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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된 '큰 영애'…박근혜의 영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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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된 '큰 영애'…박근혜의 영욕

[박근혜 당선인의 삶] '대통령 대물림' 비판 벗어날 방법은?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박근혜 당선인이 지난 1993년 출간한 자서전이다. 책 제목 뒤에 물음표를 붙였을 때, "그래도 정치를 한다"라는 답을 고를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게다. '정치인'하면 으레 따라붙는 이미지가 박 당선인에게는 없다. 박 당선인에게 정치란 몸에 맞지 않는 옷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운명은 박 당선인을 정치로, 대권으로 이끌었다.

박정희, 여전히 한국을 규정하는 키워드

아버지 박정희가 1961년 5·16 쿠데타를 하던 때, 박 당선인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박 당선인은 '평범한 가정'을 경험한 적이 없다. 보통 사람이 겪는 사춘기 경험, 청년 경험이 그에겐 없다. 박 당선인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특징이다.

박 당선인의 가정이 평범하지 않은 이유는, 아버지 박정희 때문이다. 박정희의 빛과 그림자는 박 당선인의 인생 전체, 그리고 대권 행보까지 결정지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이들은 통과의례처럼 부모에 대한 반항기를 거친다. 이 과정에서 부모를 조금 떨어진 눈으로 바라보고, 부모의 한계를 극복하려 한다. 그러나 적어도 알려진 바로는, 박 당선인의 삶에서 이런 흔적을 찾기란 힘들다. 아버지의 존재감이 워낙 강력했던 탓이다. 박 당선인이 대통령으로 보낼 향후 5년 역시 마찬가지일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라는 이름은 21세기에도 한국을 규정하는 핵심 키워드다. 그걸 이번 선거가 확인시켜 줬다.

5.16 쿠데타와 함께 끝난 '평범한 생활'

박 당선인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월 2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당시 박정희는 대령 계급으로 전시(戰時) 대구주재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을 맡고 있었다. 그보다 3년 전, 박정희는 남로당 가입 혐의로 파면돼 육군 정보국에서 직제에 없는 문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이 그를 살렸다. 육군에 복직했고, 중학교 교사 출신인 육영수와 결혼했다. 박정희는 재혼이었고, 육영수는 초혼이었다. 충청도 10대 부자 가운데 하나로 꼽혔던 육영수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전처와의 사이에 이미 딸이 있었다. 따라서 박 당선인은 박정희에겐 차녀가 된다.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박 당선인은 아버지인 박정희의 임지를 따라 광주, 서울 등으로 이사 다니며 유년기를 보냈다. 박 당선인에게나, 박정희에게나 삶에서 가장 평범하고, 안정적인 시기였다. 전쟁이 끝나자 군인 박정희는 승승장구 승진한다.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친일·좌익' 전력이 군인 박정희로 하여금 자기관리를 엄격하게 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군인 박정희의 관운은 4.19혁명 이후 위기를 맞는다. 민주당 정부에서도 '좌익' 꼬리표는 족쇄였다. 결국 군인 박정희는 쿠데타를 결심한다. 최고권력자 박정희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이와 함께 박 당선인 가정의 평범한 생활도 끝난다.

"5.16 쿠데타는 구국의 혁명"이라는 소신

교사에서 장교로, 친일에서 좌익으로 변화무쌍한 이념 행보를 보였던 박정희와 달리, 박 당선인의 삶에선 이념적 방황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박 당선인이 청소년기, 청년기를 보냈던 1960~70년대 한국사회가 워낙 그랬다. '반공'이라는 구호 아래 사상통제가 당연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하다. '큰 영애'라는 이름으로 통했던 박 당선인은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생활을 해야 했다. 껄끄러운 사상이나 문화를 접할 기회는 없었다.

이는 박 당선인의 역사의식을 설명하는 한 변수가 될 수 있다. 박 당선인은 2007년 인사 검증 청문회에서 "5.16 쿠데타는 구국의 혁명"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정치 입문 전인 1990년 인터뷰에서도 같은 입장이었다. 당시 인터뷰에서 박 당선인은 이렇게 말했다. "5·16은 구국(救國)의 혁명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때 상황이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남북대치 상황에서 잘못하면 북한에 흡수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혁명 공약에도 기아선상에 헤매는 국민을 구제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1990년 당시는 1987년 6월항쟁의 여진이 상당하던 때였다. 지식인 사회에선 군사정부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했다. 그러나 박 당선인의 발언은 1970년대 관제 교육 내용에서 바뀐 게 없다. 이는 지금까지 마찬가지다.

불행한 가족사

박 당선인의 성격을 설명하는 핵심 변수는 또 있다. '10월 유신' 2년 뒤인 1974년, 조총련계 재일한국인 문세광은 광복절 기념행사장에서 육영수를 저격한다. 같은 해, 박 당선인은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수석졸업하고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에서 유학 중이었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박 당선인은 귀국 비행기 안에서 계속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1979년 아버지인 박정희가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숨지는 날까지 박 당선인은 '사실상의 영부인 역할'을 한다.

모친을 죽인 좌익에 대한 사무치는 증오, 영부인 역할이 강요하는 통제된 생활…. 모든 게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가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었을 게다. 최태민 목사와 얽힌 구설수가 생겨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최태민은 모친을 잃은 슬픔에 잠긴 박 당선인에게 접근했고, 박정희가 추진한 새마을 운동의 일환인 새마음 운동을 함께 전개했다.

그러나 최태민은 박 당선인의 삶을 덮친 또 하나의 파도를 부르는 이름이기도 했다. 박정희를 저격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최태민의 전횡에 대해 몹시 불만스러워 했다고 한다. 반면, 박정희의 또 다른 측근인 차지철 경호실장은 최태민 문제에 대해 다른 입장이었다. 이로 인해 김재규와 차지철은 심한 갈등을 빚었고, 결국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저격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79년 10.26 사태다.

선공후사? 다수 위한 소수의 희생?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은 박 당선인의 첫 마디는 "전방은요"였다고 한다.("판문점은요"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이는 2006년 지방선거 당시 지원유세 도중 서울 신촌에서 '커터칼 테러'를 당했던 박 당선인이 "대전은요"라고 한 것과 함께 종종 회자되는 발언이다. 20대 시절부터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며 공인 훈련을 받은 박 당선인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발언으로 꼽힌다.

'개인'을 지우고 '국가'를 우선하는 태도가 몸에 배 있기에 가능한 발언이라는 평가다. 그리고 '개인'보다 '국가'를 앞세우는 태도에 대해선 엇갈리는 해석이 있다.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자세를 높이 평가하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다수 또는 국가를 위한 소수 약자의 희생'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평가도 있다.

박근혜는 왜 사학 개혁에 저항했을까?

10.26사태부터 1998년 정계 입문까지 약 18년동안 박 당선인은 긴 칩거 기간을 보낸다. 당시 생활에 대해선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이 시기 박 당선인은 꾸준히 일기를 썼는데, '배신'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고 한다. 아버지가 측근의 총에 죽었다. 그러자 아버지의 측근들이 줄줄이 박 당선인 가족에게 등을 돌렸다. 박 당선인은 최근까지도 '사람을 잘 믿지 못한다'라는 평가를 받곤 했는데, 이는 당시 형성된 성격으로 풀이된다.

대외 활동이 없던 18년 동안의 삶에 대해선 이번 선거 기간에 집중적인 검증을 받았다. 박 당선인이 신기수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무상으로 증여받은 성북동 주택,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6억 원 등이 대표적이다. 또 육영재단, 영남대, 정수장학회 등을 둘러싼 온갖 의혹도 쟁점이 됐다. 훗날 정치인이 된 박 당선자는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사립학교법 개정에 격렬히 반대했다. 이는 영남대 이사장 등을 지낸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사립학교는 기본적으로 이사장의 재산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

육영재단 둘러싼 갈등

이 가운데 육영재단 문제는 동생들과 갈등을 빚었다. 박 당선인은 1982년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는데, 최태민 목사도 육영재단에 합류했다. 당시 박 당선인이 육영재단 운영에 관해 최태민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박 당선인은 1990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 퇴진 기자회견에서 "내가 누구에게 조종을 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하지만 박 당선인의 동생들인 박근령(원래 이름은 '근영'이었으나, 1994년 '서영'으로 개명하였고 2004년 다시 '근령'으로 바꿨다)과 박지만의 입장은 달랐다. 이들 동생들은 "언니(박 당선인)를 최태민에게서 구해달라"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에게 보내기도 했다. 이후 박지만은 박 당선인의 편으로 돌아선다. 그러나 박근령과 박 당선인의 갈등은 최근까지 지속됐다.

보수의 구원투수

박 당선인이 다시 대중 앞에 나선 것은 1998년 4월이었다. 당시 김석원 쌍용 회장이 국회의원 직을 내놓으면서 보궐선거가 치러졌다.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에 성공한 국민회의(현 민주통합당)는 안기부 기조실장 출신인 엄삼탁을 후보로 내세웠다. 김대중 정부가 야심차게 밀어붙인 동진정책의 일환이었다. 보수의 텃밭에 여당의 깃발을 꽂겠다는 것. 김대중 정부와는 모든 면에서 상극이라고 할 수 있는 엄삼탁을 공천한 이유였다. 대선 패배로 휘청이던 당시 보수 진영이 느낀 위기감은 대단했다.

당시 이회창 총재가 택한 승부수가 박 당선인의 공천이었다. 그리고 박 당선인은 보수 진영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거물 엄삼탁을 꺾고, 국민회의의 동진을 막았다. 당시 박 당선인이 지역구 주민들에게 받았던 지지는 열렬했다고 한다. 최근까지 박 당선인과 함께한 보좌진 역시 그때 형성됐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면모도 그때 마련됐다. 이후 박 당선인의 정치적 잠재력은 폭발적으로 분출한다. 한나라당 부총재 경선에도 출마해 당선됐다. 초선 의원으로선 이례적인 성취였다.

김종인을 묶어둘 수 있었던 힘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하던 이력에서 잠시의 외도가 2002년 한국미래연합 창당이다. 이회창 총재와 갈등을 빚던 박 당선인은 대선을 앞두고 독자적 정치 세력화를 목표로 한나라당에서 탈당한다. 그리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으나 대선 전에 복귀했다. 이후 그는 한나라당의 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이른바 '차떼기 사건'으로 한나라당이 위기를 맞았던 2004년은 박 당선인의 정치역정에서 결정적인 분수령이었다. 당시 한나라당이 천막당사로 옮긴 일은 박 당선인의 위기극복 리더십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2006년 지방선거 당시 신촌 커터칼 테러 역시 마찬가지다. 이후 박 당선인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아슬아슬하게 패배한다. 이에 깔끔하게 승복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박 당선인은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세종시 수정안 문제 등에 대해 원칙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이런 이미지는 견고해졌다. 결국 이는 2012년 대선 승리의 중요한 자산이 됐다.

실제로 김종인 등 개혁적 인사를 '박근혜의 사람'으로 묶어둘 수 있었던 힘도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들 개혁 인사들은 박 당선자에 대한 중도층의 반감을 희석하는 역할을 했고, 대선 승리의 핵심 요인이 됐다.

세습 권력 시대, '양극화' 숙제 못 풀면 부메랑


▲ ⓒ뉴시스
하지만 박 당선인의 승리를 낳은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결국 아버지다. 박 당선인의 유세 현장에서 나타난 뜨거운 반응은 대부분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기와 겹치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에 기인한 면이 크다. 박정희가 박 당선인에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대통령직 그 자체라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림자가 박 당선인이 대통령이 된 뒤에도 든든한 배경이 돼 줄지는 미지수다. 박정희 시대에 경험했던 '고도성장'은 이제 불가능하다. 이번 대선 최대의 화두는 '양극화'였다. 개천에선 더 이상 용이 나지 않는다. 부모의 경제력과 지위, 학력과 학벌을 대물림하는 게 당연시된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성토하는 분위기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전직 대통령의 딸'이 다시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도 대물림하는 사회. 박 당선인이 '양극화'라는 숙제를 제대로 풀지 못한다면, '대통령 대물림'을 바라보는 국민의 싸늘한 시선은 박 당선인에게 그대로 부메랑이 돼 날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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