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북한 핵문제에 대한 압박 공세가 점차 가열되며 북미관계는 물론 정상화조짐을 보이던 북일관계와 남북관계마저 경색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미국은 제네바합의의 마지막 실마리라도 붙잡으려는 한국과 일본의 대북중유지원 방침에 반대의사를 표명하며 남북경제협력에도 제동을 걸고 있어 12월 대선을 앞두고 내정간섭이 본격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낳고 있다.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이유로 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른 대북 중유지원 중단을 강력히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지자 북한의 한 고위관계자는 13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제네바합의가 파기된 것과 다름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미국은 기본합의 중 북미 관계 정상화 추진, 상대방에 대한 위협 금지, 원자력 발전소 2003년까지 완공 등 3개항을 이미 위반했으며 만일 중유지원까지 중단한다면 중대 위반사항이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고위관계자는 북미 기본합의가 이미 파기돼 더는 지킬 의무가 없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명백한 대답을 회피한 채 "이 문제에 대해서는 평양에서 입장표명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은 한 가닥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냉기류는 이미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지난 10월 29일부터 30일까지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제12차 북일수교회담은 북한 핵문제와 피랍일본인 문제해결에 대한 이견으로 진전을 보지 못했으며 지난 8일 평양에서 종료된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3차회의도 별 다른 진전 없이 추후 일정을 합의하는 데 그쳤다.
특히 한국의 대북경제협력 정책에 대한 미국측의 중단요구도 점차 커지고 있다. 지난 주 한국을 방문해 '남북경제협력 추진속도를 조절하라'고 밝힌 더글라스 파이스 미 국방차관의 발언은 미국이 말로는 국제공조를 외치지만 실질적으로는 '나를 따르라'는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사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지난 7일 이한에 앞서 용산 미8군 사령부내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파이스 미 국방차관은 외신기자들에게는 자유취재를 허용한 반면 국내언론사 가운데는 동아 조선 중앙일보를 비롯해 연합뉴스 SBS 기자들에게만 취재를 허용했다. 우리나라의 언론사 선정에 있어서도 부시 행정부가 간여하고 있음이 나타난 사건이다. 하지만 한국 언론들은 이 사건에 대해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 과연 한국언론이 주권국가의 언론이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조합원 1만8천여명의 한국 현업언론인 조직중 최대단체인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 위원장 김용백)은 이와 관련, 11일 '미국의 내정간섭에 침묵하는 우리 언론'이란 성명을 통해 "미국의 일방적 내정간섭에도 침묵하는 우리 언론은 과연 주권국가의 언론인가"라고 비판했다.
언론노조는 "미국의 파이스 국방차관이 우리 땅에 와서 한국 정부에게 남북경협의 추진 속도를 조절하라고 지시했다"며 "이는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의 대외정책을 뒤흔드는 명백한 내정간섭"이라고 지적했다. 언론노조는 또 "문제의 발언이 있은 파이스 차관의 기자회견 형식도 문제였다"며 "미국으로부터 출입이 허용된 언론사들은 대부분 족벌경영의 폐해로 인해 온 국민의 지탄대상이 된 언론사"들이라고 주장했다.
언론노조는 "(사건의 본질엔 침묵한 채 받아쓰기에 급급한) 이번 사건을 보는 우리 언론의 시각이 더 문제"라며 "우리 언론은 이번 기자회견의 부당한 취재제한과 내정간섭 수준의 발언을 전 국민에게 올바로 전달해야 한다. 그것이 주권국가의 언론이 지켜야 할 기본적 도리"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언론노조 성명서 전문.
***미국의 내정간섭에 침묵하는 우리 언론**
'미국의 일방적 내정간섭에도 침묵하는 우리 언론은 과연 주권국가의 언론인가'.
지난 주 우리는 열린 귀를 의심케 하는 충격적인 뉴스를 접했다. 미국의 파이스 국방차관이 우리 땅에 와서 한국 정부에게 남북 경협의 추진 속도를 조절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의 대외정책을 뒤흔드는 명백한 내정간섭이다.
문제의 발언이 있은 파이스 차관의 기자회견 형식도 문제였다. 미국은 지난 7일 용산의 미 8군 사령부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면서 외신에게는 자유취재를 허용한 반면 국내 언론에는 조선, 중앙, 동아일보와 연합뉴스, SBS로 그 출입범위를 제한했다. 미국으로부터 출입이 허용된 언론사들은 대부분 족벌경영의 폐해로 인해 온 국민의 지탄대상이 된 언론사이다.
파이스 차관은 "북한이 국제합의를 위반하고서도 면책받고 다른 나라와 정상적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선 안된다"고 발언했다. 한국 정부가 현재 추진중인 남북경협을 중단하라는 일방적 지시나 다름없다. 美 차관의 말대로 한다면 대한민국이 대외정책을 추진할 때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로 해석된다.
반대로 미국은 중국, 일본, 소련 등 우리 주변국들과 회담할 때 당사자인 우리 정부당국과 어떠한 사전협의도 거치 않고 일방적으로 회담을 진행하고 있다. 미국이 한·미 공조를 논할려면 이 문제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이번 사건을 보는 우리 언론의 시각이 더 문제다. 파이스 차관의 이번 기자회견을 계기로 미국의 일방통행식 외교가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데도 MBC를 제외한 모든 국내 언론이 美 차관의 '제한적 기자회견'에 대한 어떠한 비판의 목소리도 내지 않고 있다.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미국이 우리 땅에 와서까지 우리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는데도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못한다면 주권국가의 언론임을 포기한 것이다. 그런데도 회견장에도 못 들어간 대부분의 우리 언론들은 타사의 자료를 받아 美 차관의 발언내용을 옮겨 적는 데 급급했다. 우리 언론은 이번 기자회견의 부당한 취재제한과 내정간섭 수준의 발언을 전 국민에게 올바로 전달해야 한다. 그것이 주권국가의 언론이 지켜야 할 기본적 도리다.
이같은 미국의 태도는 지난달 끝난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부시 정권은 재신임을 통해 굳어진 자국의 보수세력을 결집해 전 세계를 향한 전쟁책동을 일삼을 것이 뻔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번 기자회견으로 표현된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양대 공영방송사인 KBS, MBC에 대한 취재제한은 그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이번 사태에 대해 미군 당국의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촉구한다. 우리 국방부도 이같은 미국의 태도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말고 자주적 입장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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