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는 '카스트'라 불리는 견고한 신분질서가 존재한다. 브라만(Brahman)·크샤트리아(Kshatriya)·바이샤(Vaisya)·수드라(Sudra) 등 크게 4계급으로 나누어진 카스트 체제는 인도국민 대부분을 포괄하지만 그 계급질서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이른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untouchable)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들인데 이들은 계급 밖에 그리고 신분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로 인도 전역에 거주하며 숫자가 무려 1억명에 달한다고 한다. 인도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이들 불가촉천민들은 당연히(?) 사회에서 가장 어렵고 더럽고 힘든 일들을 떠맡는다. 불가촉천민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이 있지만, 하리잔(Harijan)이라고도 불리는 불가촉천민들에 대한 인도사회의 차별은 여전히 강고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한다.
느닷없이 인도의 불가촉천민 얘기를 끄집어 낸 건 언론에 보도된 대학생 용역깡패 관련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과 <오마이뉴스>에는 만도 공장 파업 현장에 투입된 용역 중 한 명의 사연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대학에 다니다 궁핍한 가정 형편으로 휴학을 하고 직장을 다니다 고졸의 비참함을 절감해 다시 복학을 한 대학생의 삶은 핍진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는 학비 등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일을 전전하다 망가진 육체를 이끌고 용역이 됐다.
'비판받을 일을 하고 있는 걸 알지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그의 절규는 가슴을 찢는다. 모르긴 몰라도 용역들 중 상당수가 이 대학생과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한국사회의 계급 질서 속에 편입되지 못한 채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용역들이, 그런 용역들의 처지 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는 공장 노동자들과 피투성이 싸움을 벌이는 광경을 목격하는 일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신분 질서 밖에 놓인 사람들이 신분 질서의 가장 아래 위치한 사람들과의 혈투를 통해서만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나라를 정상국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건희가 자행하는 온갖 불법과 위법과 탈법행위에 철저히 무력한 국가는 계급 밖에 있는 시민과 계급 맨 아래 있는 시민 간의 충돌을 예방하거나 조정하는데도 완전히 무력하다. 제 역할을 방기한데다 무능한 국가, 지나치게 강한데다 탐욕스럽기만 한 시장, 약하고 분열돼 있는 시민사회. 이 삼자의 도착적 결합 아래 오늘도 불가촉천민들과 신분질서의 맨 아래 놓인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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