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남주가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며 남긴 짧은 시다. 험악한 독재 권력과 목숨을 건 싸움을 해왔던 시인이지만, 그는 한국인의 가슴 밑바닥에 흐르는 따뜻한 마음을 믿었던 모양이다. 추운 날, 허공을 나는 까치 한 마리까지 걱정하는 게 '조선의 마음'이라고 노래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까마득하다. 역시 추운 날, 노동운동가 김진숙은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목숨을 건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벌써 287일째다. 하지만 대중의 관심은 여전히 냉랭하기만 하다. '나무 끝을 나는 까치 한 마리'까지 챙기던 '조선의 마음'은 어디로 갔는가. 하긴, 아이들이 학교에서 눈치 안보고 밥 먹도록 하자는 주장을 놓고도, 날 선 논쟁을 벌여야 했던 게 오늘의 한국이다. 까치는커녕 배고픈 아이들을 챙길 여유조차 없다. 시인이 살아있다면, 그는 지금도 따뜻한 '조선의 마음'을 노래할 수 있을까.
김진숙의 고공농성,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잇따른 자살 등은 그 자체로 거대한 질문이다. 한국에서 해고는 곧 죽음이다. 직장을 잃는 순간, 기댈 곳은 없다. 잘리지 않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거나, 아니면 벼랑 아래로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다. 그 밖의 새로운 길은 없는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어도, 혹은 일자리를 얻지 못해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은 과연 없을까. 복지가 화두로 떠올랐다지만, 정작 이런 질문은 설 자리가 없다. 무상급식을 계기로 부상한 복지 논쟁이, 속을 들여다보면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마침, 속이 꽉 찬 심포지엄이 열렸다. 그간 진행돼 온 복지논쟁의 빈 구석을 메울 수 있는 이야기가 한상 가득 차려진 자리였다. 참여사회연구소, 프리드리히에버트재단 한국사무소,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등이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과 국제회의장에서 '복지국가의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마련한 국제 심포지엄이 그것이다. (☞관련 기사:"한국형 복지국가, 스웨덴이 정답 아니다")
이날 행사에는 해외 전문가들도 참가했다. 첫 발표를 맡은 스벤 요헴 독일 콘스탄츠대 정치행정학과 교수는 이날 복지국가를 고민하는 한국인들에게 "다른 나라로부터 배우되, 하나의 모델을 너무 고집하지 말라"는 조언을 했다. 또 뤼이젠더 대만 국립중정대 사회복리학과 교수는 동아시아 국가의 특징을 고려한 '복지국가의 길'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레시안>은 이날 행사장 바깥에서 이들과 짧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들 전문가들은 강력한 노동운동 및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없는 조건에서도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게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복지국가는 우리 현실에서 너무 먼 이야기'라는 주장, 또는 노동운동 강화 등의 조건을 먼저 충족하고 복지국가로 이행해야 한다는 단계론적 접근 등에 대한 반박이다. 이는 한국에서 '복지국가의 길'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힌트가 될 수 있다. 이날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이날 인터뷰는 최현덕 프리드리히에버트 재단 한국사무소 기획·협력위원(철학박사)의 통역으로 진행됐다.
"'보육비 현금 지원' 아닌 '보육 서비스 직접 지원'이 해법"
프레시안 : 한국에선 복지가 쟁점이다. 이 문제 때문에 서울시장이 물러나고, 선거가 다시 치러진다. 하지만 이는 최근의 일일 뿐이다. 그 전에는 복지 문제에 대한 관심이 아주 차가웠다. 그 배경에는 전통적인 가족 모델이 있다.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가족이 복지 수요를 감당하는 전통이 견고했다. 노인 봉양, 육아, 간병 등이 대부분 가족을 통해 이뤄졌다. 문제는 지금 이런 모델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도시화, 산업화, 가족 해체 등의 경향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전통적인 모델은 무너지는데, 복지 수요를 감당할 새로운 모델은 없다. 그래서 위기다.
▲ 뤼이젠더 교수 ⓒ참여사회연구소 |
가족 단위로 복지 수요를 해소하던 모델은 대체로 여성에게 의존하는 구조다. 한국은 대만에 비해서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하지만,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크게 못 미친다. 그러나 세계 경제의 부침 속에서 한국이 번영을 유지하려면, 여성의 사회 진출이 더 확대돼야 한다. 이런 경제적 이유가 아니더라도, 여성의 사회 진출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육아, 노인 봉양 등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켜야만 한다. 과거에는 가족, 주로 여성이 해왔던 일을 이제는 사회가 해야 한다는 게다.
이는 '어떤 사회복지 모델을 택하느냐'라는 문제와도 관계가 있다. 육아 등에 드는 비용을 사회가 지원하는 모델, 사회가 육아, 간병 등 서비스를 직접 지원하는 모델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하느냐라는 문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위해서는 후자가 바람직하다. 육아, 노인 지원, 간병 등 사회 서비스가 직접 지원되는 방향으로 제도가 설계돼야 한다. 직접 서비스 대신 현금을 지원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노동조합보다 민주화가 복지국가 건설에서 더 중요한 역할"
프레시안 : 방금 '탈산업화' 경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를 놓고도 한국에선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통적인 제조업의 비중이 줄면서, 노동운동의 영향력 역시 함께 줄었다. 또 서비스 부문에서 새로 생긴 일자리는 숙련도와 안정성이 모두 낮은,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일자리인 경우가 많다. 이런 조건은 한국이 복지국가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게다. 북유럽 국가들이 제조업 분야의 강력한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복지국가를 이뤄냈다는 점을 생각하면, 무시하기 힘든 걱정이다.
뤼이젠더 : 유럽 역사를 보면,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정당이 힘이 세면 복지가 강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산업화가 동시에 이뤄지던 시절의 역사다. '탈산업화' 시대에도 이런 모델이 적용된다는 보장은 없다.
노동조합의 역할 역시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처럼 기업별 노조가 활성화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아무래도 이런 경우에는 조합원들의 이익에만 될 수 있는데, 이는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복지를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하기 어렵다. 나는 복지국가로 가는 길에서 노동조합의 역할이 부차적이라고 본다. '탈산업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동안 사회안전망이 취약했던 동아시아 국가는 어떤 계기를 통해 '복지국가의 길'을 열어야 하는가. 대체로 두 가지 경우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위기 상황이다. 한국을 포함해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제 위기를 겪을 때마다 사회안전망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복지 수요의 갑작스런 증가다. 지금이 이런 경우다. 그리고 복지 수요 증가가 실질적인 복지 강화로 이어지기 위한 조건은 '민주화'다. 노동조합이 아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복지국가로 가는 길에서 진짜 중요한 조건은 '민주화'다. 이게 돼 있으면, 복지 수요 증가에 발 맞춰서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게 가능하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유럽과 다른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잘 고려해야 한다.
스벤 요헴 : 꼭 좌파만이 복지를 주도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또 단계론적인 생각도 잘못이다. 노동운동과 사민주의 정당을 강화하지 않으면, 복지국가를 이루지 못한다는 생각이 틀렸다는 이야기다. 유럽에서도 자유주의 세력이 복지국가 건설을 주도한 사례가 있다.
한국은 내년에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있다. 자유주의 세력부터 진보까지 폭넓게 아우르는 정치동맹을 만들면 어떨까. 빈곤 퇴치, 사회 서비스 확대 등을 내세운 정치동맹이 힘을 지닌다면, 한국도 복지국가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패배적인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특정한 조건이 충족되기 전에는 복지 확대가 어렵다는 식의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다.
"기업가들이 노동자 자르고 싶다면, 먼저 사회안전망부터 갖춰 놓으라"
프레시안 :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에선 일자리를 잃는 순간, 누구나 살기가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잇따른 자살 등을 계기로 해고자·실업자에 대한 사회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자리를 잃어도 인간적 존엄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인력 구조조정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도 완화되리라는 게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 가운데 일부는 북유럽 국가, 특히 덴마크의 '유연안전성' 모델에 주목한다. 해고가 쉽지만, 사회안전망 역시 강력하다는 게다. 기업 입장에선 노동력을 유연하게 이용할 수 있고, 노동자 입장에선 해고에 대한 부담이 적다. 그래서 노동자와 기업주가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일은 잘 생기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이런 모델에 주목하는 이들이 많은데, 우려하는 목소리도 함께 나온다. 한국에서 '유연안전성'을 이야기할 경우, '유연'(쉬운 해고)만 강조되고 '안전성'(해고자를 위한 사회 안전망)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다는 게다. 노동자들이 해고를 수용하도록 압박하는 논리적 수단이 될 뿐이라는 이야기다. '노동 유연성'을 높이는 것은 쉽지만, 해고자·실업자가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 수준으로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여러 난관을 뚫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타당한 지적이다.
▲ 스벤 요헴 교수. ⓒ참여사회연구소 |
게다가 한국은 이미 노동유연성이 지나칠 정도로 높다. 여기서 더 유연성을 높이자는 쪽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장은 당연히 위험하다. '기업가들이 해고를 하려면, 먼저 사회안전망부터 확대하라'라는 요구를 해야 한다. 안전망 없는 해고에 반대한다는 요구다. 노동유연성이 너무 높아서 문제가 되는 게 한국이므로 이런 주장은 충분히 타당하다. 진보진영은 실업에 대한 안전장치를 지금보다 더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
뤼이젠더 : 대만의 경우를 봐도, 노동유연성과 경제 성장 사이의 상관관계가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다. 노동유연성이 꼭 경제를 활성화시키는지에 대해 냉정히 따져봐야 한다. 오히려 의료, 보육 등에 대해 안전망을 강화하는 게 더 경제적 번영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덴마크식 유연안정성 모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덴마크 사회의 다른 특징도 함께 살펴야 한다. 덴마크에선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이 거의 없다고 한다. 또 비정규직도 노동조합에 참가할 수 있다. 이런 점을 무시한 접근은 의미가 없다. 특히 동아시아처럼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이주노동자 아우르는 보편적 복지, 전세계적인 숙제"
프레시안 : 비정규직이건, 실업자건 모두가 혜택을 누리는 게 보편적 복지다. 이에 대한 관심이 최근 한국에서도 높다. 그런데 사각지대가 있다. 바로 외국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다. 한국에서 이들 대부분은 제조업과 건설업 분야에서 어렵고 힘든 일을 맡고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인권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편적 복지가 쟁점이라고는 하지만,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떠올리면 답답한 점이 많다. 진정으로 보편적인 복지라면, 피부색과 관계없이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은 건강보험 적용조차 못 받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는 이주노동자가 늘어가는 추세와 맞물려 걱정을 낳는다. 한국의 강력한 민족주의를 떠올리면 이런 걱정은 더 커진다.
스벤 요헴 : 유럽에서도 아주 심각한 문제다. 유럽연합이 생기면서 노동력 이동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됐다. 가난한 동구권에서 독일 등으로 이주한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복지가 제공되지 않는 문제가 심각하다. 보편적 복지를 지향한다면, 당연히 피부색과 관계 없이 누구나 복지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원칙이다. 하지만 현실은 원칙과 거리가 있다. 흔히 보편적 복지는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한다고 한다. 그러나 유럽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시민'의 지위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들은 복지 서비스에서 배제된다. 우리가 '연대적 공동체'를 원한다면, 이런 현실을 바꿔야 한다. 아주 힘들지만, 그게 옳은 길이다.
뤼이젠더 :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이 성공적인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었던 중요한 조건이 '균질성'이다. 이들 국가는 상당히 단일한 사회였다. 종교, 인종, 언어 등 여러 면에서 그랬다. 하지만 이들 국가 역시 이젠 달라졌다. 이주노동자가 크게 늘었고, 문화적 다양성이 높아졌다. 이는 '복지국가'라는 면에서도 분명히 도전이다. '복지 혜택을 이방인과 나눌 수 있느냐'라는 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대만의 경우엔 약 30만 명 정도의 이주민이 있다. 상당수가 이른바 '블루칼라'다. 의료보험과 연금혜택은 누리고 있다. 그러나 대만 사회가 복지를 지금 수준보다 더 확대할 때, 이주민들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가 없다. 그게 현실이다. 앞으로도 아주 어려운 문제가 되리라고 본다.
"증세는 필수…국민이 몸으로 느끼는 복지로 정부 신뢰 쌓아야"
프레시안 : 한국에선 무상급식을 계기로 보편적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복지 문제는 내년 대선에서도 최대 쟁점이 되리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복지 문제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게 재정 문제다. 복지 확대에 걸맞은 재정을 확보하려면, 증세를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국에서 증세는 인기가 없는 주제다. 복지 확대를 외치는 정치인들조차 증세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노무현 정부 시절, 종합부동산세를 도입했다가 보수언론으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을 받았던 경험 탓도 있다. 정부에 세금을 낸 만큼 국민이 혜택을 누린다는 생각 자체가 낯설다는 지적도 있다. 과거 군사정부 시절에는 정부는 국민에게 혜택을 주는 곳이라기보다 국민을 억압하는 기구에 가까웠다. 이런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정부로부터 무언가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기 어렵다는 게다. 또 과거보다는 크게 나아졌다지만, 정부 부문의 부패 문제 역시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스벤 요헴 : 복지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국가의 공통적인 특징이 정부에 대한 신뢰다. 대표적인 복지국가인 북유럽 국가들은 한결같이 정부 및 공공부문에 대한 신뢰 지수가 높다. 이런 신뢰를 높이기 위해 흔히 부패 척결 등이 필요하다고 한다.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육아, 의료 등 국민이 바로 효과를 느끼는 영역에서 신뢰를 쌓는 게 절실하다. 국민이 정부의 역할을 몸으로 느낀다면, 신뢰는 저절로 생긴다.
증세는 어디서나 쉽지 않다. 결국 정면 돌파가 답이다. 모두가 세금을 제대로 내고, 대신 안전망을 확보하는 길에 대해 합의를 얻어야 한다. 이걸 돌아가는 방법은 없다.
뤼이젠더 : 한국에서 진행된 무상급식 논쟁은 동아시아 차원에서도 중요한 계기였다. 일부 계층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회안전망의 혜택을 누리고, 동시에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사회로 한걸음 다가가게 됐다. 좋은 보편적 사회정책이 경제적 번영을 이끈 사례로 한국이 소개될 날을 기대한다.
▲ '복지국가의 길을 묻다' 국제 심포지엄 참가자들. ⓒ참여사회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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