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신용평가기관 무디스가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를 다각도로 '검증'했다.
'일개 신용평가기관이 일국의 차기 대통령을 검증하다니' 하고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일이나 '검증'인 것만은 분명하다. 무디스가 종전 방한때에는 재경부, 금감원, 한국은행, KDI(한국개발연구원) 등을 찾았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인수위 방문에 포커스를 맞춘 대목 하나만 봐도 그러하다.
무디스는 21일 아침부터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찾아 2시간반 동안 노 당선자의 경제정책을 꼬치꼬치 물었다. 김진표 인수위 부위원장의 브리핑에 따르면, 무디스가 중점점검한 대상은 노 당선자의 노동정책, 대북한정책, 그리고 7% 성장론이었다. 평소 노 당선자에게 무엇을 불안하게 여겼는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무디스는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을 결정하는 신용평가기관뿐 아니라, 외국투자가의 시각을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부와 인수위는 지난 17일부터 여러 차례 대책을 협의했고, 이에 이날 나온 답변은 향후 노무현 정부의 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 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노동시장 유연화, 재정투자 늘린 뒤 본격 추진**
김진표 부위원장은 무디스와의 면담후 기자들에게 주요 면담 내용을 공개했다.
토마스 번 아태담당국장을 단장으로 한 무디스 방한단이 우선적으로 관심을 보인 대목은 예상대로 노 당선자의 노동정책이었다.
인수위는 이에 대해 "비정규직 근로자가 56%에 달할 정도로 노동시장 유연성이 결코 낮지 않다"며고 "대기업 노조에서 노동유연성을 높이는 제도개선에 반대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직장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가 제약돼 있기 때문"이라며 한국 노동시장의 특수성을 무디스측에 설명했다고 김 부원장은 전했다.
인수위는 아울러 "새 정부는 사회안전망을 보강하고 일자리 창출과 이직이 쉽도록 재정투자를 늘려 인프라를 갖춘 뒤 노동유연성을 높이도록 제도를 개선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김 부위원장은 밝혔다.
이같은 인수위의 답변은 지난 13일 노무현 당선자와 맥킨지측이 만났을 때 맥키지가 조언한 내용과 상당 부분 일치해 주목된다. 당시 맥킨지는 DJ정부의 노동정책을 평가하면서 "아일랜드의 경우 GDP(국내총생산)의 4%를 실질자 재교육 등에 투여해 노동시장 유연화의 충격을 줄인 반면 한국의 투여액은 GDP의 0.7%에 불과하다"며 노동시장 유연화에 앞서 실질자 재교육 등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한 투자를 과감히 늘릴 것을 조언했었다.
***"7% 성장은 장기목표치"**
무디스가 노사정책 다음으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 것은 노 당선자의 '7% 성장' 공약이었다. 대선 기간에도 내내 국내외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서 우려를 낳았던 대목에 대한 질의였다.
무디스는 "새정부가 성장목표를 7%로 정하게 되면 인플레이션과 국제수지 악화를 가져오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김진표 부위원장은 이에 대해 "인수위가 지속적인 구조조정, R&D(기술개발) 투자확대, 과학기술혁신, 여성인력 활용 등을 통해 '잠재성장률'을 임기말까지 7%로 끌어 올리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인수위는 "이에 따라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는 현재 잠재성장률이 5%대이기 때문에 5%정도로 보고 있다"며 "잠재성장률이 높아지지 않았는데 경기를 인위적으로 부양하는 것은 가급적 자제하겠다는 것이 당선자의 기본적 입장임을 설명했다"고 덧붙였다.
7% 성장은 장기목표치일뿐 집권초기에 인기를 끌기 위해 과도하게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정책은 절대로 취하지 않겠다는, 자못 식은 땀 흘린 해명이었다.
아무리 선거기간중이라 할지라도 결코 과도한 성장목표치를 공약으로 내걸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새삼스레 일깨워주는 대목이었다.
***"북핵문제 경제에 부담 안되겠냐"**
당연히 북핵문제도 무디스의 비상한 관심사였다.
무디스는 "북핵문제가 경제운용에 부담이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새 정부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한반도 전쟁발발 억제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리스크 부담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김 부위원장은 전했다.
무디스는 '북핵문제'와 관련해선 인수위 경제1,2분과외에 인수위 외교통일안보분과와 별도로 간담회를 갖기도 해 북핵문제에 관한 무디스의 관심이 얼마나 큰가를 드러냈다.
이에 앞서 무디스는 20일 금융감독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촛불시위 등 최근 한국의 반미기류 확산 등에 대해서도 비상한 관심을 보여, 북핵문제로 야기된 반미감정 확산 문제가 무디스의 주요 체크 포인트임을 드러냈다.
***재벌개혁 방향은 긍정적 반응 보여**
무디스는 그러나 노 당선자의 재벌개혁이나 투명성 제고 방향에는 긍정적 평가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부위원장에 따르면, 인수위는 구조조정문제와 관련해 "한국경제가 이미 세계경제에 깊숙이 편입돼있는 만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기업.시장.노사관계를 꾸준히 개선해나갈 것이며 현 정부의 개혁정책기조를 그대로 승계하되 다만 현 정부 후반부에 미진한 것으로 지적됐던 부분을 점검해 박차를 가하겠다"고 밝혔다.
인수위는 또 DJ정부와 새 정부의 경제정책의 차별성이 뭐냐는 무디스의 질문에 대해 "기업구조조정에 있어 5+3 원칙을 유지하고 시장중심의 상시구조조정체제를 구축하는 등 기본 정책방향은 현 정부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면서 "노 당선자의 정책운용 스타일이 정치권과의 공감대 형성을 통해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답했다.
요컨대 DJ정부의 구조조정 노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무디스에게 DJ의 정책노선을 승계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답을 한 셈이다.
무디스는 인수위에 앞서 20일 금감원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재벌개혁 방향에 대한 강한 관심을 드러냈었다. 국제협력실 유지홍실장은 이와 관련, "무디스가 금융사 및 기업 지배구조 및 회계투명성, 공정공시 등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전했다.
***조흥은행 매각, 통합 금감원에도 깊은 관심**
이날 국내경제계의 또다른 관심사중 하나는 무디스가 과연 조흥은행 매각이나 하이닉스 처리 같은 현안에 대한 질문을 했느냐였다.
김 부위원장은 이와 관련, "오늘 면담에서는 구체적 기업처리 방향이나 신용등급 상향문제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수위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정치권의 개입으로 지연 조짐을 보이고 있는 조흥은행 처리 문제등에 대한 무디스의 언급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오는 23일 열리는 공적자금위원회 전체회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가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밖에 무디스는 최근 주도권 문제를 놓고 상당한 논란을 빚고 있는 금감위-금감원 통합에 대해서도 비상한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종구 금감위 상임위원은 이와 관련, 20일 무디스 방문뒤 "무디스가 특히 감독기구의 조직개편에 대해서도 질문이 있었다"며 이에 대해 "감독기구 조직개편에 대해서는 법을 바꾸는 일이 수반되기 때문에 시일이 필요하며 노무현 당선자가 취임을 해야 입장을 정리할수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전했다.
무디스가 최근 관료들 사이에서 점차 노골화되고 있는 통합 금융감독기구의 정부기구화(가칭 금융부) 움직임을 비판적 시각에서 지켜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분간 신용등급 상향은 힘들듯**
방한 기간중 드러난 무디스의 의구심과 우려는 우리나라 신용등급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노무현 새 정부가 과연 어떤 정책 방향을 취해야 할 것인가를 드러내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무디스의 이번 방한은 '노무현 점검'의 성격이 짙으며, 따라서 당분간 신용등급 상향을 기대하기란 힘들어 보인다는 게 지배적 평가다.
재경부의 권태신 국제금융국장은 이와 관련, 21일 회의 시작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르면 2월중에라도 무디스 등급이 상향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힘들 것 같다. 북핵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고 답해 이른 시간내 등급상향이 어려울 것임을 시사했다. 그는 "1년내 등급 조정이 이뤄질 가능성이 60~70%"라고만 덧붙였다.
권 국장은 또 '무디스가 등급을 낮출 수도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라고 말해 정부가 내심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가를 드러내기도 했다.
흔히 '월가의 거울'이라 불리는 무디스의 이번 방한은 IMF사태후 대외의존도가 급속히 높아진 한국경제의 운항이 얼마나 간단치 않은가를 보여주는 반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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