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이념에 의지해 살아가곤 한다. 그것은 거시적인 비전일 때도 있고, 사사로운 명분일 때도 있다. 미지의 상태를 견디는 일에 취약한 우리는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탐욕을 최선의 가치로 삼는 세계에서 인간이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이며 그에 걸맞은 심성은 어떤 것일까? 냉혹한 환경에서 온화함이나 너그러움 따위는 미덕이 될 수 없다. 혼란을 타개할 이상이 필연성을 가진 체제가 되고, 삶을 안정시켜줄 규범으로 제시될 수 있으려면 설득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논리에 반드시 진실만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이념은 어쩌면 허무한 거짓말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대호황과 세계대전을 통해 자본주의 강국으로 급부상한 미국은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 영토를 지키는 일에 예민해져 갔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유럽이 소비에트 연방의 세력권 아래 놓일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한반도에 38선을 그은 것도 마찬가지의 불안 때문이었다. 미국도, 소련도 한반도 전체를 자신들의 독점적인 세력권에 둠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유리한 형세를 취하고 싶어 했다. 미국은 일본이 위협받는 것을, 소련은 만주가 위협받는 것을 걱정했다. 미국은 당시 조선인들의 사회주의 지지 분위기를 의식해 한국민주당과 이승만을 이용,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친일 지주 출신 보수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한민당은 38도선 이남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미군정으로부터 여당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북통일 임시정부가 수립될 경우 친일파 숙청으로 한민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은 자명했다. 그래서 한민당은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과 손잡고 반공·반노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필사적으로 밀어붙였다. 그러자 남한 각지에서 5.10단독선거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이승만 정권은 그들의 정통성을 가로막는 제주 4.3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은 생활고, 경찰과 우익 청년단의 폭력 등 4.3항쟁의 다면적인 원인을 알고 있었지만, 깨끗한 토벌을 위해 제주도가 공산분자들의 음모로 움직이는 '빨갱이 섬'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빨갱이라는 이유로 여성, 80대 노인부터 갓난아기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학살당했다.
ⓒ진진 |
오멸 감독은 언론 시사회에서 <지슬>이 4.3항쟁을 정의하는 영화라기보다는 피해자들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제사로서 영화라고 밝힌다. 실제로 제사 절차가 영화의 소제목으로 쓰인다. 하지만 제사 형식과 영화 내용의 구체적인 연관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제사는 영화를 위한 핑계 정도로 보이는데, 이는 사건의 무게를 감당해내기 어려운 감독이 자신을 위해 내놓은 나름의 대책쯤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잔인함을 들추고 싶지 않았다'는 발언도 따져볼 만하다. 관객을 포함해 영화에 구성된 세계에 참여하는 모든 이가 주민이 어떤 일을 당하는지 안다. 사태 파악을 못 하는 건 주민뿐이다. 주민은 사태와 상관없는 시시콜콜한 일에만 관심 있다. 그들을 순박하게 묘사하려는 의도는 알겠으나, 애틋함이나 정겨움을 불러일으키려는 것만큼이나 그들을 바보같이 보이게도 한다. 더구나 영화에서는 어느 정도 돼지와 주민의 처지를 동일시한다. 그런데 주민이 돼지가 발정이 났네, 접을 붙이네 마네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영화에 참여하는 건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멸 감독의 <지슬>이 피해자 편에 있으려는 영화임은 분명하다. 감독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지슬>은 고발의 성격을 가진다. <지슬>의 겉모습은 배우로도 잘 알려진 지앙 웬 감독의 문제작 <귀신이 온다>를 기억나게 한다. <귀신이 온다>는 중국의 작은 마을에 일본군 포로가 맡겨지면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전쟁과 인간 속성의 씁쓸한 면을 풍자적으로 그린 영화다. <지슬>이 감독이 말한 취지에 부합하는 영화가 되려면 지금 같은 에피소드 구성보다 주민의 선택을 강조하는 드라마 전개 방식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귀신이 온다>가 그렇게 했듯이. 감독의 본심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처럼 <지슬>을 둘러싼 화제가 피해자분들께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 현대사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사건으로 6.25전쟁을 들 수 있다. 여전히 누구나 사소하고 간단하게 빨갱이가 될 수 있다. 60년이 지나도록 4.3항쟁과 관련한 역사적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셈이다. <지슬>의 의의는 이 지점에 있을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냉전은 옛날이야기가 된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은 그 시절의 긴장을 내려놓지 못한 채 세계대전의 망령을 부여잡고 있는 나라니까.
▲<지슬>의 한 장면. ⓒ진진 |
결국 <지슬>은 귀신을 향한 영화로 정리된다. 앞에서 의식한 사실들이 영화를 둘러싼, 영화 외적인 것들이라면 이미지에 담긴 몇몇 사물은 영화 안에서도 귀신의 자리를 만들어낸다. 그중 나무는 눈여겨보게 된다. 토벌대에는 악마 같은 인물이 두어 명 있다. 그들은 잔혹한 현장을 주도한다. 어떤 이는 살육에 중독된 정신병자이고, 어떤 이는 빨갱이를 죽이는 일 외에 다른 기능은 잃어버린 냉혈한이다. 그들은 희열을 느끼거나 고취되지 않는다. 짐승처럼 본능만 가졌다. 토벌대가 부여된 기능에 몰두할 때, 은근슬쩍 인격체로 그려지는 나무는 사건의 목격자가 된다. 인격체라고는 해도 타고난 제약이 있는 나무는 현장을 지켜봐야만 하고, 피해자들의 한을 간직해야만 한다. 고통스러워도 방어하거나 외면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마음대로 떨쳐버릴 수도 없다. 무속이나 민간 전설 등으로 익숙한 방식의 이야기지만, 사물의 기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영화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물론 사물의 기억이라는 차원에서 나무를 읽는 것은 연출자의 의도와 관계없는 개인적인 영감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주민의 원혼이 나무에 깃든 것으로 보든 영화적인 차원에서 나무의 기억을 읽든, 당시의 응어리가 오늘날의 세계에 뒤엉켜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는 맥락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면을 감지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을 더듬곤 하는 인간은 정지된 듯한 풍경이 사람의 말을 하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의식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우리는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에 쌓여간 게 무엇인지. 숲 속을 떠도는 게 무엇인지. 더 나아가 60년 전의 이야기가 왜 21세기의 한국 사회에서 의미 있는지까지.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귀신들은 그때 당신들을 죽인 게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그들의 죽음이 어떤 미래를 위한 대가였을까?
[필자 소개] 조민석 다큐멘터리 단체 미디어숲 회원입니다. 2012년 여름부터 ACT!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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