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언론사 기자들의 파업과 총선 국면을 맞아 부산일보 노조 파업 사태, 보다 노골적으로는 정수장학회 실질 지배권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부산일보> 편집권 독립을 요구하는 기자들과 과거사 청산을 바라는 이들은 이제 둘의 요구를 결합한 '정수장학회 사회 환수와 독립정론 부산일보 쟁취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동대책위)'를 공식적으로 출범시키고 대선후보 박근혜에게 요구하고 있다. "정수장학회를 놔 줘라."
▲19일 오전 11시, 공동대책위는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13층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출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박중기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명예의장, 한흥구 성공회대 교수, 한국기독교고회협의회 김성복 목사,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 이강택 언론노조 위원장, 서해성 작가, 이호진 언론노조 부산일보지부장, 정영하 언론노조 MBC본부장 등이 참석했다. 경향신문사옥이 들어선 대지는 정수장학회 소유고, 이 빌딩 10층에는 정수장학회가 있다. ⓒ뉴시스 |
정수장학회의 독립성
19일 오전 11시, 공동대책위는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출범을 공식 선포하고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이 정수장학회를 사회에 환원하고,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은 <부산일보> 편집권 독립을 위해 사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문제는 이미 박 위원장이 직접 언급한 바 있다. 오랜 기간 정수장학회 문제에 침묵을 지켜오던 박 위원장은 지난달 24일 부산을 찾아 "대선 총선을 앞두고 계속 정수장학회를 정치쟁점화해 제게 얘기하는 것은 맞지 않다"며 자신과 정수장학회와의 관계에 선을 그었다. 자신과 무관하다는 얘기다.
형식적으로는 박 위원장의 말이 맞다. 박 위원장은 지난 1995년 9월 6일 정수장학회 이사장으로 취임한 후 2005년 3월 29일까지 장학회 이사장을 지냈다. 박 이사장은 과거사 청산 요구가 거세지자 이사장직에서 물러났고, 그 후에는 박 이사장의 최측근 최필립 씨가 이사장에 올랐다.
법원 역시 정수장학회의 사회 환원이 필요없다고 판결했다. 지난달 24일 서울중앙지법 민사17부(염원섭 부장판사)는 고 김지태 씨의 유족이 정수장학회와 국가를 상대로 한 장학회 주식 양도 청구 소송을 기각했다. 강제 헌납은 인정했으나 국가의 손해배상 청구 의무는 소멸시효가 완성됐고, 증여 행위자체를 무효로 보기도 미흡하다고 판결했다.
장학회 역시 공식적으로 박 위원장과의 관계를 부인하고 있다. 지난달 23일 정수장학회는 보도자료를 통해 "대선과 총선을 앞둔 올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7년 전에 이사장에서 물러나 현재 장학회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박근혜 전 이사장과의 과거의 인연을 이유로 정치쟁점화하는 것은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사장실에 붙은 박 위원장과 최 이사장과의 사진 등을 거론하며 "부산일보 노조가 최 이사장을 면담하러 갔을 때 최 이사장이 박 비대위원장과의 인연을 강조했다"던 이호진 전국언론노조 부산일보 지부장의 증언은 이와 정반대된다.
정수장학회의 전신은 부일장학회다. 옛 <부산일보>와 삼화고무의 소유자이던 고 김지태 씨가 1958년 자신의 재산과 토지 10만 평을 기반으로 만든 장학기금이다. 그런데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는 1962년 3월 27일 김지태 씨를 부정축재처리법위반 혐의로, 아내 송혜영 씨를 밀수혐의로 체포했다. 김 씨는 부일장학회 자산이던 토지와 소유했던 언론사 지분 전량을 군부에 헌납한 후에야 풀려난다. 박정희가 소유했던 5.16 장학회는 강제로 '헌납 받은' 재산을 모두 흡수해 덩치가 커지고, 1982년 지금의 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꿨다.
한홍구 교수는 "만약 입장을 바꿔서 김대중 정권이 (조선일보 소유주가 만든) 방일영 장학회를 강제로 몰수해 '김대중 장학회'로 바꿨다면 박근혜 씨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생각해보라"며 "한국이 정상적인 법치국가라면 이 재산의 사회 환원이 상식"이라고 강조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강도당한 장물을 다시 찾아오는 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라며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을 통해) 짓밟혔던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학사업은 제대로 하나? 정수장학회는 한국 최대 규모의 장학사업을 한다. 1962년 설립 후 지금까지 3만8000여 명의 장학생을 배출했다. 장학생들은 '정수장학범동창회 상청회'라는 모임까지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김삼천 전 방림 상무이사(상청회장)을 비롯해 학계, 법조계, 의학계 등 사회 곳곳에 회원들이 있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파들어가면, 정수장학회의 장학 활동은 정상적인 장학재단의 것으로 보기 힘들다는 주장이 많다. 정수장학회의 장학기금 내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산일보>는 매해 정수장학회에 8억 원의 기부금을 내고, MBC는 2004년부터 매해 20억 원을 기부한다. 그런데 정수장학회는 지난해 21억5000만 원의 장학금을 썼다. 경향신문 사옥 임대료 수익 등을 포함하지 않더라도, 장학회가 장학 사업에 단 한 푼의 돈도 쓰지 않은 셈이다.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정수장학회의 장학사업 규모는 부일장학회와 비교할 때 오히려 크게 줄어들었다. 1960년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장학회이던 대한상이군경장학회는 1년에 300명을 대상으로 1인당 5만 환의 장학금을 줬다. 반면 당시 부일장학회는 3000명에게 연평균 14만 환을 기부했다. 국가 장학회보다 더 적극적인 장학사업을 하던 장학회가 정수장학회로 변한 후 오히려 그 규모가 축소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한 교수는 "정수장학회가 부일장학회만큼만 장학사업을 했더라도 지난 50년간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인원이 15만 명에 달한다"며 "그렇다면 (3만8000명을 제외한) 나머지 11만 명은 어디 갔느냐"고 지적했다. 심지어 박 위원장은 개인 돈으로 장학사업을 하던 고 김지태 씨와 달리, 장학회 이사장 재직 시절 연평균 2억 원이 넘는 연봉까지 받아 갔다. |
정수장학회와 언론 독립
정수장학회 문제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2012년 봄 한국 언론계 최대 화두가 된 언론의 독립 문제다.
정수장학회는 부산일보 지분 100%와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사옥대지 723평, 그리고 MBC 지분 30%를 갖고 있다. 정수장학회의 사회 환원 문제를 언론 독립 문제와 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부산일보 노조의 파업은 현재 <부산일보> 편집권이 정수장학회에서 독립하지 못했음을 입증한다.
박 위원장이 장학회 이사장이던 지난 2002년, 한나라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의 여파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당시 <부산일보>는 박 위원장(당시 한나라당 대표)이 열두척 배를 가진 이순신 장군의 마음으로 싸우라는 일명 '이순신 칼럼'을 게재했다. 박 위원장은 이른바 '천막당사' 생활의 대대적 홍보를 통해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기사회생을 이끌었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여전히 정수장학회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뉴시스 |
또 "특정 선거 이슈가 있을 때 <부산일보> 사설이 박 전 대표나 한나라당에 대해서는 중심을 잃는 경우가 있다"고도 말했다.
이 위원장은 이날(19일) 공동대책위 출범식에서 "부산일보 노조가 투쟁의 깃발을 든 이유는 정수장학회의 사회 환원 이전에, '언론인으로서 언론인답게 살고 싶다'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이강택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은 "박 위원장이 낙하산 사장으로 방송을 장악한 이명박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최필립이란 '아바타'를 내세워 똑같은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며 "<부산일보>는 정권의 언론장악 사태의 원조다. 과거 어느 언론도 따라하지 못했던 <부산일보>의 편집권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 <부산일보>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전면 톱기사로 냈었다. 3당 합당 이전까지 부산·경남권은 대표적인 민주화 도시였다. 이 열기에 지역언론 최대부수의 <부산일보>가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게 언론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만일 박 위원장이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MBC는 어떻게 될까. 지금 김재철 사장 하의 MBC를 떠올리면 답이 나온다. 엄밀히 말해 이명박 정부가 MBC에 가진 목소리의 크기는 MBC 전체의 70%(방송문화진흥회 지분)이다. 박 위원장은 이 지분에 더해 정수장학회를 통해 '실질적으로 보유한' 30%(정수장학회 지분)의 목소리를 더 낼 수 있다. MBC가 100% 정권 소유의 방송이 될 수도 있다. 정수장학회 문제를 언론 독립 요구와 뗄 수 없는 이유다.
정영하 전국언론노조 MBC 본부장은 "정수장학회 문제는 결국 <부산일보>와 MBC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박근혜의 아킬레스건
결국 4.11 총선이 코 앞인 지금, 정수장학회 문제는 박 위원장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 야권은 새누리당의 얼굴이자 정체성이 된 박 위원장을 정수장학회 문제를 걸어 압박하고 있다. 박 위원장이 정수장학회 문제를 털어내지 않는 한, 선거구도가 그렇게 짜여진다.
이 때문에 박 위원장이 문제를 직접 결자해지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진다. 아마도 이는 박 위원장에게는 가장 좋은 그림이 될 것이다.
정영하 본부장은 "박 위원장이 정수장학회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대권주자로서 자격이 없다"며 "총선에 앞서 관련 문제에 대한 입장을 투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정수장학회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휘호 '음수사원(飮水思源)'이 씌여 있다. '물을 마실 때도 그 근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휘호는 옛 경향신문에도 있었다. 박정희는 근원을 자신으로 생각하며 장학생들을 키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공동대책위와 언론노동자들은 독재정권에 재산을 강탈당한 국민이 근원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것이 아니"라는 박 위원장과 "장물은 환원해야 한다"는 다른 이들 사이에도 같은 넓이의 간격이 선명하다.
끝나지 않은 부산일보와 정수장학회의 싸움 방송3사의 공동파업에 밀려 세간의 관심이 줄어들었으나, 부산일보 노조의 편집권 독립을 위한 파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국면에 중요한 변환점이 될 사건이 발생했다. 정수장학회가 <부산일보> 측에 대대적인 반론보도 게재를 요구한 것이다. 이호진 부산일보 노조위원장에 따르면, 정수장학회는 최근 <부산일보>가 쓴 정수장학회 비판기사 25건가량을 문제 삼아 언론중재위에 반론보도를 신청했다. 요구한 반론보도문의 분량은 무려 원고지 25장 분량. 일간지 한 면을 전부 채우고도 남을 정도다. 언론중재위는 이를 받아들여 지난 13일, 원고지 12매 분량의 반론보도문을 신문 2면에 3단 크기로 싣도록 <부산일보>에 명령했다. 그리고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48시간 동안 톱기사로 올려두도록 했다. 반론보도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강경한 조치다. 이 위원장은 "한국 언론역사에 이처럼 강경한 반론보도 게재 요구가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다. 부산일보의 일선 기자들은 현재 언론중재위 결정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길 사측에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반론보도 게재의 법적 권한이 발행인이라는 점. <부산일보> 사장 임명권은 정수장학회가 갖고 있다. 이 위원장은 "경영진이 이의신청을 하지 않으려 한다. '이의신청을 하려면 편집국장이 추후 형사적 책임을 진다'는 각서를 쓰도록 요구한다"며 "노사 관계를 떠나 (경영진이) 20년 이상 기자생활을 한 언론계 선배들이다. 참담하지 그지없다"고 말했다. 만일 사측이 이의신청을 하지 않고, 이를 거부하는 <부산일보> 편집국도 반론보도문을 게재하지 않을 경우 이번 사태는 법정으로 갈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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