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안보·평화의 큰 게임과 작은 게임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안보·평화의 큰 게임과 작은 게임

[남재희 칼럼] 통합진보당, 원내교섭단체 실패에 생각한다

이번 국회의원 총선 결과를 놓고 민주통합당 안에서는 패배를 운운하며 인책론이 일고 있다. 새누리당이 과반의 턱을 넘는 승리를 했으니 민주통합당의 실패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크게 이기지 않았는가. 영·호남의 지역 대립이 굳건하게 남아 있고 영남이 너무나도 방대하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보면 진 것이 아닌가. 비겼다. 나는 오히려 민주통합당이 전화위복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영어에 a blessing in disguise(괴롭지만 결국은 행복하게 되는 것)라는 표현이 있기도 하다.

이번 총선을 보고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통합진보당이 의석 13석(정당득표율 10.3%)을 차지하는 신장을 보이기는 했으나,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20석에 훨씬 미달하는 좌절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여간하지 않다.

통합진보당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명망가들, 그리고 유시민 씨의 국민참여당이 합해지는 등 근래 없이 좋은 조건에서 출발하였으며, 거기다가 야권연합에 성공하여 최상이라 할 상황에서 선거를 치렀다. 아마도 그 이상의 좋은 조건은 여간해서 갖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

▲통합진보당 대표단이 11일 오후 당사에서 출구조사 결과를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고 있다. 왼쪽부터 이정희, 유시민, 심상정 공동대표. ⓒ뉴시스

그러면 왜 원내교섭단체 확보에 실패했는가. 선거에 실패하고 나면 오만가지 이유가 거론되기 마련이다. 선거에 성공하면? 역시 무수한 까닭이 들먹여지겠지만 결국 후보가 잘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압축되기 마련이다.

정운찬 전 총리는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을 사퇴한 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재미있는 관찰을 하였다. 정책상으로 보면 새누리당이 전날의 민주당 정도로, 통합민주당이 전날의 민주노동당 쯤으로 좌클릭했고, 통합진보당은 거의 '홍길동'당 수준이라고 했다. 학자로서는 존경받아왔지만, 정치인으로서는 그의 발언이 무게가 훨씬 떨어져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각 당의 정책 상의 지각이 변동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울산에서 김창현 씨가 실패하고, 창원에서 문성현 씨가 좌절하는 등 이른바 노동자벨트에서 당대의 알아주는 맹장들이 낙선한 것을 의외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나올 분석들을 기다려 보아야 하겠다. 통합진보당은 가장 중요하게는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다고 말해왔기에 주목하는 것이다. (☞관련 기사 : '박근혜 매직', 울산·창원·거제 '진보벨트' 풀었나?)

그리고 관심을 갖는 것은 안보·평화의 이슈라고 말하고 싶은데, 남북관계와 관련된 문제에서 몰리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어떤 비례대표 예비후보가 '해적기지' 운운하는 경망하기 짝이 없는 발언을 하여 경선에서 탈락하기는 하였으나, 보수·우파가 계속 '종북' 운운하고 비난하는 좋은 빌미를 준 것이 가장 눈에 띈다.

'종북' 운운은 크게는 색깔 공세, 매카시즘으로 파악하여야 하겠지만, 그들 안에 진짜 '종북'이 아주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도 어렵다. 그 문제는 치안 차원의 문제로 그 적발에 맡겨야 할 일로 본다. 또한 그들이 분파 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한 쪽이 다른 쪽을 '종북' 운운하고 험담하는 돌이키기 어려운 과오를 범하기도 하여 그 논쟁이 계속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유당 정권 때 언론에 '춘치자명(春雉自鳴)'이라는 말이 나왔었다. 봄 꿩이 스스로 울어대어 포수에게 잡히듯이 위험 사상가들이 스스로 고백하듯 말하여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전의 민주노동당 문서를 보니 이런 내용이 있다.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등 한반도·동북아의 비핵·평화체제를 조기에 구축한다.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종속적 한미동맹체제를 해체하여 동북아 다자평화 협력체제로 전환한다."

강령이나 정책 문서에는 그렇게 진행 단계를 밟아 비교적 논리적으로 되어 있으나 그것이 현실 정치에 나타날 때는 다른 부분은 뒤로 밀려나고 '주한 미군을 철수시키고 종속적 한미 동맹체제를 해체' 부분만이 클로즈업 된다. 그런 것이 정치의 현실이다. 선전의 실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국민들에게 충분한 설명과 계몽이 없이, 안보의 핵심문제를 맨살로 건드리는 일이다. 머릿속에 남는 잔영은 '미군 철수'이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는 종당에는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 즉 한미 안보체제가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남한·북한·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6자회담 당사자들의 궁극적 지향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장래의 과제로 염두에 둘 일이지, 당면해서의 이슈로 제기되기에는 곤란한, 문자 그대로의 '뜨거운 감자'인 것이다. 그런데 진보진영은 이 문제를 사전 설득이 불충분한 채 제기했고, 그것으로 역습을 받았다 할 것이다.

미군 철수 문제와 관련하여 회상되는 이야기가 있다. 1970년대 초에 일본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가 <北の詩人>(<북의 시인, 임화>란 번역본이 있다)이란, 해방 후 유명했던 임화(林和) 시인에 관한 반(半) 픽션 소설을 썼는데 거기에 박진목(朴進穆)이란 이름이 나온다. 남로당계 숙청 재판 기록에서다.

박진목 씨는 <내 조국 내 산하>라는 흥미있는 자서전도 남겼는데, 6.25 전쟁 중의 와중에서 당시 북의 검열상이던 이승엽(李承燁)과 친한 사이로, 그를 만나 정전(停戰)을 주선하고 싶다고 말하고 다닌 모양이다. 미국 정보당국이 손해볼 것 없다고 그를 안전하게 북에 넘겨준다. 북에서 이승엽을 만났으나 이승엽이 남쪽 당국의 신임장을 요구하여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승엽이 천려일실(千慮一失)로 그를 친구라고 안전하게 남쪽으로 보내준 것이 나중에 숙청의 빌미가 되기도 하여 판결문에 그 사실이 나오는 것이다. 이승엽은 남로당의 인천지역 링크로 조봉암도 그 동지였었는데 조직으로서는 인천지역이 철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박진목 씨는 대구에서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승만 정권 당시에는 대구가 반정부 세력의 중심지였으며 정치 1번지로 통했었다. 해방 후에는 좌익 세력도 강했다.

박진목 씨가 후배들과의 대화에서 자주 한 이야기 가운데 이런 게 있다.

"박헌영이가 해방 후 당시 미군 철수를 요구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여.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제국군대를 무찌른 그 막강한 전승자 미군을 일부 민중의 선동이나 데모로 몰아낼 수 있는 일이었겠어."

그는 국제정치적 큰 맥락에서 해결책을 머리 속에 그렸을 것인데 그것까지는 이론을 전개하지 못했었다. 그는 통일운동을 한다고 하다가 몇 년 전 남한산성에서 고령으로 작고하였다.

국제정치에 관심을 갖고 읽은 책 가운데 잊히지 않고 가끔 머리에 떠오르는 것 중 하나로 제네바에서 교수로 있던 루이스 홀이 쓴 <역사로서의 냉전>(1967)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국제정치라는 게임에서 볼 때 폴란드 사람들은 돈키호테 같고, 핀란드 사람들은 산초 판자 같다는 것이다.

폴란드인들은 낭만적일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고 애국적이며, 그들 나라가 실제는 안 그렇더라도 당연히 대국으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핀란드인과는 달리, 그들은 계속 그들의 힘의 한계를 무시하고 처신하였다. 그들은 지나치게 명예의 문제에 구애되고, 그들 민족의 영광을 위한 애국적 헌신으로 주변 국가들의 이해관계와 감정을 무시하였다. 그러한 것들이 바보 같은 짓거리를 결과하였다.

핀란드인들은 양보와 저항이라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두 방식을 건설적으로 활용하여 주변 강국인 러시아와 일종의 타협을 이룸으로써 그들의 독자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러는 데는 많은 희생도 치렀고, 러시아 측의 강요로 얼마간의 도덕적인 치욕도 겪어야만 했다. 만약 그들이 달리 처신하였더라면 그 선택은 더욱 나빴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그들의 정책이 옳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대충 위와 같은 요지인데, 이리 차이고 저리 차여서 '유럽의 풋볼'이라는 조롱을 받을 정도로 계속하여 분단되고, 점령되는 등의 수난을 겪어온 폴란드의 외교를 돈키호테적(Quixotic)이라고 놀린 것이 흥미롭다.

박진목 씨의 이야기나 루이스 홀 책 소개를 장황히 한 것은, 국제무대라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우리가 폴란드의 돈키호테처럼 되어서는 안 되고, 핀란드의 산초 판자보다도 훨씬 낫게, 현명하게 처신하여야 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의 국제무대에서는 큰 게임(Great game)과 작은 게임(Small game)이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힘의 정치이다.

미국·소련간의 큰 게임이 선수가 교대되어 미국·중국 간의, 미국·일본·중국·러시아 간의 큰 게임으로 바뀌고, 그 하위에 남·북한의 작은 게임이 있다. 자존심이 많이 상할지 몰라도 작은 게임은 큰 게임의 종속변수일 수밖에 없다. 명예심과 애국심(애족심)을 앞세워 그 위상을 착각하다가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돈키호테 노릇을 하기가 십상이다. 해방 직후의 역사에서 박헌영은 그 돈키호테 역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작은 게임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 작은 게임이 큰 게임에 영향을 미쳐서 큰 게임이 잘되도록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작은 게임이 큰 게임을 뒤집어엎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민주노동당 때부터 그렇지만 통합진보당에 있어서도 내가 보기엔, 사람들이 '가까운 정당'이라고 친밀하게 느끼지 않고 '한 팔꿈치만큼 거리를 두어야 할 정당'으로 소원하게 느끼는 것 같다. 내가 보수적이어서일까. 아마 보수·우파·극우 측에서 '종북' 운운하고 색깔몰이를 심하게 한 탓도 있겠다. 그 때문만이면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 할 것이다.

통합진보당 측에서는 극우파들은 아무리 설득해도 어차피 자기들 지지자가 안 될 테니까 포기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단념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설득이 가능한 중간층에만 힘을 기울이려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표는 직접 안 될지라도 그런 층을 아예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정당이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가까운 정당'이라고 느끼도록, 아니면 적어도 적대감은 느끼지 않도록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

미국이 북한을 대단히 압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역은 진실이 아니다. 아들 부시 대통령 시대에는 '악의 축'으로 이란, 이라크와 함께 북한을 지목하여 'regime change', 즉 체제 전복을 기도하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발생과정을 보면 북쪽의 자업자득이라 할 것이다.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했는데 6.25라는 침략을 감행하여, 반격을 위해 미군이 진주한 것은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 안보·평화를 위해서는 6자회담, 또는 그와 비슷한 형태의 어떤 회담이라도 앞으로 잘 진행되고 남북한 간의 화해노력이 뒷받침되어, 큰 게임과 작은 게임의 양면이 조율되어 나가야겠다. 동아시아(한반도 포함)의 평화체제가 성취된다면, 그리고 굳건해진다면, 아마 미군은 자연 철수하는 절차에 이르지 않겠는가. 그럴 때는 미군이 철수하는 게 자연스럽다 하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남북정삼회담 등 화해노력을 하면서 한반도 통일이 된 후에도 주한미군은 계속 잔류하게 될 것이라고 거듭거듭 말했었다. 그것은 미국에 대한 배려에서였다. 그리고 그때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큰 틀을 관련시키지 않고 실현성이 적은 한반도 통일만을 떼어서 말했었다.

여하간 그런 국제정치의 맥락에서 우리는 미군 문제를 보아야 할 줄 안다. 그렇지 않고 동북아 안보·평화체제 구축 이전에 성급히 미군 철수를 운운하는 것은 돈키호테의 우를 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통합진보당이나 그 주변의 사람들이 너무 성급하게 미군 철수 문제를 거론하는 듯 느껴져, 좀 보수적인 입장의 노파심에서 주의를 해두고 싶은 것이다. 국제정치는 참 이해하기도 어렵고 풀기도 어려운 고등수학 같은 것이다.

노동자 벨트에서의 통합진보당의 좌절과 관련해서는 앞으로 전문가들이 좋은 분석을 내놓겠지만, 현실적으로 노동 측이 소망하는 바에 좀더 접근하여 정책을 내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우선 해두고 싶다. 욕심을 말하면 한이 없을 것이다. 정운찬 씨가 거의 '홍길동'당 수준이라고 비꼬았지만 이것저것 모든 분야에서 욕심껏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나 역사 발전의 순서라 할까, 역학이라 할까 하는 게 있다. 너무 급진적으로 나가다가는 오히려 반작용의 역습을 받아 좌절되기가 쉽다. 유럽의 역사변동을 살펴보면 성급한 급진운동이 오히려 좌절을 맛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선 욕심을 대폭 줄이고(그 이야기는 저항을 줄인다는 이야기도 된다) 최소한의 요구인 복지국가의 꿈과 관련된 문제들을 관철하기 위해 차분히, 단계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소중할지 모르겠다. 유럽모델이라는 복지국가를 이룩하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크나큰 성취이겠는가.

진보정당이 집권까지 이르는 것을 나는 전혀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남북분단의 현실에서는 아마도 그런 꿈은 단념하는 것이 현실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원내교섭단체까지는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 아주 오래 전부터의 판단이다. 그렇게 될 때 다양한 세력들을 보다 균형 있게 국정에 반영하는 것임은 물론 국회의 수준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정치선진국에 한 발 접근할 것이다. 그러려면 독일식에 가깝게 비례대표 의석도 늘여나가야 할 줄 안다.

역사발전에는 서로 다른 제 세력의 길항이 있어야 한다는 변증법적 역학이 작용한다. 여기서 변증법이란 헤겔이나 마르크스가 말하는 그런 경직된 철칙(鐵則)과 같은 것이 아니고 대충 역사발전에 있어서 경험적으로 보아온 힘의 대립·투쟁·전복·타협·변화 등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