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는 메이저리그 선수노조(MLBPA)의 초대 위원장인 마빈 밀러가 간암과 싸우다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고 전했다. 20세기 중반 구단의 횡포에 시달리던 선수들을 대변해 많은 파업을 이끌어 권익 향상을 이루고, 선수의 기량이 '돈'과 연결되는 현대 프로 스포츠의 기반을 다진 인물의 죽음에 많은 선수들이 애도를 보내고 있다.
밀러가 선수노조의 초대 위원장을 맡았을 무렵, 미 프로야구 구단들은 선수들에 대한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제도가 '보류 조항'이었는데, 이 조항으로 인해 선수들은 계약기간이 끝나도 원 소속팀이 방출하지 않으면 다른 구단과 계약을 맺을 수 없어 협상력을 거의 갖지 못했다. 당시 최저 연봉은 6000달러였는데 20년 동안 이 액수는 변하지 않았고 선수들의 연금 역시 다른 직업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었다. 선수들이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대상은 메이저리그 사무국 국장(커미셔너) 뿐이었지만, 보통은 구단 측 이해에 기울어진 이들이 자리를 맡았다.
하지만 밀러가 취임한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신문은 밀러가 1982년 은퇴할 때까지 가장 강력한 노조 중 하나를 구축했고, 농구와 미식축구, 하키 선수노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밀러의 재직기간 동안 보류 조항이 폐기됐고, 선수들의 연봉은 급상승했으며, FA제도가 도입돼 자신의 재능에 가장 많은 돈을 제시하는 팀을 선수가 선택할 수 있었다. 1975년 보류 조항을 무효화하고 FA제도를 만들어낸 당사자인 피터 자이츠 당시 중재인은 밀러를 두고 '야구계의 히브리인을 속박의 땅 밖으로 이끈 모세'라고 칭했다.
▲ 마빈 밀러 미 프로야구 선수노조 위원장이 1981년 파업 중단 제의를 거절하고 인터뷰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베이브 루스와 비교되지만 명예의 전당에는 떨어져
1917년 4월 14일 브롱크스에서 태어난 밀러는 의류업체 세일즈맨인 부친과 초등학교 교사로 뉴욕시 교사노조 활동을 하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1938년 뉴욕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밀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국가 전시 노동위원회에서 노사 간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맡았고 이후 국제기계공협회(IAM)와 전미자동자노조(UAW)에도 몸을 담았다. 1950년에는 전미철강노동자협회(USU)에 들어가 단체협상에 참여하기도 했다.
같은 시간 메이저리스 선수들 사이에서는 1947년 도입된 연금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에도 일종의 노조가 있기는 했지만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1954년 설립한 MLBPA는 열악한 재정상황을 안고 있었고 단체협상도 벌이지 못했다.
훗날 미 켄터키 주 상원의원에도 당선된 야구스타 짐 버닝을 비롯한 선수들은 노조에 전문 협상가를 영입하는 안을 낸다. 초대 위원장으로 낙점을 받은 밀러는 프로 스포츠 세계에 뛰어드는 것을 처음에는 주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블루칼라 노동자들에 비해 운동선수들은 교육수준이 낮았고, 노조 경험도 없었으며, '야구를 하면서 돈을 받는 것에 감사하라'는 구단의 말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밀러와 처음 만남을 갖기 전 선수들은 입에 시가를 문 덩치 큰 노조 지도자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지만 조용하고 부드러운 외모에 절제된 태도를 갖춘 그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고 전 뉴욕 양키스 소속 투수였던 짐 보든은 회상했다.
밀러의 지휘 아래 선수노조는 1968년 프로 스포츠계에서 처음으로 단체협상을 벌였다. 1972년 봄에는 북미 스포츠 역사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다. 당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경영하던 폴 리처드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와 히로히토도 야구를 중단시키지 못했는데 마빈 밀러는 해냈다"라고 회고했다. 1981년에는 정규시즌 도중에 50일 동안 파업을 벌이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
보류 조항 무효화, 연봉협상권 획득 등 파업의 성과가 이어지면서 선수들의 연봉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야구 경기의 텔레비전 중계료도 늘어나면서 야구계에 흐르는 돈의 규모가 달라졌고, 강타자 레지 잭슨 등 슈퍼스타들은 대형 계약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밀러의 활동과 당시 야구계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당시 야구가 미 서부 해안 지역과 남부 지역으로 확장되면서 중계 수요 및 관중수가 늘어났고, 새로운 수익원을 발견한 구단들이 타 구단 소속 선수들에게 지갑을 열 유인이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밀러의 업적이 운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신문은 밀러가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은 선수들이 구단의 착취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운동 능력을 임금 협상력으로 발휘하도록 설득했다는 점에 있다고 전했다. <뉴요커>의 말콤 글래드웰은 2010년 기사에서 밀러가 전문직에 해당하는 프로 스포츠 선수들에게 노동자 계층을 보고 배우도록 설득하는 게 목표였다고 밝혔다.
그의 업적은 야구 경기에서 홈런의 가치를 재정립한 베이브 루스,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을 브루클린 다저스에 입단시켜 처음으로 인종 장벽의 벽을 깼던 브랜치 리키에 비견되지만 그는 5번에 걸친 도전에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 투표에서 떨어졌다. 선수노조에 반발하는 구단들이 그의 헌액으로 노조의 힘이 더욱 강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밀러 자신도 2010년 다섯 번째 시도에서 실패한 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구단들에게 불쾌감을 토로했다. 밀러가 노조 위원장으로 활약할 당시 메이저리그 사무국 커미셔너로 재직했던 보위 쿤은 2007년 이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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