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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든 사제, 뒤늦게 눈뜬 욕망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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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든 사제, 뒤늦게 눈뜬 욕망 그리고…"

[프레시안 books] 르파주의 <게릴라들>

성냥 대신 라이터를 쓰면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나라가 있었다. 독재자 소모사가 통치하던 1970년대의 니카라과가 그랬다. 국민들은 독재자 일가가 운영하는 성냥 회사의 성냥만 써야했다. 이 나라에서 라이터는 저항의 상징이었다.

소모사 일가의 62년에 걸친 철권 통치를 끝장낸 것은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이었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미국을 등에 업은 독재자, 그리고 이에 맞선 끈질긴 항쟁은 1980년대 한국에서 '남의 일'이 아니었다. 시인 김남주는 "팔레비와 소모사와 이 아무개와 박 아무개가 / 지 스스로 물러났던가 / 묻노니 그들에게 / 어느 시대 어느 역사에서 투쟁 없이 자유가 쟁취된 적이 있었던가"라고 노래했다. 1980년대를 뜨겁게 살았던 이들은 전두환에게서 소모사의 모습을 봤다.

산디니스타의 1979년 혁명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미국은 혁명 정부를 뒤흔들기 위해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고, 이 과정에서 마약 밀매를 묵인했을 뿐 아니라 반미 국가였던 이란에 무기를 불법 수출하기도 했다. 레이건 행정부를 코너로 몰고 갔던 '이란-콘트라 스캔들'이다.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된 이 사건은 제3세계 젊은이에게 반미 의식을 심은 계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선 '소모사', '산디니스타', '이란-콘트라 스캔들' 정도의 낱말이 익숙할 뿐, 산디니스타 혁명의 내밀한 속사정은 낯선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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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릴라들>(르파주 지음, 이성엽 옮김, 씨네21 펴냄). ⓒ씨네21
르파주의 <게릴라들>(이성엽 옮김, 씨네21 펴냄)은 바로 이런 역사를 다룬 만화다. 흔히 접하는 만화와는 조금 다른, 이른바 그래픽 노블이다. 온통 천연색으로 돼 있고, 그림의 색감이 내용과 긴밀한 조화를 이룬다.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의 1936년 쿠데타부터 산디니스타 혁명, 콘트라 반군과의 내전, 반군 세력의 집권과 2007년 오르테가의 집권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드라마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이 작품의 미덕은 다른 데 있다. 복잡한 역사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은 아예 접어뒀다. 대신 <게릴라들>은 폭압과 혁명이라는 역사의 갈림길에 선 인간, 그 자체를 다룬다. 미술 장르에 비유하자면, '크로키'쯤 될까. 혁명의 소용돌이, 그 중 한 장면을 맵시 있게 포착한 크로키말이다.

주인공은 독재자와 가까운 기업인의 아들인데, 사제 서품을 앞둔 예비 신부(神父)다. 미술에 재능이 있고,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다. 예수의 수난을 담은 그림으로 신앙을 고백하려던 그는 조금씩 갈등하기 시작한다. "신학자들, 술을 홀짝이며 예술을 안답시고 거들먹거리는 부자들"이나 좋아할 만한 그림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대신, "사랑의 말로 로마 제국과 바리새인들에게 대항했던 예수", "치욕을 견디며 버틸 수 있었던 예수"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가장 천대받던 이들과 어울렸던 예수와 마찬가지로, 폭압 속에서 울고 웃던 보통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린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화폭에 옮긴다.

여기까지가 작품의 도입부다. 사실 익숙한 이야기다. 1980년대 한국에서 유행했던 민중 신학, 민중 예술의 논리가 대개 이랬다. 가장 순수한 사람이 가장 치열한 투사가 돼야 했던 시대에 어울리는 내용이다.

"넌 다른 놈들보다 더 악질이야! 네 아버지 같은 개자식들은 우리 먹을 것을 빼앗지만, 넌 우리의 비참한 삶을 보고 즐기면서 그리고 앉아있으니까 말이야!"
"아니야, 나는 그림을 통해 너희들의 삶에 다가가려는 거야."
"닥쳐! 너 같은 놈이 우리에 대해 뭘 알 수 있단 말이야"
"잘 봐! 이게 노동자의 손이야!"
"예술도 노동이야!"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을 판인데 예술은 무슨 예술!"


훗날 혁명 세력에 합류하는 농민 디에고와 주인공이 나누는 이런 대화가 그렇다. 순수한 신앙 또는 예술과 고통스런 현실 사이의 대립은, 보편적인 고민거리인 동시에 익숙한 주제다. 그런데 <게릴라들>의 진짜 매력은 그 다음부터다. 도입부를 지나면, '순수와 현실'이라는 익숙한 대립 구도 대신 인물의 개성과 갈등이 살아난다.

주인공은 사제가 될 몸이지만, 동성애자다. 이런 정체성을 감추기만 하던 그가, 혁명 세력에 몸담은 뒤 자연스레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는 대목은 압권이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주인공과 사랑을 나눴던 영국인 게릴라의 변화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고향에 뿌리 내릴 수 없었던 그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나라로 건너와 혁명을 심는다. 사랑과 혁명 모두에서 거리낌 없던 그가 막상 혁명이 성공한 뒤에는 변한다.

"쿠바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는지 알아? 강제 수용소에 집어넣는다고! 반혁명 분자라고 말이야!"
"무슨 상관이야? 여긴 쿠바가 아니야!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려면 혁명보다 더한 게 필요해!"
"나와 함께…"
"모두 끝난 이야기야!"


정치 권력을 바꾸는 혁명은 성공했지만, 주인공의 삶은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암시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 또는 정치적 변화에 대해 냉소적인 것은 아니다. 개인의 욕망과 자유, 그리고 공동체적 연대 사이의 미묘한 긴장이 <게릴라들>을 가로지르는 줄기다.

이런 긴장이 유난히 소중하게 다가온 데는 이유가 있다. 세속과 거리를 둔 순수한 신앙인, 예술가 지망생을 거리의 투사로 벼려냈던 게 한국의 1980년대였다. 다행히, 이렇게 길러진 투사들 가운데 많은 수는 거리와 감옥에서 평생을 보내지 않아도 됐다.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 1997년 수평적 정권 교체 덕분이다.

하지만 관공서 책상에 앉은 투사들이 오래 전 거리에서 품었던 이상에 얼마나 가까이 가 있는지는 조금 의문이다. 젊었던 시절, 그들은 '순수와 현실'이라는 대립 구도에서 종종 현실을 택하도록 강요받았다. 이런 선택은 <게릴라들>에서 묘사된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웠다. 시인 기형도는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라고 적었다.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와 '고통스런 거리의 상상력'의 갈등은 1980년대를 살아낸 이들을 엮어내는 공통분모다.

지금도 그들은 종종 같은 대립 구도에 서 있다. 그리고 같은 답을 택한다. 다만 같은 낱말에 담긴 내용이 다르다. 과거의 투쟁 경험이 이젠 '순수'의 자리에 있다. '현실'의 자리에는 시장이 있다. 그들은 여전히 '자연의 비유' 대신 '거리의 상상력'을 택하지만, 거리의 고통은 이젠 오로지 각자의 몫이다. 공통 분모가 될 수 없다.

그들에게 <게릴라들>은 묻는다. 한때는 순수한 모범생이었던 그들이 '부모 가슴에 못 박는 거리의 싸움꾼'이 돼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느냐고. 자신이 택한 이념이 패배하는 꼴을 볼 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은 아니었을 게다.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건 나 혹은 우리뿐이라는 독선 때문도 아니었을 게다. 폭력에 상처받는 동시대인에 대한 연민, 고통 받는 이웃을 차마 외면할 수 없는 마음…. 이런 것들이 이유가 아니었을까.

너무나 식상한 이야기, 그리고 종종 악용되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진보를 향한 모든 발걸음의 출발점은 결국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일 게다. <게릴라들>은 그걸 확인시켜주는 책이다. 시인 기형도 역시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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