제적 요소의 잔존, 절대왕정주의적 성격을 주장하는 강좌파적(노동파와 대립한 마르크스주의 일파. 이와나미 서점이 1930년 초에 출판한 <일본 자본주의 발달사 강좌>를 집필한 경제학자 그룹이 중심. 메이지 정부 하의 일본정치체제는 절대주의이고, 사회경제체제는 반봉건적 지주제라며 천황제를 타도하는 부르주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하는 2단계 혁명론을 주장. 코민테른의 32년 체제를 옹호하고, 일본 공산당의 기초이론을 제공)입장을 표명한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주류 공산당이 있었고, 그래서 폭력혁명을 위해 농촌에 근거지를 만들어 무장투쟁을 하자는 식이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난센스인데, 당시에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일본 공산당으로서도 전환기였지요.

1949년 정도부터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조선 특수를 경험하며 일본 자본주의가 다시 부흥합니다. 그 과정에서 미츠비시(三菱) 등 전전의 군수산업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미츠비시 중공업은 한국전쟁 중에 미국 무기를 직접 만드는 공장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들이 대학생이었을 무렵, 국철(國鐵)은 매우 강한 산별노조였는데, 그들 또한 그때 특별시간대를 만들어 전쟁협력업무를 수행했습니다. 큐슈 지역은 한국전쟁을 위한 후방 기지가 됐죠. 총만 쏘지 않았지, 사실 큐슈 지역은 한국전쟁의 한 전쟁지역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일본 공산당이 한국전쟁 무렵 소련 공산당 압력에 의해 폭력혁명 무장투쟁 노선을 설정했을 때 실제 일본의 국내상황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공산당원들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전쟁 국면에서 그나마 몸을 던져 싸운 사람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반도 조선에서의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재일조선인의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투쟁했습니다.

일본 공산당은 다른 논리로 무장투쟁을 주장했습니다. 재일조선인들은 직접적인 민족적 논리로 폭력혁명 무장투쟁 노선을 앞장서서 수행했습니다. 수이타 사건(吹田事件, 한국전쟁 발발 1년이 되는 1952년 6월 24일에서 25일, 오사카 수이타 시 열차 역에서 발생한 반전 데모. 일본 공산당 및 재일조선인들이 경찰 저지선 돌파, 미군의 물자수송을 저지하려 했음. 200명의 대량체포와 111명이 기소된 사건)은 조선인이 관여한 대표적인 물리력 행사 사건입니다. 철도를 점령하고 실력행사를 통해 무장투쟁을 한 것이지요. 그런 큰 폭력적인 충돌도 있었습니다.

조+이 : 한국전쟁 발발로 일본은 미국에 의한 점령기를 끝내고 독립국가를 형성하게 되는데요. 일본 공산당 및 학생운동의 변화가 있었습니까.

무토 : 한국전쟁 발발 초기, 당시 일본 공산당은 아무것도 하지 안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51년에서 52년 사이에 큰 변화가 생깁니다.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다. 전선을 옆으로 넓히자'는 도쿠다 큐이치자(徳田球一, 1894-1953, 전쟁 전후(前後) 일본 공산당의 대표적 활동가. 전후(戰後) 초대 서기장. 소감파의 중심 인물로 한국전쟁 중 중국 망명 후 중국에서 사망)의 논문이 발표됩니다. 주된 전략은 노동자들의 스트라이크를 요구한 것이죠. 과격한 폭력혁명 노선을 표방하기는 했지만 실제 일본 상황은 그렇지가 않았고, 그래서 일부 세력들에 의한 폭력혁명 노선이 실행되면서 시간만 허비했던 것에 대한 전술 수정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과격한 무장투쟁 노선이 있었고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이 간 것이지요.

그러던 중 1951년에 미 군정의 일본 점령이 종식됩니다. 일명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었고, 다음해 4월 일본은 독립을 하게 된 셈이지요. 저는 그때 학생운동 조직에 들어가 있었는데, 4월 28일이 일본이 독립한 날이었고, 바로 그날 일본 공산당은 대규모 데모를 했습니다. 주된 내용은 오키나와를 미국에 양도한 것에 대해 '28일은 독립의 날이 아닌 국치의 날'이라고 데모를 했던 것입니다. 당시 전국대학생투쟁위원회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투쟁했는데, 외부로부터 사람들이 학교에 들어오지 못하게 철조망으로 정문을 봉쇄한 투쟁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폭력무장 투쟁은 못 한 것이지만, 실력행사를 한 셈이지요.

그런데 그 투쟁 속에서 지도부 의장이 수배상태로 학교에 들어오지를 못했어요. 책임자가 못 들어오니까, 결국 제가 투쟁의 중심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의장은 퇴학처분을 받게 되고, 저도 1952년에 동경대 퇴학처분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5월 1일, 노동절 기념 대규모 파업이 전개됐습니다. 미군 점령이 끝나는 날과 동시에 보다 강력한 것과 결합되어 거대한 투쟁이 일어난 것이지요. 일본사회운동은 그때가 하나의 전환점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일본 공산당 무장투쟁 사건이 발생한 것은 그 이후입니다. 지하 조직이었던 일본 공산당은 이미 다 노출된 상태였습니다. 당시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는 소문이 있어 총 점검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서로 스파이인지 여부를 가리기 위해 동지를 신문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행위는 사실 조직을 궤멸시키는 빠른 길이지요. 동지를 고발해야 하는 상황도 생기고요.

이즈미라는 동경 중부지부의 위원이었는데, 지하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하고도 친한 친구였는데, 재일조선인이었습니다. 고삼영이라는 친구도 있었는데, 스파이 신문을 받게 됐습니다. 오차노미즈 여자대학의 학생들도 조직의 신문을 받았습니다. 조직원을 서로 의심하는 비극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이런 상황을 고삼영(高史明, 1932-, 재일조선인 2세, 작가 및 평론가, 다수의 작품이 NHK 드라마로 제작됨, 일본 공산당에서 민족문제로 탈당)이 소설로 썼습니다. <밤이 길을 어둡게 할 때 몰래 찾아올 때>(<夜がときの歩みを暗くするとき>, 筑摩書房, 1971)라는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55년, 일본 좌파운동의 역사적 전환기

조+이 : 1955년 상황에 대해서 좀 설명을 해 주시지요. 결국 일본 공산당 내에서 재일조선인들이 탈당하여 조총련을 설립한 해 이기도 합니다만…

무토 : 1955년은 이 문제의 전환점이 된 해입니다. 전체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하지요. 말씀하신 대로 55년에 조총련이 생깁니다. 당시 일본 공산당은 50년대에도 항상 올바른 투쟁을 했고 겉으로는 틀린 노선을 걷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죠. 명분 때문에 폭력혁명 무장투쟁 노선을 내걸었고 그래서 한국전쟁 휴전 직후 열린 선거에서 국회의원도 배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제6 전국협의회가 열리게 됩니다. 당시 일반당원이 모르는 사이에 상층부는 파벌투쟁을 하고 있었고, 그 결과 전국협의회를 열게 된 것입니다.

제6 전국협의회를 '6전협'라고 부르는데, 일본 공산당은 이 대회에서 그동안의 혼란을 정리합니다. 먼저 무폭력 혁명 노선을 충실히 실행해서 투쟁을 열심히 했던 사람을 다 제명해버립니다. 지도부는 지금까지의 상황 설명이나 자기비판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나마 당의 폭력혁명 노선에 따라서 열심히 싸웠던 사람에게 일본 공산당이 처한 죄목을 다 뒤집어씌우는 식으로의 상황을 정리했습니다(일본 공산당 내의 다수의 조선인 활동가들이 비판을 받고 탈당함).

어쨌든 그때부터 5년간 일본 공산당은 흥미로운 시기였다고 생각됩니다. 저도 젊은 공산당원인 셈이었는데, 우리들은 일본 공산당이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활동했고,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상층부 사람들의 인식은 전혀 달랐습니다. 지금까지의 파벌투쟁을 총괄하면서 그것이 더욱 악화된 5년이었던 것입니다. 1962년까지 잡으면 실질적으로 7년간입니다. 62년에 제8 전국협의회가 열리는데, 이것이 일본 공산당 재정리의 기회가 됩니다. 당시 여기서 미야모토 켄지(宮本顕治, 1908-2007년, 전쟁 전후의 일본 공산당 활동가, 문학가, 58년 당서기장 취임 이후 40년간 일본공산당 지도. 중의원 역임)라는 국제파의 중심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독재적이고 관료적인 공산당 내부 체제를 개혁하겠다고 주장했고, 그것에 힘입어 62년을 계기로 국제파가 일본 공산당의 권력을 잡습니다.

1955년은 일본 역사에서나 좌익 정당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첫째, 일본 공산당이 당내 분열을 넘어 통일을 하게 됩니다. 둘째로, 일본 사회당도 좌우파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좌파의 주도 하에 통합됩니다. 세 번째는, 지금까지 분열되어 있던 보수당과 자유당도 자유민주당으로 통합됩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노동운동이 춘투(春鬪)(매년 2월 열리는 일본 노동조합 단체협상.먼저 자동차, 전기, 철강 등 금속산업 및 제조업을 시작으로 단체교섭을 하고, 그 이후 철도 및 전력 등 비제조업 분야가 동참. 55년 5산별단체 공투회의, 55년에 8산별단체를 결성해서 전개)를 전개하게 됩니다. 8개의 산별노조가 공동으로 춘투를 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동일 노동-동일 임금을 요구합니다. 이전까지는 노동운동진영의 통일된 임금인상요구투쟁이 없었습니다.

한편 경제기획원에서는 55년을 계기로 '전후(戰後)는 끝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전후 복구기가 끝나, 일본 자본주의가 고도 경제성장의 궤도에 오른 것을 선언한 것이죠. 바로 1955년을 계기로 경제적 및 정치적 구조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일본의 독점 자본주의가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조희연, 이영채
6전협회과 일본 공산당에 대항하는 새로운 조직운동의 탄생

조+이 : 통상 일본 공산당의 관료주의적 경향, 친소적 맹목주의, 반제반미 일변 노선 등에 대한 비판이 있는 것으로 안다. 일본 공산당의 활동 및 이에 대항하는 조직 운동들에 대해서 평가해 달라. 반공산당적 입장보다는 공산당 구조개혁론적 입장에 서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한 구조개혁론조차 제명하는 공산당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가.

무토 : 1955년에 6전협회가 있었고. 저는 전학련(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 1948년 결성 당시 일본 공산당의 영향. 55년 일본공산당의 6전협회 이후 일본 공산당 비판세력이 주류를 형성하며 전공투를 결성. 60년대와 70년대 안보투쟁을 주도함. 70년대 신좌파의 영향을 받아 내부폭력 및 연합적군파의 동료살해사건 등으로 급격히 퇴조. 2011년 현재 각 주요 잔존파들이 전학련을 자칭. 확인된 5개의 조직이 있음)이라는 조직에 들어가게 됩니다. 1954년에 전학련 리더가 체포되었고, 저도 체포되었습니다. 3년 3개월 만에 감옥에서 나오는데, 감옥에 있는 동안 일본 공산당 조직 내에서 총 점검운동이 있어서 오히려 저는 제명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셈이 되었습니다. 물론 저도 출옥 후에 신문을 받았지요. 그 후 공산당 지도부에서 '너는 청년운동을 하라'는 식으로 지시를 내립니다. 청년운동이라는 것은 당시 민청(일본민주청년동맹, 1923년의 일본공산청년동맹이 전신. 1960년 6전협회에서 현재의 규약과 조직을 유지, 신좌파계의 전공투 세력과 대립. 70년대 약 20만 명의 구성원을 이루었으나, 현재 약 2만 명 정도로 추정)이 중심이었는데, 민청은 권위 있는 조직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청년운동을 하면서 국제관계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국제연대관계는 대개 기독교단체들 중심이었는데, 세계연방운동(오자키 유키오 등 전전(戰前)과 부전(不戰) 및 군축운동가들을 중심으로 1948년에 결성된 국제조직, 현재 24개국의 가맹단체)이라는 좌파운동도 있었습니다. 당시 좌익의 운동단체들 중 국제적으로 연결되는 데에는 소련계 국제조직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국제조직은 다 소련계입니다. 노동의 경우 세계노련이 있었고요. 세계노련은 1949년에 분열되어 국제자유노련으로 탄생하게 되지요. 유럽계 상황을 보면, 대중적인 좌익조직이 성장하고 크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공산당에서는, 소련 공산당이 아닌, 다양한 국제대중운동의 리더들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50년대 중반에 나타난 세계적 변화입니다.

당시 청년운동을 보면, 세계민청련(공산당 계의 청년조직, 국제학생연맹과 함께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 사회당 계의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도 가맹)이라는 조직이 있었고, 그리고 여성운동에는 세계여성민주회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학생운동으로는 국제학생연맹(IUS. international union of students)이 있었고, 일본 학생조직도 여기에 가입했지요. 부문 조직들의 국제적인 연계 외에도, 당시에는 각국의 당들이 연대했습니다.

부문별로 국제연대운동도 존재했는데, 예컨대 농민들의 농협이나 세계청년 인권회의 같은 대회도 있었지요. 탄압을 받고 있었지만,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세계청년인권회의에 참석하라는 지도부의 지시가 있어서, 4명이 유럽에서 열린 세계청년 인권회의에도 참석했습니다.

당시 일본 공산당은 혁명을 위해서 '이제 폭력무장투쟁 노선은 안 된다'는 생각이 주류였습니다. 문화 운동적인 경향이 대중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래 가사를 바꿔 부르는 것, 소위 우타고에(1960년대 중반 노래방을 중심으로 평화 및 노동운동 노래를 합창으로 부르는 사회운동. 일본의 우타고에 전국협의회에 약 400개의 단체가 가맹하고 있음)와 같은 활동도 했지요. 코러스 서클을 만들어서 러시아 민요라던가, 일본의 이전 투쟁가들을 부르고 보급하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들이 청년운동과 결합되어 전개되었습니다.

이것이 공산당 좌익계가 가지고 있었던 운동이었습니다. 세계 민청련과 연대를 했고, 세계청년 축제에도 참석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외국에 나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많은 사람에게서 기부를 받아서 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참여한 사람은 다들 감격을 했지요. 해외에 나가기 어려려워서 생긴 신선함도 있지만, 유럽의 자유분방함에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당시 공산국가였던 루마니아 부카레스크에서 세계청년우호축제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세계대회에 참여하게 된 것이 민청운동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당시에 더 이상 폭력투쟁을 하기는 어려웠고, 일본 공산당도 폭력 투쟁 방침을 내리기 조차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대중적 기반을 만들기 위한 청년운동을 하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양하게 진행되었지요. 그때 인도네시아나 프랑스 등에서 사람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동북지역 센다이에서는 참석작ㅏ 1만 명이 넘어 강당이 꽉 차는 행사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 옆 국기관에서 열린 우타고에 행사에는 수만 명이 모이기도 했습니다(1954년 11월 27일, '원폭을 용서할 수 없다' 는 주제로 전국우타고에축제가 열림).

이런 대중성 운동만을 추구한 것에 대한 비판으로, 분트(Bund, 전학련을 주도했던 학생들이 일본 공산당을 탈당하여 1958년에 신좌익 조직을 만듦. 공산주의자 동맹을 의미. 안보투쟁 후 1960년에 해체, 66년에 재건하였으나 70년에 다시 해체된 이후 세분화 됨. 1847년 런던에 망명한 독일인을 중심으로 결성된 공산주의자 동맹에서 따옴)그룹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분트세력은 일본 공산당에 대해서 비정치적인 활동만을 한다고 비판하면서, 일본 공산당 주류로부터 분리하게 됩니다. 일본 공산당이 정치적 행위에 대해서 명확한 정면돌파의 방침을 내지 못하는 대신, 문화활동에만 전념한다는 식의 비판을 한 것이지요. 결국 이런 비판의 영향으로 일본 공산당은 1955년 6전협회에서 문화활동을 폄하하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아무런 총괄도 없이 말이지요.

이렇게 6전협회에서 문화활동을 폄하하는 결정을 내리자, 하부와 지하에서 열심히 일하던 문화활동가들이 갑자기 실업자가 됩니다. 개인생활을 버리고 모든 것을 조직에 다 바쳤는데, 아무런 총괄도 없이, 청산을 해 버린 것이지요. 정식으로 총괄해서 다시 하자는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모두가 피해자 의식만 갖게 된 것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중국에서의 문화혁명 이후의 분위기가 존재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조직의 결정에 열심히 따르던 사람들이 갖는 피해의식이지요. 결국 개인의 책임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것을 계기로 공산당에서 떨어져 나와 이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물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일하던 청년조직이 없어지면서 직업이 없어졌습니다. 그때 <국제통신>이라는 회사가 있었는데, 노동조합의 기관지인 <교토통신> 같은 조직이라고 할까요. 기관지들의 뉴스 보급처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인데, 청년운동을 접고 거기 들어가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 조희연, 이영채 교수 ⓒ조희연, 이영채

소련 공산당의 사상투쟁과 일본 공산당 신화의 붕괴

조+이 : 당시 어떤 사상적 조류들이 일본 공산당 좌익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까.

무토 : 50년대 중반 6전협회를 계기로 일본 공산당 내에도 개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외국의 문헌이나 새로운 이론이 일본에 많이 들어오면서 일본 공산당의 운동을 절대적으로 지지해왔던 세대들 사이에게 그 신화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부정적 평가가 나타난 것이죠.

유럽 공산당의 경우 트로츠키적 투쟁 경험을 통해서 붕괴하면서 궤멸했죠. 그런데 1955년 새로운 사상과 학문이 들어올 때 일본 공산당에 대립하는 조류로, 당시에 많은 논쟁과 지식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바로 트로츠키류가 일본에 전해진 것이죠. 일본 공산당에 대립하는 흐름으로 들어오는 것이지요. 이탈리아의 그람시적 공산주의도 알려지게 되고요.

당시 중국 모택동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보입니다. 일본 공산당 내에서도 모택동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적었어요. 2차 대전 종전 후 중국에 억류되었던 일본 병사들이 대거 돌아오는데(중국 공산당에 의해 중일 전쟁기간 일본군 병사들이 전범으로 억류. 사상교육을 통해 자신의 범죄를 반성하게 함. 중국 공산당의 석방으로 일본 병사들이 귀국한 후, 일본 내에서 반전평화운동이 전개됨. 중국 공산당의 세뇌인가 자발적인 침략전쟁의 반성인가를 둘러싼 일본 내의 논쟁 존재),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에서 활동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 팔로군의 품성이나 도덕성에 매료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본 공산당은 트로츠키의 사상을 '적(敵)의 사상'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람시에 대해서는 꼭 부정적 평가를 한 것은 아닙니다. 모택동 사상은 일본 공산당 내에도 약간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어요. 한국전쟁 전후이죠. 중국으로 망명한 대부분 소감파 중에서 중국파들이 많았고요. 일본 공산당서기 도큐 다큐이치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중국 공산당과 특별한 관계를 갖지만, 도큐 다큐이치도 그런 위치에 있었고요. 한국전쟁 기간에 GHQ에 의해 공산당이 불법화되었을 때 소감파들이 중국에 망명을 했는데, 그래서 중국 공산당과 관계가 많습니다.

만주철도 조사부(1906년 남만주철도가 발족한 후 만철 조사부 설치. 처음에는 만철의 경영을 조사하였으나 동북지방의 정치, 사회, 경제를 조사하여 일본의 만주 진출 기반이 됨. 다수의 조사원들이 필요해지자 일본 내의 자유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고용되어 군부와 대립, 두 차례 탄압을 받음. 일본 최고의 싱크탱크로 기능, 전후 만철 조사부 출신들이 일본 기업 및 학계에 진출하여 많은 성과를 냄)에 좌익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좋은 조사를 많이 했는데, 일본 제국주의에 봉사를 하면서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중국에 억류된 일본군 병사들의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중국 공산당에 의해 교육을 받고 영향을 받아 자발적으로 남은 사람도 있었고, 일부는 중국 공산당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팔로군 원칙을 배워가지고 가지고 일본에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새롭지는 않았지요. 유소기(劉少奇, Liu Shaoqi, 1898-1969, 1959년 중국 국가 주석)의 영향을 받았고, 유소기파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모택동의 문헌인용은 없었고, 유소기의 "공산당의 수용논쟁"이라는 논문이 필독문헌이기도 했었습니다. 일본 공산당에 대한 사상적인 지형은 대략 이 정도였습니다.

조+이 :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후르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난 후 비판이 있었고, 이것이 소련 공산당 및 소련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 공산당도 크게 보면 친소련계 스탈린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세력들에게 상당한 영향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모토 : 당시 <국제통신>사에서 일했는데, 거기 일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 해가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가 열렸던 때입니다. 1956년 2월로 후르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나게 됐죠. 이 대회는 그 동안의 공산주의 운동의 모든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의미했지요. 이후 일본에 트로츠키도 들어오고 그람시도 소개되게 됩니다. 그것만이 아니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노동신문운동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노동신문도 소개되는 등 20대를 중심으로 많은 정보가 유입됩니다.

헝가리 사태(1956년 소비에트의 지배에 저항하여 헝가리 민중이 데모를 전개. 소련군은 군대를 파견하여 유혈진압, 수천 명이 죽고 약 25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사태)에 대한 기사를 제가 쓰기도 했지요. 예컨대 '티토 노선으로 돌아가라'는 식의 논설을 썼습니다. 당시 소련은 동유럽 내정에 군사적으로 개입했는데, '첫 번째 개입이 잘못되었기에, 두 번째 개입은 피할 수 없었다'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헝가리 사태는 일본에서의 소련 공산당에 대한 평가, 일본에서의 트로츠키를 재평가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소련의 헝가리 침공 사태는 기존의 일본 공산당의 친소적 경향, 나아가 일본 공산당의 국내에서의 독점적 권위를 붕괴 및 분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학련 학생운동과 일본공산당 전위운동의 대립

조+이 : 일본 공산당으로부터 분트세력이나 트로츠키파로 분리된 것이 일본 좌익운동의 가장 큰 분기점으로 보이네요. 당시 전학련은 어떤 사상적 조류를 대변하고 있습니까. 이 무렵에 일어난 것 아닙니까.

모토 : 1958년 전학련 조직 속에서 이후 분트(Bund)라고 불리는 세력이 형성됩니다. 기존에 이미 트로츠키 조직(1952년경부터 일본 내 트로츠기 연구그룹이 존재)도 있기는 했습니다. 당시는 일본 공산당 내에서의 트로츠키 모임 정도의 형태였죠.

기본적으로 일본 공산당의 체질은 학생운동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자 계급의 전위주의를 주장하는 입장이기에, 학생은 프티 부르주아(petit bourgeois)로 규정되지요. 일본 공산당 내에서는 그들이 단일하게 움직인다고 해도 결국은 프티 부르주아로 전락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국전쟁 전후 소감파와 국제파의 분열 속에서부터 계속 있었던 전학련에 대한 일본공산당의 주요인식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에 반대하는 학생운동 내 비판적 흐름이 있었습니다. '학생층으로서의 연대가 가능하다, 학생 나름의 독자적인 혁명사상이 있다'는 식의 인식과 행동이죠. 1945년 8월 직후 미군정 점령 후 형성된 초기 전학련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요. 50년 전후 처음 레드퍼지에 대한 학생운동의 저지운동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입니다.

6전협회 이후 전학련 그룹 내의 일본 공산당 비판은 전면적으로 대두됩니다. 스탈린 비판과 함께 그런 사상이 전면적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도쿄 다치가와 미군기지 반대투쟁(지금의 소화기념공원, 1955년부터 57년에 걸쳐서 도쿄 북쪽의 수나가와 지역에서 다치가와 미군기지 확대를 저지시킨 운동. 신좌파 학생들의 영향력이 많았음)이 하나의 상징적 사건인데요. 이 투쟁은 미군기지 저지 투쟁이었는데 농민들과 학생들이 오랫동안 공동투쟁을 해서 마지막에는 결국 기지를 저지하게 됩니다. 일본의 미군기지 반대투쟁의 역사에서 아주 획기적인 투쟁이었지요. 하지만 투쟁은 그 자체로 좋았는데, 일본 공산당은 전학련이 운동을 주도하는 것에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런 대립 속에 학생들 일부는 일본 공산당에 대해서 전략적·사상적 측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세계혁명과 혁명적 폭력에 대해서 공산당과 전학력 등 학생들 간에 이견이 심화된 것이지요.

당시 전학련은 세계혁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성격에 대해서도 이견이 존재했지요. 1956년 당시 일본에 공산당 강령초안이 있었는데, 51년 강령 '일본의 해방과 민주적 변혁을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 달성하려고 했던 것은 잘못된 인식이었다'를 수정했습니다(일본의 현 단계 혁명은 민주주의 혁명이고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 2단계론 혁명). 51년 강령과는 달랐습니다. 즉 일본은 제국주의가 아니고, 절반만 종속된, 반(半)종속국가라는 규정을 했지요. 당시 공산당 내의 구조개혁파(소련 공산당 각국의 내부간섭에 대해 반대하고 각국의 독자적 이론을 주장. 일본 공산당이 소련 공산당과 거리를 둔 시점에서는 오히려 소련 공산당을 지지하는 노선을 보이기도 함. 폭력혁명을 취하지 않고 장기적인 사회변혁을 계획. 사회당 및 총평계열에도 영향력을 줌. 현재 신좌파로서는 프론티어 그룹 등이 계승하고 있음)들에게는 그람시의 영향이 컸습니다.

전쟁 전의 구조개혁파와 노농파의 사고를 이어온 것이었지요. 당시 일본 공산당은 '자본주의 모순을 타도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즉 일본은 후진자본주의 국가이다. 봉건적인 요소가 강력하게 존재한다,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전에 미국의 식민지로서의 종속성을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2단계 혁명론이라고 불렀습니다. 자본주의 타도는 다음 단계의 혁명이라는 것이지요. 당시 태국 공산당도 그렇고 필리핀 공산당도 모두 2단계 혁명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학련 등 공산당 비판세력들 사이에서는 '제국주의를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라고 규정한다면, 레닌의 제국주의 지표를 기준으로 할 때가 있는데 이것을 충족시키면 제국주의이다'라며 이 기준 중 몇 가지 규정만 충족해도 제국주의라는 식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일제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해서도 일본 공산당의 찬성파와 반대파로 분열하였습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이 문제 설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구체적인 분석이 없었고, 이념론적인 성격이 강했지요. 미일 관계는 대단히 복잡한 관계인데, 그것을 분석하지 않고 좌익적인 탁상공론으로 논쟁을 했다 이야기지요. 예를 들면 '종속되었기 때문에, 제국주의가 아니다'라는 규정, '고도로 발전했다고 해도 제국주의는 아니다'라는 규정 모두 '제국주의'라는 개념 자체를 재검토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일종의 레닌주의의 교조주의적인 시각이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조+이 : 분트가 전학련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면, 트로츠키주의가 아닌데 왜 일본 공산당이 분열하게 되는 것입니까.

무토 : 1958년부터 전학련은 일본 공산당에서 탈당하게 됩니다. 전학련 내의 일본 공산당 반대파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아니지요. 물론 트로츠키파로 변한 사람들도 있지만요. 이렇게 분열한 일본 공산당 반대파를 공산주의자 동맹이라고 부르는데, 독일식 표기로 '분트'라고 부릅니다. 분트그룹은 몇 가지 사상적 조류가 있어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자 동맹이 가장 큰 조직입니다. 이들 내부는 세계혁명과 혁명적 폭력에 대한 시각에서 갈라집니다. 혁명적 폭력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와 관련하여, '무장투쟁을 사용하는가, 안 하는가'의 문제보다도 50년대 중반, 미소(美蘇) 평화공존에 대한 비판이라고 분트는 이야기했습니다.

'분트가 왜 공산당으로부터 분리되어 나갔는가', 기존 구조에 대한 환멸과 과격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일본 공산당은 체제의 질서를 인정하면서 평화적 방법으로 혁명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분트는 이를 개량적이라고 규정하고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행동으로 더욱 과격성을 드러내게 됐고, 점점 더 과격해집니다. 분트의 전면적 행동으로 표현된 것이 60년대 안보투쟁입니다. 분트는 전학련을 중심으로 안보투쟁에 전면적으로 참여하였지요. 분트 전학련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물론 당시 안보투쟁 참여자들이 모두 분트의 입장에 찬성한 것은 아닙니다. 60년 안보투쟁은 아주 큰 폭의 연대운동이었습니다. 국회 청원운동이라는 형태로 국회에 진출하게 되는데, 국회 주변을 모두 에워쌌습니다. 청원서를 제출하고 돌아오자는 투쟁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공산당은 국회에 청원하고 평화적으로 돌아가자는 입장이었지요. 저도 분트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분트는 이러한 공산당의 입장을 '죽은 사람에게 향 받치고 돌아오는 식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분향 데모'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일본 공산당은 합법적 방법으로 하는 합법운동이었지요. 하지만 분트는 정반대의 입장이었습니다. 일본 공산당은 적당히 하고 돌아가자는 입장이었고, 분트는 계속 진입하자는 입장이었지요. 1960년 3월에 분트 세력의 전학련을 중심으로 국회에 과격하게 진입합니다. 결국 일본 공산당 세력도 따라 들어가기는 했지요.

분트는 합법적인 경찰 허용 범위 내에서는 하면, 사태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입하면 사태가 바뀔지도 모르지만, 오늘 데모 나갔다 내일 다시 오고 하는 식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행동하고 싶어했습니다. 당시 미·일 안보조약을 저지하고자 하는 국민적 열망이 강렬했지요. 분트와 전학련의 행동은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공적으로 선동했고 사태를 끌어갔던 것입니다.

사실 1960년은 혁명이 일어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미·일 안보조약을 분쇄시켜 혁명을 일으키자는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정치 과정론이 당시 주장이 되었습니다. 정치 과정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정치 과정론은 원래 자본주의가 붕괴되기 위해서는 모순이 격화되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반대현상도 있지요. 행동에 의해 정치적인 충격을 줘 정치 과정을 흔들어버림으로써 역으로 상황이 바뀌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당시 분트는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논리 자체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조희연, 이영채

냉전이 전후 일본국가 형성에 미친 영향

조+이 : 50년대 냉전구조가 일본 국가와 좌파운동에 부여한 왜곡과 제약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큰 틀에서 냉전의 제약이 좌파정당들의 분열이나 전략수립에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예컨대 일본 공산당이 친소파로서 관료화하고 자폐적 집단으로 변질되고, 사회당과의 대립 속에서 반보수 패권세력에 대항하는 힘이 분산되면서 그 사이에 운동의 연대도 약해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무토 : 물론 냉전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냉전은 전후 일본 국가 형성에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1947년부터 좌파세력들이 미 군정에 의해 탄압받게 됩니다. 우리는 이를 리버스(reverse) 즉, '역행'이라고 부르는데 종전 후 미 군정에 의한 일시적인 민주주의 조치를 실시하다가 냉전의 영향으로 역행이 일어났다고 본 것입니다. 1947년 총파업(전후 일본의 노동운동이 고양되자, 요시다 내각은 1947년 1월 1일 전후 복구 와중에 일본 내에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배신자 집단이 있다는 식의 노조비판 발언을 함. 이에 노동조합이 반발하여 1월 15일 전국노동조합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 2월 1일 요시다 내각 타도와 생활권 회복을 요구하는 총파업을 결의. 총파업의 열기가 높아지는 가운데 미 점령군의 맥아더 사령관은 '총파업은 공공의 복지에 반하는 행위'라는 이유로 2월 1일 '총파업금지조치'를 내렸고, 이토 위원장은 결국 압력에 굴복해 총파업 철회를 선언하였다)을 계획했는데, 이것을 노조 지도부가 미 군정의 압력을 받아 총파업 전날, 결국 멈춘 것도 크게는 냉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입니다.

냉전이 격화되면서 미·일 안보조약이 중요해지고, 일본은 미·일 안보조약 속에서 새롭게 구조적으로 재편됩니다. 1945년 6월에 미군의 오키나와 점령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결국 일본 전후 점령에 있어 오키나와를 일본 영토가 아니라 미국이 직접 자유롭게 통치하는 영역으로 만들었지요. 어떤 의미에서 전후 일본의 평화헌법은 오키나와의 양도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1952년까지는 냉전의 영향이라는 것은 전후 일본 국가 형성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전후 일본 국가가 형성되고 냉전이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냉전이 일본 국가의 형성과 성격 그 자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이 : 자위대도 한국전쟁을 계기로 창설되었고 군대가 아닌 군대의 기형적인 형태로 자리잡았는데 일본 국가 형성에 어떤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까.

무토 : 맞습니다. 자위대의 경우도 그렇지요. 자위대는 한국전쟁 중 맥아더의 지시로 만들었습니다. 경찰 예비대의 성격을 갖는 조직입니다. 그런데 간접 침략이라는 개념에는 폭동도 전쟁의 일부라로 규정됩니다. 외부에서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후방지역이라도 적이 직접 침략을 할 수 있으므로, 내부 전쟁의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내부 전쟁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서 진압하는 경찰 예비대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경찰 예비대로서의 자위대는 미국의 예비군적 성격을 갖는 것입니다. 일본 내부에 존재하는 무장집단세력인데, 일본 국군이나 군인은 아니라는 기묘한 성격의 조직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전후 일본 국가는 완결되지 않은 것이지요. 결국 일본 국가 내에 미국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1972년에 오키나와가 본토에 반환되었는데, 반환 전까지 오키나와는 일본법이 일체 적용되지 않는 지역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군사 식민지로서의 관리권을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키나와는 지금까지 미국의 식민지로 존재한 것이지요. 오키나와는 미국의 식민지이면서 동시에 새롭게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이중 식민지로서 존재했습니다.

요약하자면, 냉전의 직접적 대립 결과인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자위대는 비록 한반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지만, 미국이 직접적으로 관리한 한국전쟁의 후방지역 전쟁 예비부대로 출발했고, 지금도 유사사태 발생 시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산당의 사상적 폐쇄성과 60년대 반대파 제명사태

조+이 : 일본 공산당의 성격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이 공산당은 당 중앙의 획일적 입장이고 당 공식적인 입장 이외에는 어떠한 이견도 인정하지 않는 획일적이고 배제적인 입장을 줄곧 취해왔던 것 같습니다.

무토 : 당 중앙의 결정이라고 보여집니다. 하나의 공식적 입장으로 획일화되니까, 기타의 모든 급진적 또는 개량적 입장들은 다 외부 이단으로 취급되어 버리는 일보 공산당의 폐쇄성이 좌파운동의 약화와 분열의 시작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공산당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이견이나 분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운동 자체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공산당은 민주 집중제의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명 등 가혹한 처벌을 합니다. 지금은 공산당 중앙의 입장도 약해졌지만, 가혹하고 비타협적인 입장을 줄곧 견지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천황제를 봉건제로 규정하는 것에도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에 대해 공론적 토론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획일적인 당 방침만 강요될 뿐입니다. 또한 공산당은 자기 영향력 하에 있는 다른 대중 및 단체들과 연대해 운동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영향력 밖의 다른 대중단체와 연합해서 하는 운동은 체질상 맞지 않습니다. 미군기지 저지운동은 여러 대중 단체들의 연합으로 성공했지만, 일본 공산당은 이들 단체들과 연합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공산당이 과거보다 개방되었다는 인상도 있지만, 여전히 다른 대중단체와의 연대는 부분과 연대가 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조+이 : 그런 점에서 당 방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대거 제명했던 1962년 제명파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무토 : 1962년은 제명파동의 해입니다. 제8 전국협의회가 열렸는데, 당시는 1956년 후르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스탈린주의적 입장을 견지해왔던 일본 공산당의 방침이 문제로 대두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당 중앙이 강령수정안을 내놓았는데, 50년대부터의 스탈린주의적 요소에 대한 몇 가지 쟁점에 대해서 상당히 미봉적인 강령이었습니다(일본은 미국에 반 점령된 종속국이고, 직접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지 않고, 반독점의 인민 민주주의 혁명을 목적으로 단계적 혁명을 실행). 이 수정강령에 반대했던 중앙위원 10명이 모두 제명됩니다.

당시 민주 집중제 적용 등의 문제에 대한 토론도 전면적으로 제기되었습니다. 또한 중소(中蘇)분쟁이 일어나고 있던 1962년입니다. 그래서 당 중앙 내부에서 당 권력에 의한 내부 사상권력 통제도 강화되었죠. 그때 일본 공산당 내 친중파들은 중국의 모택동 사상으로 통일하자는 논리를 제기하기도 했으니까요.

짧은 기간이지만, 저는 당시 <재팬 프레스(Japan press)>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공산당계 언론사인데, 사회주의 국가 간의 정보교류를 담당했습니다.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1955년에 결성된 일본 공산당계 조직)'에도 잠깐 있었지요. 원래 <국제통신>이라는 단체에 있다가, 원수협에 들어갔었죠. 원수협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평화운동에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재팬 프레스>에서 국제부를 만드는데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와서 옮겼지요.

그러던 중 1964년에는 다시 제명파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가장 큰 쟁점은 부분 핵실험 반대를 둘러싼 논쟁이었습니다. 시가 요시오(志賀義雄, 1901-1989,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라는 유명한 중앙위원을 비롯해서 부분 핵실험에 찬성했던 사람들이 제명당했습니다. 그들은 친중파였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논리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중소(中蘇)분쟁의 시기였기에, 중국파들은 소련을 공격하기 위해서 중국파의 이데올로기를 답습했습니다. 또한 일본 공산당으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중국 공산당 지지를 표방시켜 소련 공산당과 러시아에 대립시키고자 했습니다. 공산당 산하 평화위원회가 있는데, 거기 요시카와 유이치(吉川勇一, 1931-, 일본 공산당 출신으로 1965년 원수협 세계대회의 방침에 반대하여 제명당함. 이후 시민운동가로 변신, 베트남 반전 평화운동의 사무국장역임)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중국파의 이런 논리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결국 친중그룹들이 제명당했던 것입니다.

조+이 : 무토선생님도 당시 제명당하셨는데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무엇입니까.

무토 : 반대파에 대한 대규모 제명사태를 접하면서, 저는 일본 공산당에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료들과 문화그룹을 만들어 연구했고 관련운동을 했습니다. 이 문화그룹은 대부분 '일본 공산당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 중앙과 대립을 하게 되었죠. 그런데 당시는 당 중앙에 반대하면 중국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이 되었고, 거기서 자연히 소련 공산당 지지파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또 제명을 당하게 되고요.

예를 하나 들지요. 세계평화협의회라는 단체가 있는데, 공산주의 국가들의 평화협의회 단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일종의 소련 전위조직이었습니다. 당시 원수폭에 대한 반대운동이 가장 강했던 나라는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 사회당의 큐리 부인의 이복 사촌 동생으로 조리 큐리라는 신화적인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원자력 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했고요. 카리스마가 있었지요. 그가 속한 세계평화협의회에 대해서 중국은 아주 적대적이었습니다. 1964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세계평화대회를 개최하기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조지 큐리도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당시 원수협과 원수금(원수폭금지일본국민회의, 1965년에 결성된 반핵운동단체, 사회당 계열)이 분열해있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원수금은 사회당과 총평계이고, 원수협은 공산당계이지요. 그런데 세계평화대회에 가려는 것을 원수금은 반대했습니다. 원수협 측에 세계평화대회 준비위원회가 있었는데, 일본 공산당계가 주도했습니다. 국철 노동자도 가려고 준비위원회에 참가를 했고요. 원수금도 독자적으로 준비위원회를 만들었고, 일본 공산당계와 원수협은 원수금이 대표단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들의 세계평화대회 참여를 저지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세계평화위원회가 원수금의 준비위원회 인정하는 바람에, 공산당계 원수협과 사회당계 원수금은 헬싱키에서 심각한 대립을 함으로써 이후 갈등이 더 확대되었습니다. 헬싱키에 가서 대거 싸움을 하게 됩니다. 헬싱키 대회 참가를 둘러싼 원수협과 원수금의 대립이 생겨나고 확대되었습니다.

저는 원수금 준비위원회와 함께 헬싱키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분열주의자 무토'라고 일본 공산당계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보도되었고, 당은 저를 제명해버렸습니다. 세포 회의에서 토론하고, 해결해서, 상급위원회에 항의할 수도 있는데, 일체의 소명 절차도 없이 제명해 버린 것이지요.

일본 반원전운동의 계기가 된 비키니 사건

조+이 : 원수협과 원수금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3.11 원전사고는 일본의 반핵·반원전운동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을 경험한 국가인데, 왜 원자력을 추진했을까'라는 생각입니다. 원수협에서 활동도 하셨는데, 반핵운동이 원수금으로 분열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본의 반원전운동 역사를 간단히 설명해 주시지요. 향후 원자력 발전에 대한 운동이 대단히 중요해질 것으로 보이는데, 60년대 원수협과 원수금의 차이와 대립에서 대해서는 좀 설명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영채 : 비키니 섬 사건을 듣기는 했는데, 왜 큰 영향을 미쳤는지.

무토 : 일본의 반원전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50년대 당시 시대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54년 3월에 크게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나는 미국이 태평양 비키니 섬에서 수소폭탄을 실험한 사건 입니다. 즉 비키니 섬에서 미국이 핵실험을 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실험에 의해 일본 어민이 피폭된 사건입니다. 이 비키니 섬 피폭사건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 기억이 선명한 일본인들에게 억눌려 있던 대중적인 반핵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됩니다. 풀뿌리 수소폭탄 반대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1954년 3월 1일 비키니 섬 사건이 일어날 당시, 저는 전학련 중앙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3월 14일 무렵 전학련 학생들의 대량 검거가 이루어지고, 저도 그때 구속되어 3개월 동안 구치소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초기 수폭 반대운동에는 제가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대대적인 수폭반대 서명운동은 도쿄 스기나미 구에서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 풀뿌리 수폭반대 서명운동이 스기나미에서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여러 운동이 그동안 축적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중심이 된 것이 여성들이었는데, 특히 주부들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조직화된 그룹들이 이 운동에 참여합니다. 바다에서 핵 수폭실험을 한 것이니까, 참치잡이 어민들이 대거 피해를 받았습니다. 어민 집단 전체가 핵반대운동에 참여했지요.

도쿄에서는 원자력 및 수소폭탄 금지 운동이 광범위하게 조직 되었습니다. 특히 도시 중간층의 선도적인 참여가 눈에 띄었습니다. 지방에서도, 전국적으로 많은 참여가 있었고요. 저는 지난주 마츠야마라는 곳에 반원전 강연회를 하러 갔었는데, 그때 히로시마 피폭자단체협의회 소속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분 설명에 의하면, 1950년대 신문을 다시 읽어보니 그때는 지금보다 더 대단했다고 하더군요. 아주 작은 마을에서 몇백 명이 집회를 했을 정도라고요. 에히메 현이 있는데, 거기서도 대중적인 운동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1955년 8월에 제1회 원수폭금지 세계대회가 히로시마에서 열렸습니다. 에히메 현에서 배를 빌려 어민들을 포함해 약 1000여 명이 참석했을 정도였습니다. 히로시마의 대회장에 공간이 없어 결국 어민들이 못 들어갔습니다. 배 위에서 집회를 하기도 하고, 원폭기념관에 가기도 했지요. 이런 식의 광범위한 풀뿌리 대중운동을 지금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스기나미 구에서 시작된 반핵서명운동은 초당파적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의 55년 체제가 성립되기 전이라, 당시에는 지금의 자민당이 없었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당시 운동에는 보수파도 함께 궐기하는 형국이었지요. 보수적인 민주당이 당시 많이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의 대중적인 세력이 오히려 일본 공산당이라고 할 정도였지요.

당시 스기나미 구에서 시작된 반핵서명운동은 6개월 만에 2200만 명의 서명을 모았습니다. 왜 이런 대중적인 운동이 전개되었을까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가두서명을 한 것이 아니라, 한집 한집 방문해서 진행한 서명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여러 지역의 부인단체협의회가 만들어졌는데, 상당히 큰 관제조직이었습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한 명의 리더가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매우 보수적 성격을 갖는 조직이었지요.

농촌 부락 별로 청년들이 모인 일본청년단 교육협의회라는 조직이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보수 조직이지요. 그런데 이런 조직까지 포함해 거의 모든 단체들이 다 반핵서명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서명운동 전국협의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저도 그때 원수협에 간 적이 있는데, 엄청난 서명용지가 쌓여 있더군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50년대 중반 반핵서명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지방의회에서는 의원들이 초당파적으로 참여했고, 당시 일본 공산당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심지어 반원전 서명 사무국이 시청 안, 혹은 시 의회 안에 설치되기도 했으니까요. 

▲ '확산되는 참치의 공포'라는 제목으로 수산 시장의 혼란을 전하는 신문 ⓒ프레시안(자료사진)

조+이 : 50년대 중반의 대중적인 반원전운동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대중적인 반핵운동이 전개된 이유가 무엇인지요.

무토 : '왜 이런 운동이 일어난 것인가', 비키니 섬 사건에 의한 대중적인 반핵운동을 이해하려면, 일본의 점령정책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1945년부터 50년까지는 미 군정의 시대였고, 원폭에 대한 정보는 철저히 통제되었습니다.히로시마 지역에서는 더더욱 심했고요.

히로시마에는 원폭시인과 소설가가 있어 피폭문제를 대외적으로 알렸습니다. 피폭자 중에는 자살을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 군정의 통제 때문에 원폭문제를 공공연하게는 알리지 못했습니다. 쇼다 시노에라는 저항 시인이 있었는데 점령군이 작품을 검열하러 집에 오기 때문에, 자기 집에 인쇄하는 기계를 숨겨놓기도 했다고 합니다.

'점령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일본인들에게는 한편에서 맥아더를 존경하는 심정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억압된 감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군 점령이 1952년 5월에 끝나면서 당시 <아사히그래프>라는 잡지가 처음으로 원폭 특집을 구성했습니다. 큰 충격이었습니다. 7년간 억압받았던 점령 시대가 종식되면서 사회의식도 바뀐 것이지요.마치 새벽이 온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물론 이런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한국전쟁과 결합되면서 일본 자본주의가 부활했다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해방감도 있었지요. 이런 인식들이 일치하는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공산당의 경우, 1955년 제6 전협회가 열리기 전까지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지요. 하지만사회적으로는 새로운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억압되었던 것이 활기를 띄고, 분출되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마치 한국의 1987년 6월과 유사한 상황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미국은 이런 분위기 전환에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미국은 자기들이 만들어 왔던 전후 시스템의 붕괴로 당시 상황을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반핵·반원전운동이 반미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봤고, 공산주의 세력이 일본 내에서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결국 미국은 일본 내 반미운동으로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으로 예측했다고 봅니다.

반미운동을 무력화 시킨 핵의 평화적 이용정책

조+이 : '일본 내의 반원전운동이 반미운동의 시작이다'라는 설명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반미운동이 왜 원전 추진으로 갑자기 바뀐 것인지요.

무토 : 그것은 아까 설명했던 비키니 섬 수폭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도 한데, 미국은 세계적인 반핵운동이 전개되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안을 가지고 나옵니다.

1953년 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처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연설합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원자로를 미국이 지배하는 체제로 가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물론 일본에서는 원자력의 이용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원자력 발전이나 원폭이나 동일한 방식이니까요. 그러나 미국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일본에 제안합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미국은 '원자력 평화적 이용을 위한 박람회'라는 것을 세계적으로 개최하게 됩니다. 물론 일본에서도 대대적으로 개최했지요.
 
놀랍게도 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박람회를 주최한 사람이 <요미우리신문> 창립자인 쇼리키 마츠타로(正力松太郎, 1885-1969, 경찰관료 출신으로 프로야구 도입, <요미우리신문> 창간. 미국 비밀문서에는 오랫동안 CIA의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음)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공개된 극비자료들에 의하면 이 사람은 미국의 스파이였습니다. 그와 함께 재계나 정계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캠페인을 한 것입니다. 

1955년이라는 해는 원수협이 주최한 히로시마 원수폭금지 세계대회가 있었고, 역설적으로 일본에서는 이 운동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연결됩니다. 아직 세계적으로 원수폭 금지라는 슬로건이 넓어지기 직전이었습니다. 당시 좌익들만 아닌 약 1000만 명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서 전달한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큰 운동을 한 것입니다. 심지어 그 해 히로시마에서 핵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대회를 하자는 안도 있었습니다.

당시 전시를 해야 하는데, 공간이 없어서 원폭 자료관의 사진을 내려놓고 그 안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대회를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 말도 안 되는 역설적인 장면이었지요. 이것이 바로 큰 문제였습니다. 한편에서는 원수폭 금지를 이야기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 핵의 평화적 이용을 하자는 것이었으니까요.

저는 1957년에 처음 히로시마에 갔는데, 그때 처음으로 원폭 자료관을 봤습니다. 당시 원수협 사무국에서 일했는데, 그곳은 어두운 방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별실로 들어가니 갑자기 밝아지면서 '미래의 에너지'라는 전시 공간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주제로 한 전시 공간이었습니다. 그 전시회 방식은 사실 점령군이 했던 것과 거의 동일했습니다.

하지만 1956년 이 전시회를 히로시마에서 하게 됩니다. 1955년 원자력 평화적 이용 전시물을 원폭 전시관에 기부하기로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 의미를 잘 몰랐는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1954년에 비키니 섬 수폭 사건(3·1 사건)이 있었고, 같은 날 나카소네 외 3명의 의원이 처음으로 원자력 예산을 제안하게 됩니다. 제안 취지는 전쟁 병기는 점점 진화하고 있으며, 원자력 기술을 완전히 배우지 않는 한 일본이 근대 병기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취지였습니다. 초기 목적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가까웠습니다.

조+이 : 한·미·일 보수층의 원전 추진 배경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평화운동 측은 왜 원전의 평화적 이용을 받아들이게 되나요.

무토 : 앞서 설명한 것처럼 대중적인 캠페인에 의해 일본 사회는 대중들이 핵의 평화적 이용은 좋은 것이라는 인식을 하게 됩니다. 미국의 전략이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지요. 제2회 원수폭금지 세계대회는 나가사키에서 열렸는데, 이 대회에서 참가자들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히로시마 피폭자 협회도 지지 선언을 했지요. 당시 각 단체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지지하게 된 데에는 원폭 피해를 유일하게 받은 민족인데,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피해받았기 때문에, 평화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논리이지요. 이것은 전후 일본 국가를 아는데 대단히 중요한 과정입니다.

물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하나는 미국이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 정부 내부의 핵원자력 무장이라는 흐름이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 나카소네의 제안 취지문에는 '병기'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국회 제안서에는 그 단어가 없어졌지만, 지배층에게는 그런 취지가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당시 과학에 대한 인식도 문제가 됩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하는 논리와 인식이 지배적이었죠. 전쟁에 사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과학은 인류의 위대한 공헌이다'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과학자협의회에서 하나의 중요한 논쟁거리이기도 했습니다. 과학자협의회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자주적, 민주적, 공개적으로 되어야 하며 군사 목적은 안 된다는 식이었지요. 당연히 그런 전제 위에서 찬성한다는 논리였습니다. '과학은 진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지요. 인류의 행복을 만든다는 인식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좌익도 과학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좌익도 이를테면, 소련의 5개년 계획과 미국의 테네시 강 개발 계획도 중요한 진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좌익 도큐다 게이치가 '도네 강 개발계획'을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일본 공산당도 포함해서 모두가 과학을 신뢰한 셈이지요. 당시에는 과학에 의한 자연개조라는 사상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핵에너지는 에너지의 해방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원수금과 원수협의 분열을 가져온 중소(中蘇)분열과 공산진영의 핵실험

조+이 : 원수협과 원수금이 갈라지는 계기는, 그러면 핵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가요? 원수협-원수금, 찬성-반대의 입장이었습니까.

무토 : 1963년 소련은 '핵실험을 하는 나라는 인류의 적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런 소련이 1964년에 핵실험을 했습니다. 소련은 자신의 핵실험은 평화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고, 이것은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이라는 논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의 핵실험에도 죽음의 재는 방출되었지요. 궁색한 논리였습니다. 그때 극단적으로 일부 활동가는 '소련의 죽음의 재는 해(害)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소련의 핵실험에 대해 각 지역 활동가들은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원수폭금지 세계대회에서 발표해 온 결정들을 무시하고, 상황 설명으로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 얼마나 나쁜 제국주의인지', '소련의 핵실험을 어떻게 합리화할 것인지', 그들의 고민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특히 2200만 명의 반핵서명을 모은 풀뿌리 운동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분열 요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반핵운동이 분열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소련 핵실험에 대한 입장 차이가 바로 분열의 시작이었습니다. 
 
결국 일본의 반핵운동은 공산당계가 모인 원수협과 사회당과 총평이 모인 원수금으로 분리되게 된 것입니다. 공산당과 사회당 계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공동의 세력들이 반핵 운동에서는 공동으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입장도 난처해졌습니다. 지역 현(現)의 연합 운동체들은 분열하지 말고 연대하라고 공동으로 압력을 가하기도 했지요. 원수협은 어떤 나라 핵실험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어떤 나라 핵실험은 찬성하는 모순적 입장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원수금의 경우에는 원수금 참여자 모두가 사회당과 총평의 입장으로 통일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수금에는 공산당과 선을 그은 독립적인 좌파들도 참여했기 때문에 운동이 더욱 다양화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원수금 소속 단체는 비키니 섬에 대한 조사도 하게 되었지요. 주목할 것은 '일본만이 유일한 피폭 국가가 아니다'라는 것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발전, 즉 '핵과 원자력은 동일한 원리로 이용된다'는 입장에서 원수금에 여러 제언을 한 단체도 있었습니다.  

조+이 : 중소(中蘇)분열의 영향이 핵실험을 둘러싼 대립으로 표출된 시기인데, 이 시기 일본의 좌익운동은 어떤 영향을 받게 됩니까.

무토 : 이 시기는 중소(中蘇)논쟁이 공개되는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50년대 중반부터는 중소논쟁이 있었지요. 1956년에 세계공산당대회에서 중소가 공동성명을 내기도 했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일본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의 평화공존 노선에 대해서 수정주의라고 비판하며, 중국 공산당과 동일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60년대 중반, 그것은 결국 분열하기 전 단계였습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고 있었고, 미야모토 겐지 서기장(宮本顯治, 1908-2007, 1931년 일본공산당에 가입. 일본 공산당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이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었습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과 일본 공산당의 공동성명을 채택하려고 했으나, 모택동이 반대했습니다. 그는 소련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너무 약하다고 반대했던 것이지요. 이것을 계기로 일본 공산당의 입장이 급격하게 반(反)중국 공산당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일본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도 일본 공산당도 반대하는 형국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60년대 중반, 당시 베트남과 북한이 일본 공산당의 몇 안 되는 유일한 친구가 된 셈입니다. 하지만 60년대 후반, 김일성 주의가 강조되면서 북한과도 금방 나빠지게 됩니다. 유일하게 베트남 공산당과의 우호 관계만이 지속되었지요. 이처럼 60년대 일본의 반핵운동 분열은 원수금의 중소분열 속에서 특히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70년대 중반이 되면서 일본 좌파운동에는 이렇게 분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었습니다. 생협 연합회 등을 중심으로 '원수폭금지 세계대회만은 함께 하자'라는 제안이 있었죠. 그래서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원수폭금지 세계대회를 공동으로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80년대 일본 공산당 내부에서 다시 내분이 일어났고, 결국 제명파동이 일어나면서 원수폭금지 세계대회도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중적인 운동을 지향하는 그룹과 지식인적 그룹이었던 요시다 요시키요(吉田嘉淸, 1926-, 일본의 사회운동가, 원수협 대표이사를 역임, 평화사무소 설립)와 쿠사노 노부오(草野信男, 1910-2002, 동경대교수, 원수협 대표위원)이 일본 공산당에서 제명당하게 됩니다.

원수협은 UN 소속 NGO이기 때문에 유엔 군축회의에도 참여했는데, 1984년경에는 다시당파적인 기구가 됩니다.84년 이후 세계대회는 원수협이 독자적으로 개최하고 있습니다. 결국 원수협은 1986년 4월 체르노빌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이에 대해서 발언을 못하게 됩니다. 소련의 핵을 인정했는데 결국 소련의 핵이 거대한 비극을 불러 온 것이니까요.

제2부에 계속...

ⓒ조희연, 이영채

* 이 인터뷰는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의 후원으로 진행됐으며 시민사회신문에도 요약본이 실릴 예정입니다.

인터뷰 진행자

조희연 교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현재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대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학술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 역임. 저서로는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빈곤과 계로>, <박정희와 개발독재체제>, <동원된 근대화> 등이 있다.

이영채 교수 : 일본 케이센대학교(惠泉女學院大學校) 국제사회학과 교수. 케이오대 및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일본 PARC(아시아태평 자료조사센터) 연구원 및 현장잡지 <노동정보> 편집위원 역임, 야스쿠니 반대 동아시아 촛불행동 일본실행위 사무국장. <참세상>에 일본사회운동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일본의 노동현장 잡지 <노동정보>에 한국의 사회운동의 글을 연재하는 등 한일시민/민중연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初恋」からノムヒョンの死まで』(梨の木舎),『なるほど!これが韓国か--名言・流行語・造語で知る現代史』(朝日新聞社),『IRISで分かる朝鮮半島の危機』(朝日新聞社)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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