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이에 시작하는 영어교육의 효과가 크지 않을 뿐 아니라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지만, 과도한 영어 조기교육의 폐해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아 과감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영유아 보육시설부터 초등학교 1, 2학년까지의 교육과정에서 영어수업을 금지시키고, 사교육 기관은 물론 공교육 기관에서 행해지는 조기영어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감독도 더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의견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교육운동 단체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은 지난 8일 저녁 서울 용산구 세미나실에서 토론회를 열어 7일 김춘진 민주통합당 의원실이 분석한 서울 40개 사립초등학교 영어수업 운영실태 자료를 공개하고,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단체는 영어, 수학 등 대표적 대입과목의 선행학습을 금지하는 내용의 '(가칭) 선행학습 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취지로 지난달 15일부터 총 여섯 차례에 걸쳐 연속토론회를 실시하고 있다.
서울 사립초, '전부' 영어 중독
김 의원실과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에 따르면, 서울 소재 40개 사립초등학교 전부가 초등학교 1학년부터 영어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정규 교과과정에서 영어교육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시작한다. 3, 4학년은 주당 2회씩 연간 132시간의 영어교육을 받고, 5, 6학년은 주당 3회씩 연간 204시간의 영어수업을 듣는다. 반면 사립초등학교의 상당수는 1학년 때부터 연당 200시간이 넘는 영어교육을 받았다. 공립초등학교 재학생과 사립초등학교 재학생의 초기 영어능력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우촌초등학교의 경우, 입학부터 졸업까지 매년 연간 544시간에 달하는 영어교육을 소화한다. 홍대부설초등학교는 1학년 때 408시간의 영어수업을 받으며, 3학년부터 졸업까지는 연간 340시간의 영어교육을 소화했다. 매원초등학교는 영어수업이 가장 많은 2학년 때 연간 518시간의 영어수업이 잡혀 있었고, 그 외 학년에서도 430시간이 넘는 영어교육을 받았다.
영어수업시간이 이처럼 많이 잡힌 까닭은 수학, 과학, 사회, 도덕 등 다양한 과목을 영어로 가르치는 영어몰입교육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서울 사립초등학교 가운데 28개 학교가 영어몰입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초등학생이 한글로도 이해하기 힘든 수준의 수업을 영어로 진행한 셈이다.
1, 2학년의 경우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영어수업으로 활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사립초등학교 1, 2학년 학생들이 소화하는 영어수업량은 영어몰입수업과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한 영어수업을 합산해 총 245시간에 달했다. 주당 7.2시간을 영어에 소화한 셈이다. 토론회에서 이 자료를 발표한 최민석 윤중초등학교 영어전담교사는 "다수의 사립학교에서 전학년 아이들이 하루 평균 7~8교시의 수업을 듣는 게 바로 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수준별 학습과 선행학습 수준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40개 사립초등학교 중 36곳에서 수준별 학습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들 학교는 실용영어인증평가시험인 펠트(PELT), 초등영어시험인 제트(JET)와 토셀(TOSEL), 토익 브리지(TOEIC Bridge) 등과 같은 공인 영어시험을 수업에 활용했다.
선행학습의 수준은 정규 교육과정 범위를 크게 넘어섰다. 충암초등학교가 수업에 사용하는 영어단어 수준을 보면 초등학교 1학년 때 이미 중학교 1학년 과정을 시작했고, 이를 순차적으로 중고등 과정에 적용해 6학년 때는 고등학교 3학년 수준의 단어를 가르쳤다. 사립초등학교가 사용하는 영어교재도 <저니(Journey)>, <코너스톤(Corner Stone)> 등 미국의 교재였다.
▲일명 영어유치원으로 불리는 어린이 영어전문학원은 어느새 '성공하는 아이'를 꿈꾸는 이들이 욕망하는 곳이 됐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뉴시스 |
심각한 부작용
이처럼 과도한 영어 열풍이 이는 까닭은 우리 사회에서 영어가 '권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카이스트 자살 사태의 배경에도 영어가 자리 잡았다. 영어를 잘 해야 출세한다는 믿음이 영어에 과도한 돈을 투자하고, 과도한 시간을 쏟아 붓는 현상을 낳았고, 이러한 몰두가 영어 조기교육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윤진 육아정책연구소 부연구위원은 "일부 산모가 1000만 원짜리 산후조리원에 들어가 '아이의 인맥이 형성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처럼, 부모들은 아이가 '영어'로 대표되는 특수계층에 포함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윤진 부연구위원이 지난해 발표한 '유아 외국어 교육실태 연구'에 따르면 지난 2010년 현재 서울과 경기도 초등학교 1, 2학년 학생 1200명이 영어교육을 처음 시작한 연령은 3~4세가 65.7%로 가장 많았다. 1.3%는 태교부터 영어교육을 시작했다. 이날 토론회에도 참석한 이 부연구위원은 "'영어 놀이학교-영유아 영어전문학원(영어유치원)-사립초등학교-국제중, 고-명문대'로 이어지는 엘리트코스가 자리 잡았다"며 "어릴 때부터 영어교육에 돈을 쏟아야 아이가 상층부로 진입한다는 믿음이 과도한 사교육 열풍을 낳았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사교육 경쟁은 결국 아이들 수준에 전혀 맞지 않는 조기교육이 이뤄지는 배경이 됐다. 학원마다, 학교마다 '더 수준 높은' 영어교육을 마케팅 수단으로 삼게 됐기 때문이다.
김승현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 정책실장은 "2010년 현재 서울(76곳)과 경기도(70곳)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273곳의 영유아 영어전문학원이 운영 중이며, 학원비는 월 최고 170만 원에 이른다"며 "영어학원에서 편성되는 영어시수는 6~7세 아동이 감당하기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고, 수준도 초등학교에서 접하게 되는 내용을 미리 배우는 선행학습 형태로 진행된다"고 지적했다.
즉, 사립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중학교 1학년 수준의 수업을 듣는 배경에는 조기교육 열풍으로 인해 유아기 어린이가 초등학교 과정을 미리 배우는 현실이 자리한 것이다. 정규교육과정이 무력화된 셈이다.
그러나 이런 조기교육은 학습효과보다 문제점이 더 많다는 게 토론회 참가자들의 전반적인 지적이었다.
김승현 실장은 "조기영어교육은 학습효과 측면에서 전형적인 '고비용, 저효율'의 학습"이라며 "조기영어교육의 근거가 되는, '언어를 배우는 데 있어서 이른바 결정적 시기가 있다'는 주장도 모국어 습득이나 영어를 쓰는 나라에 이민을 간 상황에서는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외국어로서 영어를 배우는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와 관련, 영유아 영어전문학원에서 10년 간 강사로 활동했던 김나경 교사는 지난해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 발간한 <아깝다, 영어 헛고생> 소책자에서 "다섯 살인 아이가 2년에 걸쳐 습득한 영어 수준을 초등학교 1학년 아이는 6개월 정도면 다 터득한다"고 지적했다.
김 실장은 특히 과도한 영어 조기교육이 아이의 인지, 정서 발달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고 강조했다. 실제 상당수 전문가들은 부작용이 심각한 경우 아이의 모국어 습득 능력이 크게 떨어지고, 우울증과 불안, 애착장애, 스트레스와 같은 정신병리학적 문제까지 일으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노성임 푸른 미래 언어치료센터 원장은 "조기영어교육으로 인해 생기는 언어발달 문제의 가장 흔한 사례가 언어발달 지체다. 모국어가 완성되지도 않은 상황에 영어가 개입해 아이가 사용하는 언어가 뒤섞이고, 발음이 이상해진다"며 "특히 아이들이 커서 사춘기가 올 경우, 심각한 말더듬이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이 2000년대 들어 특히 늘어났다"고 말했다.
실제 동덕여대 우남희 교수 연구팀이 공동육아 시설 어린이와 영유아 영어전문학원을 다니는 아이의 언어 창의력과 도형 창의력을 비교한 결과, 영어학원을 다니는 아이의 창의력 점수가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공동육아 시설 어린이의 언어창의력과 도형창의력은 각각 92점, 106점이었으나, 영어전문학원에 다니는 아이의 점수는 각각 68점, 85점에 머물렀다.
조기영어교육 금지해야
▲김승현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 정책실장. ⓒ프레시안(최형락) |
이 때문에 각급 학교에 대한 단순 계도, 시정조치만으로 조기영어교육이 낳는 부작용을 통제하기는 어렵다는 게 이날 토론회에서 적잖은 이가 동의한 결론이었다. 결국 조기영어교육을 정부 차원에서, 혹은 법제화를 통해 금지시켜야만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이유다.
김승현 실장은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에서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교육을 실시함에도 불구하고, 공교육 기관에서 이를 무시하고 그 이전에 영어 교과를 정규 교육과정에 편성하여 운영하는 것은 분명한 자기모순"이라며 "초등학교 3학년 이전 정규 교육과정에서 영어교육을 금지하는 것은 당연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김 실장은 "내년부터 만 5세 누리교육과정이 도입됨에 따라 국공립 보육시설은 물론이고 유치원과 어린이집도 공교육 체제 안에 들어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며 "(이들 교육기관에서의 영어조기교육 금지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다만 사립초등학교에서 행해지는 모든 영어교육을 금지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현실론도 인정됐다. 김 실장은 결국 "가장 폐해가 심각한 영유아 대상 영어전문학원에 규제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며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개별 아동에게 제공되는 주당 수업 시수를 규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아동의 건강한 성장을 보호하기 위해 개별 아동에게 주당 120분이 넘는 프로그램은 제공하지 못하는 식의 교육시간 제한제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김 실장은 "(규제의 현실성을 감안할 때) 진도나 프로그램이 아닌 시수(수업시간)를 통해 규제"하는 게 "법 시행의 실효성 확보 차원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또 성인을 대상으로 한 공인영어인증시험, 즉 토플(TOFEL), 토익(TOEIC), 텝스(TEPS) 등과 같은 시험에 영유아와 초등학생이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물론, 현행법에서도 불법인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조기유학도 철저히 금지시켜야 한다고 김 실장은 강조했다.
이와 관련, 교육과학기술부가 지난 2010년 10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이 해 1~9월 사이 영어 인증시험 텝스를 본 초등학생과 중학생은 2만529명에 달했다.
김 실장은 "연령 제한을 통해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발달 단계에 맞지 않는 성인 대상 공인영어인증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을 선행학습 금지법에 포함할 필요가 있다"며 조기유학에 대해서도 "일선 학교에서 귀국 후 유학 기간을 당연하게 학력으로 인정해주는 관행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사실상 사문화된 상태"이므로 "무분별한 조기유학이 확산되는 것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학부모들의 이러한 열망을 다잡기란 힘든 것 아니냐는 반론도 나왔다. 또 법제화까지 해 학교 당국을 단속하는 건 지나치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박상화 교과부 영어교육정책과 교육연구관은 "지금도 교육관련 현행 규정과정에서 3학년 이전에 영어를 배우는 데 대해 지도할 수 있다"며 "법을 만들지 않아도 행정적 조치로 막을 수 있다"고 해명했다.
박 연구관은 "현실적으로 초등학교 입학생 대다수가 영어 사교육을 받고 들어오는데, 공교육 입장에서도 그 상황에 맞는 교육을 해줘야 하는 입장이 있다. 공교육이 (현실에) 대응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영어인증시험 응시연령 제한에 대해서도 "규제만 해서 제한할 수 있겠느냐"며 "영어인증시험의 활용성을 없애는 방안이 타당하다"고 반박했다. 조기유학 규제의 경우는 "이전에도 교과부에서 논의가 됐으나, 이게 과연 처벌할 만한 일이냐는 지적이 있었다. 실제 입법화까지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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