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와 한겨레는 각각 우리나라의 보수지와 진보지임을 자처한다. 그래서인지 두 신문의 논조는 대북관계를 비롯해 경제정책, 교육평준화 등 각종 사회문제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다른 시각으로, 때로는 완전히 대조적인 관점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31일자 조선일보와 한겨레가 함께 다룬 취업난 보도 또한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의 중산층과 주류사회를 대변하겠다는 조선일보는 취업난을 '고학력 최악의 취업전쟁' 제하의 머릿기사와 함께 13면 '명문 이공계 석사도 서류전형서 20번 넘게 떨어져'라는 기획특집으로 다루며 명문대학 출신들과 석박사 학위 이상의 고학력자들이 느끼는 취업난에 초점을 맞췄다.
<사진 동일한 주제인 취업난을 다루면서도 대조적인 관점에서 보도하고 있는 조선일보(왼쪽)와 한겨레 31일자.>
반면 한국 사회의 기층민중과 소외된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는 한겨레는 1판 사회 2면(18면) '취업 비명문대 설움 여전'이란 기사에서 취업문이 좁아지자 서울지역 비명문대생들과 지방대생들의 취업난은 더욱 심각해졌다고 보도했다.
같은 취업난을 다루면서도 한 신문은 IMF를 피해 석ㆍ박사를 취득했거나 소위 명문대를 졸업한 사람들의 취업이 어렵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다른 신문은 고학력ㆍ명문대 출신들의 취업난보다 비명문대생들의 취업난이 더욱 심각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 "고학력 인력시장에서 최악의 취업난"**
구체적인 보도내용을 살펴보자. 조선일보는 1면 '[高학력 취업전쟁] 4분기 대기업 경쟁률 30~120 대 1'이란 머릿기사에 'IMF때 진학 석·박사 한꺼번에 쏟아져-내년 경기 불투명 … 더 '좁은 門' 예상-3D업종 기피로 고졸 이하는 구인난'이란 부제를 붙였다.
조선일보는 기사에서 "국내외 경기 전망이 불투명해지는 가운데, 이른바 'IMF 취업난'을 피해 석·박사 과정에 진학했던 인력들이 신규채용 시장에 대거 쏟아져 나오면서 대졸 고학력 취업난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며 대기업 공채 경쟁률이 높아지자 "특히 석·박사, 공인회계사(CPA), 해외 경영학 석사(MBA) 소지자와 같은 고(高)학력 인력시장에선 최악의 '취업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가 인용한 발언은 '경기악화로 고학력 인력들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의 분석이며, 인용한 사례는 "1급 명문대 석사학위와 원어민 수준의 영어실력을 갖고도 서류전형에만 스무 번 떨어졌습니다"라는 이공계 최고의 명문대 대학원 졸업생이다.
조선일보가 기획특집에서 대표적 사례로 든 명문 이공대 대학원 출신 송모씨(26)는 "중·고교를 미국에서 다닌 영어실력과 토익 950점, 3.3 수준의 학점이면 어디든 너끈히 붙을 줄 알았다"며 "세계적 신기술을 개발하겠다는 대학원 시절 꿈은 버린 지 오래고, 그저 아무 곳이나 아침에 출근할 곳이 있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라고 말했다. 지난 8월 이공계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명문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9월부터 기업체 대졸 공채에 20번 이상 실패했다고 한다.
부모에게 매달 40만원씩 용돈을 타 쓰는 송씨는 '백수' 신세가 주위에 알려질까봐 낮에는 집 전화를 받지 않고 동네 사람들 눈에 띄기 싫어 되도록 어두울 때 외출해 한밤중에 귀가한다고 밝혔다. 병역 면제인 그는 "대학원 동기들이 대부분 병역특례업체에 취직할 때 '남들보다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차라리 군대라도 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명문대 석사에 영어능통자인 송씨가 이 지경이면 지방대 등 비명문대 출신들의 서러움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한겨레가 초점을 맞춘 것은 바로 이들이다.
***한겨레 "비명문대생 취업난은 더 심각하다"**
한겨레는 사회2면 머리로 보도한 '취업 비명문대 설움 여전' 기사에 '학점 등 실력 관계없이 서류전형서 '우수수'-명문대 출신은 '면접 골라보기' 즐거운 고민'이란 부제를 달고 수도권 분교와 지방대 출신 대학생들과 서울 비명문대 졸업생들의 취업관련 비애를 다뤘다.
한겨레 기자가 30일 한양대에서 열린 '2002 서울채용박람회'에서 만난 최모씨(ㄱ대 수도권 분교·중문) "40곳 가까이 원서를 냈지만, 합격한 곳은 한곳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토익 900점, 학점 3.8(4.3만점)에 1년 반동안 미국 어학연수도 다녀왔지만 최종면접까지 간 곳은 단 한 곳뿐이라고 한다.
또 박람회 참석차 올라온 경남 ㄱ대 졸업생 강아무개씨(전기공학)는 20곳에 원서를 내 서류전형을 통과한 곳은 3곳뿐이었다며 "능력이 뛰어난 친구들도 수십곳에 원서를 내고 다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지방대는 안되는구나'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고 토로했다.
한겨레는 "경기 불안으로 더욱 취업문이 좁아진 올해 이른바 명문대와 비명문대 사이 취업 격차는 비명문대생들에게는 여전히 큰 장벽으로 다가오고 있다"며 "서울대, 연·고대생들은 5~6곳에 붙어서 어디 갈까 고민하는데 우리는 원서를 10곳 내면 1곳에서 면접을 볼까말까 해요"라고 말하는 서울 ㅎ대 졸업반 금모(기계공학)씨의 푸념을 담았다.
한겨레는 명문대생들과 비명문대생들의 취업난에는 상대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며 대기업, 외국기업, 연구소 등의 모집공고가 빼곡하게 붙어있다는 연세대 취업정보센터 게시판과 이 대학 출신 학생들의 "대부분 취업이 잘돼 조급해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인용했다.
신문에 따라 취업난을 가장 심각하게 느끼는 대상이 다른 것이다. '백수'를 경험하는 아픔이야 누구에게나 뼈저린 것이지만 보수지인 조선일보는 그래도 명문대ㆍ고학력 출신들의 취업난이 가장 심각하다고 하고, 진보지인 한겨레는 비명문대 출신들의 고통은 더욱 심하다고 강조한다.
***두 신문의 관점 차이는 목표수용자(target audience)가 다르다는 점에 있다**
두 신문의 공통점은 경기악화로 졸업을 앞둔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의 취업난이 심각하다는 것이지만 보수 혹은 진보를 지향하느냐에 따라 보도내용은 이처럼 다르다. 한국 사회에 얼마나 큰 차별과 갭이 존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아쉬운 점은 한겨레가 초판(1판)에 보도했던 관련기사를 시내판(7판)에서는 빼고 다른 기사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한겨레의 지향점과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기사였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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