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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투사' 서장훈의 시대 불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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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투사' 서장훈의 시대 불운

[최동호의 한국스포츠당] <3> 편협함에 맞서 코트에서 외로운 투쟁

서장훈이 은퇴한다. 한국 농구의 한 시대가 저문다. 내 청춘도 함께 물러나는 느낌이다. 1994년 농구 담당 기자로 코트에 첫발을 내디뎠다. 올림픽공원 제1체육관을 꽉꽉 메우던 농구대잔치 전성기였다. 프로농구 출범과 흥망을 지켜보았다. 운이 좋았다. 농구 문외한이 농구를 배운 시기는 한국 농구의 전성기였다. 서장훈의 시대이기도 했다. 1994년에 처음 만났던 연세대 2학년 서장훈을 2006년까지 13년간 지켜보았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내가 서장훈을 진정으로 이해한 것은 현역 기자에서 물러난 다음이었다. 그는 코트에서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었다. 영웅에겐 시대가 불운했다.

1995년 2월 13일 농구대잔치 연세대학교와 삼성전자의 경기를 잊지 못한다. 서장훈은 삼성전자 센터 박상관과 충돌하며 목을 다쳤다. 지척에서 지켜본 충돌은 충돌이 아니었다. 고의적인 팔꿈치 가격이었다. 2m대 센터가 한국 농구의 숙원이었던 시절, 서장훈은 괴물이었다. 더블팀도, 지역 방어도 소용없었다. 서장훈을 막는 수비는 거친 파울뿐이었다. 팔꿈치 가격, 원펀치, 점프할 때 부딪치기 등 파울과 반칙이 난무했다. 상처를 입히더라도 파울로 끊었다. 무자비할 정도였다. 시대가 그랬다. 1991년 기아-현대전자 경기에선 농구 천재 허재가 임달식의 주먹에 쓰러졌다. 분을 삭이지 못하는 허재에게 또다시 김성욱의 원펀치가 작렬했다. 허재의 턱뼈에 금이 갈 정도로 심한 폭력이었다. 슛도사 이충희는 은퇴 후에 "맞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침 뱉는 것은 도저히 참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거칠었다. 그 속에서 스타는 알아서 살아남아야 했다. 서장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장훈을 207cm의 높이와 파워로만 기억한다면 커다란 오산이다. 서장훈 이후에도 2m대 센터는 즐비했다. 서장훈을 버티게 했던 힘은 외형이 아니었다. 내면이었다. 생존 본능이었다. 부상을 피하기 위해, 견제를 피하기 위해, 심판의 선입견을 피하기 위해, 선수로서 더 뛰기 위해 서장훈은 목 보호대를 했고, 심판에게 항의했고, 포스트에서 벗어나 미들슛과 3점슛을 던졌고, 스스로 출전 시간을 조절했다. 비난받고 책임이 지워지고 외로워도 서장훈에겐 그것이 최선이었다. 외로운 투쟁이었다. 서장훈이 평생 한국 농구의 편협함과 싸워왔다는 것을 어리석게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서장훈이 은퇴한다. 한 시대가 이렇게 저문다. 8일 오후 경기 고양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12-2013 KB국민카드 남자 프로 농구 고양 오리온스와 부산 KT 소닉붐의 경기가 끝난 후 서장훈이 코트를 빠져나가고 있다. ⓒ뉴시스

많은 이들이 논어의 옹야편(翁也篇) '知之者 不如好知者, 好知者 不如樂知者'(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를 인용한다. '프로는 즐길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서장훈은 "어떻게 즐길 수 있나?"라고 항상 반문했다.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집중해야 한다. 치열하게 싸우고 최선을 다해야 되는데 어떻게 즐길 수 있나?"라고 말했다. 즐기는 경지에 이르진 못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경지인 것은 확실하다. 비난 속에서도 서장훈은 3점슛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겐 그것이 최선이었다. 서장훈에게 2점슛과 3점슛은 성실과 불성실의 차원이 아니었다. 불확실한 2점슛과 확실한 3점슛의 차이였을 뿐이다. 빅맨으로선 드물게 중장거리 슈팅 능력까지 타고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서장훈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언제나 당당했다. 그래서 솔직했다. 그러나 그 솔직함을 이해하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2007년 4월 19일, 2008년 4월 6일, 2011년 11월 20일 경기에서 서장훈은 테크니컬 파울을 받으며 퇴장을 당했다. 판정에 대한 거친 항의와 욕설이 문제였다. 3점슛뿐만이 아니라 판정 항의는 늘 비난거리였다.

보통의 스타는 비난을 피하기 마련이다. 팬들이 원하는 말과 행동으로 자신을 숨긴다.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서장훈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인터뷰에서도 나타난다. 대개의 선수들이 "감독의 지시대로 잘 따랐고 동료들의 도움이 컸다. 승리해서 기쁘다."는 모범 답안 인터뷰를 할 때 서장훈은 감독급 인터뷰를 쏟아냈다. 경기를 평가하고 팀플레이의 잘된 점과 안된 점까지 분석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경기 평가나 분석은 얘기하면 안 되는 금기로 생각할 때였다. 그러나 서장훈은 거침없이 쏟아냈다. 서장훈이라는 자부심 때문이었을까? 그는 설사 비난받더라도 자신의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투쟁이었다. 불합리해도 농구식 예의를 따라야 하고, 정도가 아니어도 심판과 타협해야 하고, 해야 할 언행 대신 비난받지 않을 언행을 골라 해야 하는 코트의 관습과 싸웠고 세상의 편견과 부딪쳤다.

1995년 서장훈은 연세대 3학년 진학 직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 주립대로 편입했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신생팀 진로의 지명을 피하고자 해외로 간다는 도피 유학 의혹을 받았다. 그리고 1년 후인 1996년 귀국했다. 프로 입단 후 서장훈은 늘 감독과 불화설에 시달렸다. 안하무인 유아독존으로 비칠 만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될 만큼 전성기의 서장훈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내게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2008년 전자랜드 이적 이후 서장훈도 체력적인 부담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체력적으로 힘들어질수록 서장훈의 진심은 더욱더 돋보였다. 프로 선수가 지녀야 할 자세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선과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주겠다는 욕심은 여전했다. 세월의 순리대로 서장훈도 이젠 유순해진 느낌이다. 그러나 프로 선수의 자세를 끝까지 잃지 않으려는 모습만큼은 전성기의 서장훈만큼이나 날카롭고 예민했다.

서장훈에겐 찬사와 비난이 함께했다. 서장훈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서장훈은 찬사를 얻기 위해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비난 속에서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농구대잔치에서 한국 농구의 전성기를 함께 만들었던 동료들은 모두 떠났다. 서장훈이 수많은 부상 속에서도 39세까지 코트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자기 관리가 치열했음을 의미한다. 한국 농구사는 프로 농구 최초로 1만 득점, 5000리바운드를 돌파한 선수로 서장훈을 기록하겠지만, 내 마음속의 서장훈은 한국 농구의 편협함에 맞서며 끝없이 자신과 싸워야 했던 외로운 투쟁자의 모습으로 남을 것 같다. 서장훈을 뒤늦게 알게 된 내 자신이 부끄럽다.

스포츠 시사 팟캐스트 최동호의 한국스포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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