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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목숨 끊는 아이들과 교사…여전히 '힐링' 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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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목숨 끊는 아이들과 교사…여전히 '힐링' 타령?

[프레시안 books]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주택가 골목에서 담벼락 광고를 보기 힘들다. 예전엔 많았다. 새로 개봉한 영화 포스터, 대형 교회 목사의 성령 부흥회 광고…. 요즘엔 선거 때나 돼야 담벼락에 광고가 붙는다. 그래서 비닐로 깔끔하게 덮힌 선거 공보물 위로 어린 시절 기억이 겹쳐 보이던 때가 가끔 있었다.

인터넷을 모르고 살던 시절, 가장 강렬한 시각적 자극은 담벼락이나 전봇대에 붙은 영화 광고였다. <애마부인> 시리즈, <변강쇠> 시리즈…. 그 시절,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 상영관에 몰래 들어갈 용기를 내지는 못했었다. 요즘 포털 사이트의 연예기사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훨씬 야릇했던 포스터를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진짜 몰래 들어가 보고 싶게 만드는 광고는 따로 있었다. 대형 체육관에서 열리는 성령 부흥회 광고다. '치유의 은사'를 대대적으로 홍보한다.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서고, 소경이 눈을 뜬다고 했다. 진짜다. 이런 문구가 버젓이 인쇄돼 담벼락에 턱 하니 붙어 있었다. 그걸 보며 온갖 상상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은 <심청전>에나 나오는 것 아닌가. 그조차도 심청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가 온갖 시련을 겪은 뒤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20세기 서울 한복판에서 '치유의 은사'로 그게 이뤄진다고 했다. 한편으론 믿기지 않았지만, 또 한편으론 저렇게 대대적으로 광고하는 걸 보면 설마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아니겠거니 싶기도 했다. 그래서 현장에 꼭 가보고 싶었다.

담벼락에 광고하던 '치유의 은사'는 한국 교회의 고도성장기가 남긴 추억이다. 요즘 대형교회들이 신도를 끌어 모으는 방식은 훨씬 세련됐다. 대통령까지 배출한 어느 대형교회는 회원제로 운영되는 고급 사교클럽의 이미지를 풍긴다. 괜찮은 배우자를 만나러, 또는 사업에 도움이 되는 인맥을 쌓으려 교회에 나간다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윤지형·이계삼·지아 외 지음, 교육공동체벗 펴냄). ⓒ교육공동체벗
그럼, '치유의 은사'를 갈구하며 체육관으로 몰려들던 풍경은 이제 볼 수 없는 건가. 꼭 그렇지는 않다. 조금 다른 모습으로 유행한다. 다만 표현은 영어로 바뀌었다. '힐링' 열풍이다. 너도 나도 '힐링'이다. 빅토르위고의 대작을 뮤지컬 영화로 만든 <레미제라블>은 한국에서 '힐링 무비'로 소비된다. 지난해 대선에서 후보들이 꼭 출연하고 싶어 했던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힐링캠프>였다. 서점에 가면, 절망에 빠진 청년들을 위한 '힐링 메시지'를 담았다는 책이 수북하다.

'치유의 은사'를 구하러 체육관에 몰려든 이들 가운데 일부는 '방언'이 터지는 체험과 함께 실제로 '은혜'를 받았다. 꼭 몸의 병이 낫지는 않더라도, 마음에 쌓인 먼지는 격렬한 통성 기도로 씻어낼 수 있었다. 가슴에 쌓인 게 많았던 이들에겐 큰 은혜다. '힐링' 유행도 마찬가지일 게다. 높은 취업 문턱 앞에서 절망한 청년 가운데 일부는 '힐링'을 내건 책을 읽으며 실제로 위안을 얻었다. 실패 앞에서 주저앉지 않고 다시 도전할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힐링'은 결국 한때뿐이다. '성령 충만한 치유의 은사'로도 시각 장애인이 그 자리에서 번쩍 눈을 뜨는 일은 불가능했다. 체육관에서 눈물 흘리며 방언을 쏟아내는 중년여성이, 집에 돌아가서 겪는 혹독한 가사노동과 가족의 무관심 역시 늘 그대로다. 성령이 그럴진대, 하물며 '힐링'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한 걸 할 수 있겠나. 책 한두 권, 영화 몇 편 따위로 '힐링'이 될 상처라면, 애초부터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상처는 책이나 영화를 보지 않아도 곧 아문다. 그건 진짜 상처가 아니다. 누구나 동의하듯, 깊은 내면의 상처는 평생 낫지 않는다. 다만 잠시 잊고 지내는 게 가능할 뿐이다. 어차피 때가 되면 통증은 다시 도진다.

다들 선거 이야기하느라 벌써 잊은 듯하지만, 지난 한 해 동안 대구 지역에서만 11명의 청소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구만 유난스러운 게 아니다. 서울시청소년상담복지센터가 지난해 시내 초중고 학생 1만1000여 명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청소년 네 명 중 한 명이 최근 1년간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고, 자살을 실제로 시도한 경험은 5%나 됐다.

심각한 따돌림으로 인해, 또래 아이들의 거친 폭력에 시달린 끝에, 한줄 세우기 식 성적 경쟁에 지친 나머지, '자살해야 하나, 꾹 참고 살아야 하나' 고민하는 아이들이 지금 이곳에 있다. 좋은 영화 보여준다고, 책 몇 권 읽히고, 유명 인사의 강연을 들려준다고, 그들의 상처가 '힐링'될 수 있을까. 그럴 리는 없다. 너도 나도 떠드는 '싸구려 힐링'. 자살 고민이 일상이라는 아이 앞에서 누가 그걸 입에 올릴 수 있을까. 설령 그 아이가 자살을 택하지 않는다 해도, 아이가 지금 입은 상처는 평생 간다. 역시 '힐링'이 불가능한, 그저 잠시 잊고 지내는 게 가능할 뿐인 상처다.

흔히들 학교와 교육을 비웃는다. 누구나 학교에 다녔으므로, 누구나 학교와 교육에 대해 잘 안다고 믿는다. 그래서 굳이 학교에 대해선 깊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쉽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교사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남긴 극심한 고용불안의 도피처로 택하는 직업쯤으로 여겨진다. 차별과 폭력을 낳는 한국 교육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원래 엉망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쉽게들 말한다.

이처럼 누구나 아는 진단이 있는가 하면, 그 맞은편에는 역시 너무 익숙한 처방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이들이 있다. "학벌사회와 입시경쟁이 문제다. 인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라고 한다. 맞는 말이지만, 공허하긴 마찬가지다. 아파트 창문 아래로 뛰어내릴까 고민하는 아이 앞에서 이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뻔한 진단과 뻔한 처방. 공통분모는 '한국 교육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냉소'다. 그 속에서 학교는 더 큰 문제가 터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곳이 된다. 그리고 교육은 어느새 행정이 된다. "누가 과연 '좋은 어른'이며, 아이가 '좋은 어른'으로 자라도록 돌보려면 무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뜬 구름 잡는 이야기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관공서, 병원, 경찰서의 말단 지부가 됐을 뿐, 정작 '교육'은 사라진 학교에서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뜯어 먹는 괴물이 된다. 살아남은 아이들에겐 평생 '힐링'이 불가능한 상처가 남는다.

여기 절망의 학교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려는 이들이 있다. 교육을 매개로 이뤄진 협동조합 '교육공동체 벗'에 모인 이들이다. 이들이 모인 계기 자체가 한국 교육의 구조적 절망 탓이었다. 전교조 해직교사들이 1990년 창간한 <우리교육>이 모태다. 진보적인 교사들에게는 필독서로 꼽히던 이 잡지는 지난 2010년께 급격한 위기를 겪는다. 심각한 경영난을 이유로 우리교육 경영진은 기자들에 대한 구조조정을 통보했다. 노동조합(전교조)이 대주주로 있는 주식회사(우리교육)에서 벌어진 구조조정과 파업. 한국 교육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우리교육> 기자들은 전원 사표를 냈고, 주식회사가 아닌 협동조합 방식의 공동체를 꾸린다. 그리고 격월간지 <오늘의 교육>을 출간한다. 이들이 창간 첫 호부터 내건 주제는 '교육 불가능'이었다. 학교의, 대학의, 교사의 '교육 불가능'. 학교는 원래 교육을 위해 있는 곳이고, 교사 역시 교육을 위해 있는 직업인데, 교육이 불가능하다. 어설픈 '힐링'보다는 이런 모순을 똑바로 보는 게 먼저라는 게 '교육공동체 벗'에 모인 이들의 생각이다.

지난 2년 동안 <오늘의 교육>에 실린 에세이 가운데 일부가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윤지형·이계삼·지아 외 지음, 교육공동체벗 펴냄)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시간이 없다면, 이 책에 실린 여러 에세이 가운데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이 쓴 '슬픈 사람, 안혜영'이라는 글만이라도 읽기를 권한다.

고(故) 안혜영 교사. 청년기의 긴 방황과 고생 끝에 내린 결론이 교육과 교사였고, 그래서 뒤늦게 사범대학에 편입해 교사가 됐다. 하지만 교사가 돼 돌아온 학교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익숙한 절망이었다. 학교에 교육이 없다. 그는 "나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계삼 편집위원은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이기도 했던 고(故) 안혜영 교사의 삶을 추적한다. 그가 남긴 일기, 그의 남자친구와 부모의 증언 등을 수집한다. 그리고 맑은 영혼을 지닌 청년 교사를 죽음으로 내몬 구조적 절망을 글로 담았다.

절망에서 벗어나는 첫 걸음은, 그걸 똑바로 보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냉소로 자위하고, 잠깐의 힐링으로 도피하기만 한다면, 절망은 끝없이 먹잇감을 집어삼킨다. 먼저 먹잇감이 되는 건 맑은 영혼을 지닌 이들이지만, 그 다음은 이 글을 읽은 당신 차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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