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현지시각) 체첸 반군에 의해 모스크바의 한 뮤지컬 극장에서 발생한 러시아 사상최대의 인질극이 체첸 사태를 다시 국제적 핫이슈로 등장시켰다.
체첸 반군의 일차적 목표가 러시아의 체첸 인권탄압 문제라는 것을 고려할 때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둔 셈이다. 50명 정도로 추정되는 체첸 반군 '자살특공대'는 현재 모스크바 '돔 쿨투리'(문화의 집) 극장에서 "러시아군의 일주일내 체첸 철수"를 요구하며 1천명 정도의 관객과 배우 등을 인질로 잡고 이틀째 러시아 정부군 및 경찰과 대치중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체첸 반군의 도발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강경 대처하겠다는 입장이나, 일단은 인질들의 생명과 안전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푸틴은 24일 슈뢰더 독일 총리와의 정상회담, 26일로 예정된 부시 미대통령과의 APEC 정상회담까지 취소하는 등 사태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러시아 체첸 점령의 목적은 '세계최대 석유 매장량'**
러시아 당국은 24일 대테러 진압병력을 극장 주위에 배치한 상태에서 인질들의 안전한 석방을 위해 체첸 반군들과 협상을 벌이고 있으나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현재 인질중에는 많은 어린이와 부녀자가 포함돼 있으며 미국인 4명과 네덜란드인 7명, 호주인 2명, 영국인 3명등 모두 75명의 외국인들도 끼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체첸 반군에 의해 러시아 사상 최악의 인질극이 발생한 근원은 체첸이 경제적·군사적 요충지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체첸은 연간 2백60만t의 원유 생산지이자 주요 정유시설의 소재지이며 터키·이란으로 나가는 러시아 남부 국경의 전략적 요충지다.
체첸은 특히 세계 최대규모인 1백80억~3백50억 배럴의 석유·가스가 매장된 카프카스 국경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러시아는 그동안 국제사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체첸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아왔다. 체첸의 독립을 인정할 경우 엄청난 석유이권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밖에 체첸이 독립하면 러시아 연방내 인근 지역 소수민족들(잉구슈.오세티야 등)의 독립 움직임이 가열될 것도 우려하고 있다.
체첸 독립으로 인한 막대한 석유이권 상실을 원하지 않는 러시아는 지난해 9.11사태직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용인하는 대신, "체첸의 반군지도자가 국제 테러조직과 연관돼 있다"며 체첸 탄압에 대한 미국의 동의를 얻어냈다. 중동지역 석유 통제권을 장악하려는 미국과 체첸의 석유매장량 통제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상황이다. 미국은 그후 러시아의 체첸 인권 탄압에 대해 외면해왔다.
요컨대 러시아와 체첸간 분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는 게 각국 언론들의 전망이다.
그러나 체첸 반군에 의한 이번 모스크바 인질극이 오히려 체첸 문제 해결을 위한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견해가 나와 주목을 끈다.
***슈피겔 "러시아·체첸 분쟁 평화적 해결 가능하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 온라인은 24일(현지시각) '푸틴 대통령은 체첸 문제로부터 벗어나길 원한다'는 기사에서 러시아 전문가인 볼프강 레온하르트(Leonhard)와의 인터뷰를 통해 러시아 인질극의 향후 전망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고 보도했다.
레온하르트는 "6개월 혹은 1년 전만 해도 나는 러시아 군대가 체첸으로부터 일주일 이내에 철수하리라는 것은 믿지 않았을 것"이라며 "푸틴 행정부가 바로 거절했을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현재 러시아 국민들의 체첸 전쟁 지지도는 바닥으로 떨어져, 99년 9월부터 2001년까지만 해도 러시아 국민중 80%가 전쟁을 지지했으나 지금은 30% 정도에 불과한 반면 체첸과의 평화협상을 원하는 국민은 2000년 봄 22%에서 2001년 9월까지 60%로 증가했다"고 낙관적 전망을 하는 근거를 밝혔다.
레온하르트는 "푸틴과 같은 사람은 국민들의 바람이 무엇인지 매우 정확히 인식한다"며 "푸틴은 현재 체첸 문제외에도 국제 사회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 여러 시급한 문제들에 봉착해있어 체첸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될 가능성 또한 커졌다고 볼 수 있다"고 전망했다.
레온하르트는 당면한 인질극 사태 전망에 대해 "KGB 출신인 푸틴과 그의 자문관들은 얼마 전과 달라진 현재 상황을 누구보다 잘 고려할 것"이라며 "문제는 푸틴이 자신의 지지도에 재앙으로 작용하고 있는 체첸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여 있다. 체첸 반군들은 이미 인질극을 통해 러시아 국민과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목표는 달성했다"고 분석했다.
체첸의 정치생명이 이번 체첸 인질사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있다는 분석인 셈이다. 푸틴은 한마디로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이다.
체첸 반군들중에 미망인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체첸 반군들이 체첸의 독립을 저해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러시아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하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들이 인질극을 벌이는 동기는 종교적 이유보다 체첸의 독립에 있다"고 답변했다. 체첸 독립을 위해서라면 반군들이 공언한대로 극장을 폭파, 몰살의 길을 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체첸은 어떤 나라인가**
문제의 체첸은 러시아 서남부 카프카스 산맥 북부에 있는 자치공화국으로 1859년 러시아에 강제병합됐다. 체첸족과 잉구슈족으로 구성된 체첸 주민 대부분은 이슬람교도다. 체첸의 면적은 1만9천여㎢로 우리나라의 경상북도 크기다.
러시아와 체첸간 분쟁은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는 소련이 해체되던 1991년 11월 체첸이 독립선언을 하자 처음에는 소극적으로 대응하다 주변 지역으로 독립 움직임이 번지자 94년 말 체첸을 공격, 다음 해인 95년 3월 수도 그로즈니를 점령했다. 그러나 체첸 반군은 카프카스 산맥으로 거점을 옮기고 항전을 계속한 끝에 96년 8월 그로즈니를 수복했다.
치욕적 패배를 당한 러시아군은 5년 간의 과도기간을 설정, 이 기간 중 체첸의 독립을 결정하는 의회를 구성하는 내용의 휴전협정에 합의하며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99년 모스크바에서 아파트 폭발로 3백여명이 숨지는 등 테러가 빈발하자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총리(현 대통령)는 체첸에 재차 병력을 투입, 지금까지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이로 인해 체첸에서만 사망자 6만여명, 난민 15만여명이 발생했고 러시아군도 3천8백여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유엔 등 국제사회는 체첸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9.11 테러 이후 국제정서가 '반(反)테러'로 돌아선 데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협조해 주는 대가로 러시아의 체첸 공격을 묵인하면서 체첸 반군의 입지는 좁아졌다. 이번 인질극이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체첸 반군의 벼랑끝 전술로 분석되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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