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1996년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인수를 제일모직이 포기하도록 해 제일모직에 끼친 손해에 대한 책임이 있으므로, 130억 여 원을 배상하라."
장하성 고려대 교수 등 제일모직 소액주주 3명이 지난 2006년 제기한 소송에 대해 1심과 항소심 법원이 내린 결론이다. 삼성 경영권 승계 목적으로 발생한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 사건에 대한 형사 재판은 지난 2009년 '무죄'로 최종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 사건 관련 민사 재판은 반대 방향으로 가닥이 잡힌 셈이다. 이 회장의 책임을 인정하는 쪽이다.
1심 선고까지 4년10개월을 끌었던 민사 재판 과정도 간단치는 않았다.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 관련 형사 사건 기록은 증거기록만 1만6000여 쪽에 이른다. 그러나 형사 사건을 담당했던 서울고법, 대법원, 서울중앙지검 등은 이 회장과 관련한 형사재판 기록의 송부와 열람을 연거푸 거부했다. 사건 기록 가운데 극히 일부(46쪽)을 민사 재판부에 송부했으나, 이는 이건희 회장 측이 "공개해도 괜찮다"고 의견서에서 밝힌 범위 안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이건희 회장 눈치를 보며 진행하는 재판'이라는 비난이 일었던 이유다.
대구고법 제3민사부(홍승면 부장판사)는 22일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피고 이건희 등이 직접 또는 비서실을 통해 제일모직에 전환사채 인수를 포기하도록 지시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며 피고의 항소를 기각했다.
이어 재판부는 "에버랜드 전환사채는 피고 이건희의 장남 등에게 조세를 회피하면서 에버랜드의 지배권을 넘겨주기 위해 이건희 등의 주도로 이뤄졌고,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제일모직에 전환사채 인수를 포기하도록 한 것은 업무상 배임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또 이 회장 등과 함께 피소된 제일모직 이사 유모씨 등 2명에 대해서는 "합리적 경영판단은 존중되야 하지만 14억원의 전환사채 인수대금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139억원의 손실을 입힌 것을 합리적 경영판단으로 볼 수는 없고, 이사로서 임무를 위배한 제일모직에 대한 업무상 배임행위이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상법 관련 규정에 따라 이사의 책임을 묻는 경우에 구체적 사정을 참작해 손해배상액을 감액할 수 있지만 피고 이건희의 경우 감액할 사정이 없어 감액하지 않는다"며 원심과 같이 130억여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1심을 맡았던 대구지법 김천지원 민사합의부는 "피고는 증여세 등 조세를 회피하면서 그룹의 경영권을 이전하려는 목적으로 전환사채를 발행하게 하고, 제일모직에 전환사채를 인수하지 않도록 한 것은 배임에 해당한다"며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는 만큼 130억여원을 배상해야 한다"며 원고일부 승소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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