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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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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루

[한윤수의 '오랑캐꽃']<414>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명화 이키루(生きる /살다 / living)
시청의 시민과장(市民課長) 와타나베는 *일거리와 책임을 다른 과(課)에 떠넘기고 아무 일도 안 하는 공무원이다.
이 복지부동이 갑자기 일하기 시작한다. 위암에 걸려 5개월밖에 못 살기 때문이다. 그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참되게 살기로(이키루) 결심하고, 동네 한 가운데 방치된 물웅덩이를 어린이 놀이터로 만들어 놓고 죽는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무엇을 느꼈느냐?
일본 공무원은 암에 걸려야 일한다는 거!

그럼 한국 공무원은 다를까?
별반 다를 거 같지 않다.
원래 여기 있던 사람들이 그리 넘어간 거니까.

한국인 상관에게 일방적인 폭행을 당하고도 직장을 못 옮겨 공포에 떠는 베트남 노동자가 있었다. 이름은 탕(가명).
검찰에서는 가해자를 상해죄로 벌금 50만원에 약식 기소했다. 나는 이 기소장에 진단서를 첨부하여 직장을 옮겨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고용센터에서는 들어주지 않았다. 가해자와 합의하라며.

왜 합의하라는 걸까?
가해자와 피해자가 합의하면 공무원은 손 하나 안 대고 사건을 깨끗이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깜찍하지!
하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치료비 한 푼 못 받은 채 (또 가해자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은 채) 끝나는데 어떻게 합의할 수 있나?

피해자는 합의할 수 없으니 공무원 직권으로 직장을 옮겨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공무원들은 직권이동을 할 수 없는 이유로 두 가지를 내세웠다.
1. 한국인 과장(가해자)이 사용자(使用者)라는 확신이 안 서며
2. 사장님이 이탈 신고를 해서 그쪽에서 이의를 제기하면 입장이 곤란하다는 것이다.

환장할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이탈은 사장님이 조장한 건데!
폭행이 벌어진 직후, 사장님은
"고소하면 베트남으로 보내버릴 거야."
라고 위협했고,
막상 고소하자, 사모님은 "고소 취하 안 할 거면 나가!"
하며 기숙사를 비워줄 것을 종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외국인이 기숙사를 안 나가고 버틸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짐 싸가지고 나온 건데 이탈이라고?

나는 절망했다. 이런 공무원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나?
할 수 없이 고용센터 공무원들과 대화하는 걸 포기하고 뒤늦게 S지청 근로감독과에 진정했다. 이제 희망은 근로감독관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감독관은 휴가 중이었다. 감독관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폭행당한 지 32일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감독관은 공정하고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하여
"한국인 과장은 직속상관이므로 사용자가 확실하며, 근로자가 일부러 이탈한 것이 아니다"
라는 유권해석을 해주었다.
그 결과 뚜들겨 맞은지 39일 만에 베트남인은 *구직필증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 그는 다른 직장으로 옮겨 열심히 일하고 있다.

진짜로 고마운 사람,
CEM(가명) 감독관.
그녀는 비록 신임 공무원이고 암에도 안 걸렸지만 와타나베 이상으로 헌신적으로 일했다.

그녀는 공무원 중에서도
사는 것 같이 사는 사람, 즉.
이키루(生きる)다.

*일거리와 책임을 다른 과(課)에 떠넘기고 : 빈민가 주부들이 시민과에 몰려와, 방치되어 모기가 들끓는데다가 주변이 우범지대화 되어가고 있는 물웅덩이에 어린이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물웅덩이는 토목과 소관이니 그리 가보라며 책임을 떠넘긴다. 그러나 토목과는 공원과로 미루고, 공원과는 보건소로, 보건소는 위생과로, 위생과는 환경위생과로, 환경위생과는 예방과로, 이런 식으로 방역과, 충역과, 하수과, 도로과, 도시계획과, 구획정리과, 소방서, 교육과, 아동복지과를 거쳐서 결국 시의회로 올라간다. 그러나 시의회에서는 부시장에게 떠넘기고 부시장은 다시 시민과로 내려 보냄으로써 결국 민원은 17개 부서를 거쳐서 제자리로 돌아온다. 시민과에서 다시
"토목과로 가보세요."
하자 주부들이 폭발한다.
"누구 소관이건 상관없어. 당신네 헛소리에 지쳤다구!"
애시당초 어린이 놀이터는 될 가망이 없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난다. 시민과장 와타나베가 암에 걸린 것이다.

*구직필증 : 외국인노동자는 직장 이동의 자유가 없다. 단 구직필증이 있으면 직장을 옮길 수 있다. 그래서 필리핀인들은 이 구직필증을 해방문서 즉 릴리스 페이퍼(release paper)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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