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프랑스 르몽드가 발행하는 외교전문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LMD) 2월호에 실린 미 시카고대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북핵 위기 관련 논평기사 '북한의 핵협박'의 주요 내용이다.
미국인 학자 중 한반도문제에 가장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커밍스 교수는 이 글에서 현재의 북핵 위기는 부시행정부가 자초한 것이라면서 유일한 해결책은 "빠른 시일내에 2001년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서 첫 위기때에 클린턴 대통령과 김정일이 찾아낸 것과 같은 필연적인 해결책이 있는지 아직도 이것이 가능한지를 알아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커밍스 교수는 특히 지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클린턴행정부의 윌리엄 페리 대북특사가 북한과의 미사일협상을 진행할 때 이미 미국은 북한의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을 알고 있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북협상을 계속한 것은 "미사일에 대한 합의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계속 추진해 가는 일환으로 그 사용을 동결시키는 것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일부 소식통들에 의하면 클린턴 행정부가 떠나면서 북한이 파키스탄의 우라늄 농축 기술을 도입하고 있는 것에 관해 입수된 정보들을 '브리핑'했다"고 전하면서 "그런데도 부시 행정부는 2002년 7월 이전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오히려 "부시 대통령의 집권 직후, 대통령의 보좌관들이 이 조약을 사문(死文)으로 간주한다는 단언을 했기 때문에 (북한 위기의 발발은) 사실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의 성격을 띠"게 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취임 직후 클린턴행정부가 추구해 왔던 대북협상 노선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북핵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커밍스 교수는 이어 부시행정부가 "2002년 9월 이라크 관련 대량살상무기 사안을 유엔 안보리와 국제원자력기구에 의뢰하기로 결정한 것이 평양이 현재의 위기를 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면서 부시 대통령은 "우선 사담 후세인, 다음으로는 북한, 그 후에는 이란이라는 순서대로 일을 진행하려고 했으나 다급해진 김정일이 (핵문제를 들고 나와 미국의) 작전수행 질서를 뒤흔들어 놓은 것"이 이번 북핵 위기의 본질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핵확산금지조약에 따르면 핵보유국은 비핵국가에 대해 핵사용 위협을 하지 못하도록 명백히 규정돼 있는 반면 지난 96년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방어적 목적의 핵무기 사용에 대한 정당성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북한에 대한 핵사용 위협보다는 북한의 핵보유 노력이 오히려 국제법적으로 명분이 있는 행동이라고 커밍스 교수는 지적했다.
***북한의 핵협박/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월호**
1991년 부시 1세의 미 행정부는 흑연 원자로가 있는 북한 영변 핵 단지의 활동들에 대해 염려했었다. 그렇지만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는 핵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국가가 핵무기에 의한 위협을 받을 경우, 방어권을 승인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에다 핵무기를 갖추어 두고 있었다. 부시 1세는 평양과 첫 협상을 개시했고 그가 백악관을 떠나기 바로 전 한국에서 미국의 핵무기가 철수되었다. 1993년 1월 클린턴이 집권하면서 북한 관련 외교가 타격을 받았다. 그는 경제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 초기에는 북한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클린턴 집권 6주가 지난 후,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이 미 정보기관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했다. 북한은 안보리가 징계조치를 취하면 이를 "전쟁 행위"로 규정하겠다고 했다. 김일성이 이런 식으로 촉발시킨 위기는 18개월간 지속되게 되었고, 1994년 북한이 5~6개의 핵폭탄을 제조하기에 충분한 플루토늄이 함유되어 있는 8천개의 폐연료봉을 영변의 원자로에서 회수했을 때 이 문제는 극적으로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94년 6월 말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막 전쟁을 선포하려 할 시기에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으로 날아가 김일성과 직접 회담을 갖고 영변 지구 전체의 핵동결 약속을 받아냈다.
미국과 북한간에 이루어진 1994년 10월의 기본 조약은 이 약속을 공인하는 절차였다. 국제원자력기구는 영변의 원자로에 봉인을 했고, 폐연료봉들을 콘크리트 저장고에 보관하여 지난 8년간 관련시설을 감시했다. 이후 클린턴 행정부는 평양이 그들의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는 대가로 경제적 원조를 제안함으로써 포괄적인 합의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했다. 1998년과 2000년 사이에 윌리엄 페리(William Perry)는 상호적 재인식(재평가, 인정) 및 북한 미사일 전체 매입을 위한 준비작업을 했다. 이는 미 정보기관이 북한이 1998년부터 새로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관련된 기술들을 도입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보유하고 있는 때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 당시 공화당측에서는 클린턴 행정부가"깡패 국가"에 영합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언성을 높였다.
현재의 위기는 공식적으로는 2002년 10월 3일에서 5일 사이에 이루어진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리(북한의 핵 프로그램 재개에 관한 증거를 지닌)의 평양 방문 이후에 발발되었다. 북한은 처음에는 부인하다가 사실을 인정했다. 1998년 평양은 이슬라마바드측과의 합의를 통해 파키스탄의 우라늄 농축 기술의 대가로 북한의 미사일을 제공하기로 한 듯하다. 우라늄 농축은 진척이 느리지만 대여된 원심분리기를 가지고 북한이 노력에 박차를 가하면 파키스탄 모델을 본따 다루기 쉽지 않은 매우 큰 규모의 핵 폭탄을 연간 한 두 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켈리 차관보가 워싱턴에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의 한 고위관리가 기자들에게 영변 원자로 동결에 대한 1994년 기본조약은 무효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부시 대통령의 집권 직후, 대통령의 보좌관들이 이 조약을 사문(死文)으로 간주한다는 단언을 했기 때문에 (북한 위기의 발발은) 사실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의 성격을 띠는 일이었다. 2001년 9.11 사태가 발생한 다음인 2002년 1월 워싱턴은 예방적 전쟁 전략을 위한 미국의 억제정책을 포기하면서 "악의 축"이라는 것을 고안해 내었다.
2002년 12월 27일 북한은 또 다시 IAEA 사찰관들을 추방(이들이 워싱턴의 하수인들이라고 규탄하면서)하고 난 다음 영변에서 새 연료봉들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2003년 1월 10일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하면서 유엔 안보리의 모든 대북한 징계조치들은 "선전포고"로 간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북한은 폐연료봉 저장고를 개봉하는 데까지는 나아가고 있지 않다.
***궁지**
초기에는 워싱턴측에서 북한과 협상하는 것은 "핵 협박"에 굴복하는 것이라면서 이를 거부한다는 것을 과시하듯이 내세웠다. 1946년 김일성의 집권때부터 미국이 그랬듯이 북한의 체제를 인정한다는 것도 고려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 입장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내용들은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으며 이 사안과 관련해 혹은 다른 어떤 문제들과 관련해서도 한국에 전쟁을 유발시키지 않을 것이다"는 클린턴 대통령의 국방장관 발표로 진술되었다. 하지만 유엔에 의해 취해진 징계조치들로 인해 "북한이 전쟁에 돌입한다면 그 경우에는 우리(미국)가 위험을 감수할 것이다"라고도 말했다. 게리 럭(Gary Luck)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은 새로운 전쟁은 6개월의 시간을 요할 것이며, 10만명에 이르는 미국인 희생자를 발생시킬 수 있다고 미 대통령에게 알림으로써 클린턴은 이 위험한 일을 감행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2002년 9월 이라크 관련 대량살상무기 사안을 유엔 안보리와 국제원자력기구에 의뢰하기로 결정한 것이 평양이 현재의 위기를 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부시 대통령은 "악의 축"에 대항해 우선 사담 후세인, 다음으로는 북한, 그 후에는 이란이라는 순서대로 일을 진행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다급해진 김정일이 작전수행의 질서를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부시 행정부가 가장 완고한 현실주의와 메시아적 이상주의가 혼합된 외교 정책을 펼쳐온 지 2년 후 예방 차원의 공격의 위협 대상이 되는 "악의 축" 국가 중 하나가 선수를 쳐서 미 대통령을 궁지에 몰아 넣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김정일이 한 일은 이에 해당할 뿐이다. 최근 그의 도발적 언행들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동안 그의 입장을 견고하게 해 주었다. 북한은 미국이 동시에 비중있는 전쟁을 두 군데에서 수행할 수 없다고 가정한다. 더구나 부시 대통령은 또 다시 비참한 결과를 가져 올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부시 자신이 북한의 중ㆍ장거리 미사일을 사들이고 핵 동결을 지속시켜 가기로 한 클린턴의 노력이 거의 성사되려고 하는 것을 종식시켜 버린 장본인인 것이다.
일부 소식통들에 의하면 클린턴 행정부가 떠나면서 북한이 파키스탄의 우라늄 농축 기술을 도입하고 있는 것에 관해 입수된 정보들을 "브리핑"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부시 행정부는 2002년 7월 이전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많은 전문가들은 평양이 이러한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그들의 약속과 분명히 어긋나는 일을 했다고 평한다. 그렇지만 미사일에 대한 합의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계속 추진해 가는 일환으로 그 사용을 동결시키는 것은 가능했다. 부시 행정부는 계획(의견)을 달리 함으로써 해결 가능한 문제를 심각한 위기로 변모하게 만든 것이다. 이로써 양쪽 모두 (이 사안과 관련해) 수를 쓸 여지가 별로 없다.
위험은 북한의 예측 가능한 도발적 행위들과 부시 대통령의 예방 차원의 전쟁 논리(즉, 미국을 먼저 공격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국가를 미국이 선제 공격할 수 있는 권리) 등이 결합된 여러 요소들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러한 위태로운 상황에 한반도에 존재하는 견제 구조에 대항하는 새로운 위협이 가세되었다. 1989년에서 1992년까지 한국에서 군 정보부 책임자였던 제임스 그랜트(James Grant) 장군에 따르면 정밀한 무기 분야에서 미국의 진보로 인해 여태까지 공략이 불가능해 혹시라도 남한이 공격해 올 경우 북한에게 주된 성벽 구실을 하게 될 서울 북쪽 산들에 배치된(감추어진) 대포들을 제거시킬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럴 경우 신뢰할 수 있는 안전 장치가 없으면 평양의 장군들은 더 신뢰할 만한 억제 수단(핵무기)을 목표로 하게 될 것이다.
1998년 초부터 김대중 대통령의 노력으로 남북한간의 화해를 위한 엄청난 진척들이 이루어졌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사태들은 더욱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1945년 이래 처음으로 남북한 양국의 지도자들이 2000년 6월 평양에서 악수를 나누었다. 2002년 12월 한국인들은 모든 예상과 달리 노무현 후보를 신임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냉전적 정치시스템과 단절했다. 노무현 당선자는 1980년대 군사독재의 암울한 시절에 노동자들을 옹호해 주고 인권 존중을 지지하는 입장의 용기 있는 변호사라는 경력을 지니고 있다.
젊은 층에서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고개를 들고 있다. 노무현 당선자의 정부는 현 위기에 있어 미국의 책임이 있는 점들에 대해 확실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부시 대통령은 북한과 한국이라는 국가들과 아주 까다로운 관계를 다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핵확산금지조약은 한 가지 핵심적 원칙에 의거한다. 즉 핵 보유국들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국가들에 대해 위협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1968년 유엔의 핵확산금지조약을 비준 공인시키기 위해 핵을 보유하지 않은 나라들의 표를 얻으려고 미국 영국 소련은 "핵무기를 사용한 공격 또는 위협으로 인해서 피해를 입게 되는" 모든 경우에는 그들이 도와줄 것을 약속했다(1968년 3월 7일 안보리 결의문 255호).
1996년 헤이그의 국제 법정에서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핵무기로 위협을 하는 일을 "최종적 악"으로서 금지할 것을 권장했다. 그런데 이 법정은 방어적 차원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본 법정은 한 국가의 존속 자체가 걸려 있는 방어를 위한 극적인 상황들에서 핵무기로 위협을 하거나 이를 사용하는 일이 합법적인지 아닌지에 대해 최종적인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 의하면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일은 미국이 핵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북한을 소멸시키겠다고 위협하는 것보다는 (정당한) 근거가 있다.
처음에는 호전적 접근방식을 썼지만 2003년 1월 13일 부시 행정부는 "대화"에 나설 용의가 있다고 발표하면서 이는 단지 핵무기 프로그램을 해체시키는 것에 국한된다고 했다. 반면 평양은 보다 폭넓게 경제적 원조와 미국의 불가침조약이 포함되기를 원한다. 1월 20일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안보리가 북한의 NPT 탈퇴 문제를 맡을 것을 요구하며 북한 사안을 국제화하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의견이 대립되었다. 여하튼 전쟁을 막는 방법 중 하나는 빠른 시일 내에 2001년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서 첫 위기때에 클린턴 대통령과 김정일이 찾아낸 것과 같은 필연적인 해결책이 있는지 아직도 이것이 가능한지를 알아보는 것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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