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政治) 등 여러 다른 분야에서 리더십(Leadership)을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기까지 하지만 언론(言論)에 있어 리더십 운운하는 것은 좀 당혹스럽다. 언론에 있어서는 리더십이 적극적으로 주장될 게 아니라 오히려 소극적으로 주장되거나 부정적으로 말하여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언론의 역할은 다른 분야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언론생활을 했을 때의 대표적인 두 명의 언론인을 골라 생각해 보겠다. 천관우 씨와 송건호 씨인데 두 분 모두 우리나라의 유명한 언론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각각 서로 다른 언론인의 전형(典型)을 대표하고 있다고 보여서 골라 본 것이다.
송건호 씨에게는 이런 글이 남아있다.
"여야 대립이란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이것이 이질적 대립이 못 되고 동일한 차원에서의 싸움의 되풀이로 그치기 쉬운데 만약 지식인의 참여가 현상적 비판에 끝나 질적으로 동일한 차원에서 맴돌게 된다면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전혀 발전이 없는 제자리걸음밖에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인의 현실 참여가 역사에 기여하는 참된 기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학문적, 사회과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본질적 참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서 「민족지성의 탐구」에서)
천관우 씨의 추모문집에 기고하면서 나는 이렇게 썼다.
"천 선생과의 대화는 대개 언론자유, 민주주의 등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얼마간 다르게 어떤 민주주의냐에 관심을 가졌었다. 요즘 하는 이야기로는 약간 진보적인 관점이다.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을 물리친 다음에는 어떤 민주정권을 이룩할 것이냐는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그 점을 천 선생에게 여러 번 질문 했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만 되면 족하다. 그러면 그 후는 잘 될 것이다' 요지의 말만 되풀이한다. 틀린 말은 아닌데 나는 어떤 방향을 알 수 없을까 하여 계속 아쉬워했었다" (추모문집「거인 천관우」에서)
▲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프레시안 |
광장수호론은 언론은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의 옹호자로서 그 민주주의가 꽃을 피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고, 침입자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등 그 광장 수호에 전력을 다하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한 광장이 확보되면 거기서 여러 주장이 예정조화론적(豫定調和論的)으로 잘 발전할 수 있다는 낙관론도 있다. 여기서 광장의 침입자에 대한 투쟁은 매우 전투적인 리더십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런 것을 우리는 독재자나 권위주의 시대에 오랫동안 겪었다. 권력으로부터의 탄압, 광고주들로부터의 압력 등은 모두 잘 아는 일이다. 사회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편견 등으로부터의 광장 확보도 중요하다. 특히 사회적 이상 분위기가 있을 때 (일종의 사회적 히스테리라고 할까) 그 이상 분위기의 강압이나 위협으로부터의 광장의 확보는 더더욱 중요하다. 이점이 매우 까다로운데 내가 특히 강조하려 하는 오늘날의 문제점이다. 물론 최근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미국 인권기관 www.freedomhouse.org: 편집자)가 보고한 것처럼 한국의 언론자유가 근래 후퇴하고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겠다.
소신관철론은 언론이, 예를 들어 본질적으로 별 차이 없는 여야의 주장들만을 반영하며, 그들이 그어놓은 선 안에서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며 그칠 게 아니라 (지금은 송건호 씨 때보다 많이 달라졌다) 그런 것들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밑바닥을 추궁, 분석하는 등 시대의 진전에 기여하여야 한다는 현상돌파론(現狀突破論) 또는 개혁론(改革論)이다.
가령 위에 말한 두 전형(典型)이 성립된다고 할 때 어느 쪽을 따를 것인가는 쉬운 문제인 듯 하면서도 망설여진다. 광장수호론을 따를 때 리더십의 문제는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되며 희미해진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방어를 위해 때로는 과감한 투쟁도 해야겠지만 말이다. 소신관철론에서는 그렇지 않다. 소신이란 적극적이기에 항상 리더십의 문제가 있게 된다. 반 농담 삼아 말하면 리더십이 너무 강하여 서양 동화에 나오는 것 같은 Pied Piper(피리로 쥐들을 잘 꼬여내다가, 어린이들까지도 유괴하였다는)처럼 되어 버려도 난감한 일이다.
그런데 현실이란 그런 전형으로 나뉘는 게 아니다. 현실이란 말하자면 회색의 지대이기에 두 가지가 모두 혼재(混在)할 수밖에 없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분야와는 매우 다르게 리더십이 너무 강하면 곤란하다. 리더십이 너무 강하면 부작용(副作用)이 심할 것이란 이야기다.
좀 오래 전 인물을 예로 들면, 한국일보의 장기영 사장과 조선일보의 방일영 사장을 비교하여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짐작이 갈 줄 안다. 장 사장은 모든 일에 적극적(영어로 말하여 Aggressive)이었으며, 방 사장은 그와 반대로 수동적(Passive)이었다.
오늘은 주제와 관련하여 참고 삼아 요즘 읽어서 기억에 남는 두 신문 칼럼을 소개하고 싶다. 칼럼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분위기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좌파, 그 호명이 불편한 이유>란 칼럼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국민은 합리성을 추구하지만, 기득권 세력이 국민과 공유하기를 원하는 '좌파' 이미지는 사회혼란 세력이며 집권불가의 자질과 국가관을 가진 집단이다. 지금 그들이 보일 수 있는 알량한 아량은 '좌파'도 국가보안법을 준수하는 한 이 사회에서 영원한 소수파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정도다. 전쟁으로까지 비화한 이념 갈등의 역사가 '좌파'라는 용어에 관한 한 아직도 국민의 이성적 판단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래서 '좌'와 '우'의 이념이 자유롭게 경쟁하고 소통하며 '좌파'라는 호명이 국민의 마음속에서 정당한 시민권을 획득하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 아직은 우리가 할 일이 너무 많다"
(한겨레 4월 25일 자 '이종석 칼럼': 편집자)
<민노당, 숙주(宿主)된 민주당>이란 칼럼의 마지막은 이렇다.
"한 민주당 중진 의원은 '일단은 후보 단일화로 끌어안고 살살 다루면 된다'"라고 말했다. 후보 단일화라는 '사과'는 먹고, 종북주의나 반(反) 시장주의 같은 민노당의 "독(毒)은 뱉어낸다는 말이다. 일제(日帝)에 맞서 중국 공산당과 두 차례 국공합작(國共合作) 했던 중국 국민당도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자기들은 타이완으로 쫓겨났고 중국 본토는 공산당에 내어주고 말았다"
(조선일보 5월5일 자 칼럼 '태평로', 정우상 논설위원: 편집자)
1950년대 전반부터 미국에 매카시즘(McCarthyism, 확실한 이유 없이 불충(不忠), 국가 전복, 반역을 고발하는 정치적 행위: 편집자)의 회오리바람이 세차게 불어 닥친 일이 있다. 중국 본토가 공산화 된 데 따른 심리적 충격의 영향이라고도 했다. 대공황 이후 FDR(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 대통령: 편집자)의 뉴딜l 시대에 활동한 진보적 인사들을 불신하여 그 가운데 공산분자가 있다고 그 색출작업을 매우 선동적으로 진행했다. 옹기 가게에 뛰어든 황소처럼 난폭하기도 했다. 그 당시의 말이나 글이 표현들이 너무나도 살벌하여 'The Age of verval overkill(언어에 의한 과잉 살상 시대)'란 표현까지도 나왔다. 정신풍토가 황량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이란 개혁정권(진보정권까지는 아니라고 본다)의 시대를 지나면서 특히 대북정책의 큰 변화를 보면서, 보수 세력의 불만이나 울분이 폭발하였고 우리 언론들도 보수 쪽이나 개혁(진보)쪽 모두 'The Age of verval overkill'의 시대를 경험한 셈이다. 분명 모두 도를 지나친 것 같다.
이제 이명박 정권도 3년이 지났으니 그 울분이 차차 가라앉을 때도 되었다. 또 그런 조짐도 보인다. 하루 빨리 정상(正常), 또는 평상(平常)의 시대가 회복되기를 바란다. 자유롭고, 관용있고 활달하고, 풍성한 그런 언론 풍토, 정신 풍토 말이다.
언론 종사자들 모두의 세심한 주의와 자제가 요망된다. 그러한 주의와 자제를 보이는 일이 언론에 당면하여 요구되는 리더십이다.
소신관철론의 리더십에 난점(難點)이 있음을 좀 더 말해두고 싶다.
우선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을 생각해보라. 다 아는 바와 같이 머독은 영국, 미국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에 걸쳐 언론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가 소유한 폭스 뉴스 TV(Fox News TV) 등이 심한 정치 편향으로 화제가 되고 있지만, 오래 전에 영국에서 그가 소유한 신문 <더 선(The Sun)>이 토니 블레어의 집권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공인된 이야기였다.
가령 언론이 리더십을 너무 강하게 발휘하고 그 주장을 고집스럽게 관철하려 무리를 할 때(문제를 제기하고 전개하는 데 머물지 않고 끝장까지 내려 할 때), 대개 현실의 왜곡(歪曲)이 심하게 생기게 된다. 언론의 횡포 문제가 등장한다. 언론의 오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비슷한 걱정이 일고 있다. 주장이 강하여야 할 곳은 정치, 경제, 문화 등 각각의 영역에서이지 언론 스스로가 맡고 나설 일은 아니다. 정치, 경제, 문화 등의 각 분야에서 그 주체들의 역할을 존중한다는 뜻도 있다.또 사실 언론이 주도하기엔 인력이나 전문성에 있어서 뒤지기도 하는 게 아닌가.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 있어서는 주장이 주업(主業)이고, 언론에 있어서는 주장이 부업(副業)이란 비유도 가능하지 않을까. 언론의 주업은 광장 마련이나 수호일 것이다. 이 문제도 일도양단(一刀兩斷)으로 처리될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일 것이므로 언론인들의 현명한 판단에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사회 전체의 리더십, 좁혀서 정치적 리더십과 언론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우리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주도 세력이 있고 주도 이념(정책 프레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 그 주도 세력이나 주도 이념은 단수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고 복수로 제시되며 경합하고 있다는 것을 유의하여야 한다. 그런것이 민주사회이기 때문이다. 주도세력, 주도이념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민주정치는 선거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리더십 문제는 리더(Leader)나 리더들(Leaders)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언론이 정치적 리더십에 관심을 두고 기여한다는 것은 결국 리더들(Leaders)의 선거에 개입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개인숭배(Cult of Personality)의 차원이 될 위험도 있는 정치리더십론은 경계해야 한다. 이른바 '용비어천가'가 이미 나오고 있지만 그것이 합창이 될 수도 있다. 그때 우리 정치는 오히려 답보 또는 후퇴하게 된다.
물론 리더 개인도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지금은 집단의 시대이다. 집단 간의 인적 구성이나 정책프레임의 경합이라는 측면이 더욱 중요시되어야만 한다. 보다 수준 높은 언론이 되기 위해서는 한두 사람의 지도자 중심보다는 정치집단들의 사람들의 됨됨이나 정책프레임의 경합이란 차원에 보도, 논평을 집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인물론(人物論)이 자칫 도가 지나쳐, 정치학(政治學)이 관상학(觀相學)으로 타락할 수도 있겠다. 이번의 경우 복지국가에의 진일보는 어떻든 불가피한데 재원 · 우선순위 · 시간표 등 구체적인 청사진들을 놓고 국민의 마음을 얻는 경쟁일 것이다. 언론은 그 심판자다. 마냥 포퓰리즘(Populism, 대중영합주의) 타령(OECD 국가통계 참조: 회원국 30개 국 중 종합복지수준 26위임)으로 우민(愚民) 정책을 펼 시대는 아니라고 본다.
* 이 글은 지난 6월 16일 개최된 <11회 가톨릭 포럼> "한국-리더쉽의 위기를 말한다 : 진단과 제언"에서 발표됐던 발제문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